갯벌의 오후 / 고경서(경숙)

 

 

 

바다가 옷을 벗는다. 썰물이 지나가자 갯벌이 덜퍽진 속살을 꺼내 보인다. 모래밭, 자갈밭에 이어 드러난 개펄은 뼈와 살과 근육으로 된 여체의 이미지로 다가온다. 맨바닥에 나신(裸身)으로 누워 촉촉한 물기를 햇볕에 말리는 중이다. 인기척에 놀란 방게들이 바다의 모공 속으로 잽싸게 파고든다. 피돌기가 왕성한 맨살을 긁는 것 같다. 은신처로 이만한 곳도 없을 성싶다. 억세고 치열하게 살아가기로는 인간이나 미물이나 다를 바 없다. 갯벌은 이 모든 생명을 그러안고 어머니처럼 묵묵히 견딜 뿐이다. 여기선 사람이 불청객이요, 이방인이다.

이곳은 서해바다. 해풍에 그을린 민낯의 제부도다. 만조 때는 꼼짝없이 갇혀버리는 섬. 물때를 모르고 떠난 게 불찰이었다. 우리는 바다가 내려다뵈는 창가에 앉아 ‘제부’로 시작되는 끝말잇기를 하면서 물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큰 물결이 작은 물결을 품에 안고, 큰 파도가 작은 파도를 등에 업은 채 어르며 달래고 있었다. 좁쌀 껍데기로 빚은 텁텁한 막걸리를 마시며 여흥에 취했다. 갯내를 첨가한 칼국수는 칼칼한 풍미를 돋웠다. 오랜만에 만난 피붙이와 함께여선지 바다도 마음도 늡늡했다. 이렇게 시간을 밀어내는 동안 누가 수문을 열어젖히는지 바다가 한달음에 멀어져갔다. 다시 바닷물이 들어찰 때까진 바다도 뭍도 아닌 갯벌이었다.

갯벌로 내려선다. 매 바위 뒤로 낡은 어선 한 척이 삐딱하게 꽂혀있다. 고향바다보다 큰 면적에 압도당한다. 갯바닥에 가로줄 무늬의 곡선들이 꿈틀거리는 듯하다. 이 단속적인 문양은 갑작스런 썰물에 쫒긴 바람의 다급한 발자국 같고, 새벽녘 그믐달이 훑고 간 손금 같기도 하다. 아니면 쉼 없이 움직였을 뭇 생명체들의 심호흡인가.

조급한 마음이 호미질을 한다. 점점이 흩어진 구멍 안에는 바지락이 들어있다. 큰 돌을 뒤지면 고동이나 따개비가 숨을 죽이고, 혼비백산한 갯강구들은 도망치기에 바쁘다. 얕은 웅덩이엔 치어가 퍼덕거린다. 바다가 흘리고 간 먹이를 줍기 위해 갈매기들이 악을 쓰며 날아다닌다. 방게가 표적이다. 게거품을 물고 줄달음치지만 인간의 손아귀만큼은 피하진 못한다. 포식자의 위협에서 벗어날 안전지대는 없다. 천적에게 잡혀 먹히고, 죽지 않으려면 몸을 숨기는 방법뿐이다.

갯고랑이 군데군데 뻗쳐 있다. 과거로 돌아가는 수로인가. 깊게 파인 물길을 되돌리는 거기, 방천을 철썩철썩 때리던 고향의 파도소리를 듣는다.

유년의 바다는 청람색 계열의 물빛으로 온다. 추억도 깔끄럽고 빳빳한 삼베의 질감처럼 투박해 구김이라곤 없다. 조수간만의 차가 심하지 않은 갯벌은 조무래기들의 놀이터치고는 한없이 컸다. 우리는 소꿉놀이를 하다 지치면 해초를 뜯거나 고동을 주웠다. 쏙을 잡던 경험은 아직도 생생하다. 자갈을 걷어내고 널따랗게 파 내려가면 동전 크기만 한 구멍들이 말똥말똥 눈알을 굴린다. 그 안에 된장 물을 풀고, 강아지풀이나 돼지털로 엮은 붓을 들이밀고 위아래로 살살 흔들면 다른 구멍 하나가 숨이 가빠진다. 구멍은 구멍끼리 통한다. 이때 구멍을 쑥쑥 밀어 올리는 집게발을 양손에 잡고 뽑아내는 순간, 물방울을 튕기며 분출하는 짜릿한 손맛은 일품이다. 쏙을 빼앗긴 허탈감인 듯 바다는 눈물을 쏟아낸다. 우리는 얼른 무릎걸음으로 다른 장소로 옮겨갔다. 밀물이 발목을 적시면 갯내를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추억은 옛 풍경 안에서만 살아 숨 쉬는가. 격랑의 세월을 건너오는 동안 풍요롭던 갯벌은 매립되고, 해안선도 무너졌다. 아파트의 오수가 스며들고, 굴 양식장이 생기면서 가공공장도 들어섰다. 공터엔 어구나 부표 등 폐자재가 야적되고, 날씨라도 궂으면 바다의 전언인 양 패각 썩는 냄새가 진동을 한다. 제 가진 것 모두 내어주고, 끝내는 허연 버캐를 게워내며 헐떡이는 갯벌. 그 안에 껴묻거리 한 추억을 들춰가며 뒤척이던 날들이 많았다. 기억 속 절해고도로 떠 있는 그 불임의 갯벌을 제부도에서 다시 만난 것이다.

한때 세상의 해역에서 물때를 놓쳐 풍랑에 휩쓸렸다. 제 몸집보다 큰 고동 껍질을 떠메고 사는 소라게의 처지였다. 절망과 좌절, 애증과 분노가 삼각파도로 덮쳐왔다. 내 안의 허술한 방파제를 할퀴고 물어뜯었다. 수렁이었다. 진펄에 빠진 발은 빼내려 할수록 더 깊이 빨려들었다. 자책과 무력감이 간수 뺀 소금처럼 딱딱한 덩어리로 가슴을 짓눌렀다. 염장된 욕망과 사사로운 감정을 삭이고 묵혀서야 마음은 날선 각을 버리는가. 자연의 질서에 순응하는 미물들의 생존법에서 풍파를 헤쳐 나갈 힘을 얻었다. 그 세월도 지나고 보니 내 생에서 가장 낮은 염습지의 땅이었다. 지난한 갯벌의 시간이었다.

갯벌은 바다의 자궁이다. 어둡고 서늘한 그곳은 뭇 생명을 배태하고 생산하는 산실이요, 서식처다. 어미의 생살을 찢고 나온 어린 생명에게 젖을 물리는 후덕한 모성이요, 해조음을 자장가 삼아 길러내는 생의 터전이다. 세상의 길들은 바다로 가고, 바다로 간 길들은 다시 뭍으로 돌아온다. 땅은 바다로, 바다는 땅 끝에 온전히 가닿지 못하는 시퍼런 그리움이 갯벌을 만든 건 아닐까.

유년의 추억도 지나온 삶도 하나의 원융(圓融)이다. 생의 물굽이를 휘돌아 어딘가로 이어지듯 세상은 순환한다. 수많은 남남끼리 스쳐가는 세상에서 특별한 관계로 운명 지어지는 인연들. 말꼬리를 물고 끝말잇기를 하면서 제부와 처형이라고 부르는 이 호칭도 우연만은 아닐 것이다. 탯줄에서 핏줄로 이어지는 끈끈한 결속은 생명 의지의 다른 표현이다. 따라서 연기설의 공간으로 수위 조절이 힘든 고통과 상처를 치유하고 정화시켜주는 삶의 여과기 같은 곳이 갯벌인지도 모른다.

황혼녘에 바라보는 바다는 밀물보다 썰물 때가 더 마음겹다. 휑한 공동에서 채움보다 비움이 많은 나를 보는 듯해서다. 세월은 황급히 떠나고, 상실감만 오롯이 회한으로 남아 해풍의 기척을 누구보다 먼저 느낀다. 고향의 갯벌에서 맡던 그 배릿한 젖 냄새가 바람결에 실려온다. 갯벌을 갖고 놀던 호미질을 끝내고, 구부렸던 허리를 일으켜 세운다. 방게도 소라게도 온기가 도는 집으로 찾아들 것이다. 생명의 탄생을 꿈꾸는 갯벌에 조용히 노을이 내려선다. 석양이 바다와 하늘을 끌어당겨 홍예문처럼 길을 잇는다. 까치놀이 널찍하게 퍼져 나간다.

저기, 볼일 끝낸 바다가 집으로 돌아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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