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을 날개에 품고

                                                      

 N712Z - American Airpower Heritage Museum (CAF) Mitsubishi A6M3 Zero                                                                        이현숙horsemen

 

 

  지나온 세월을 하늘에 그리는 치노Chino의 에어쇼에 왔다. 비행기 박물관인 ‘비행기 명예의 전당Planes of Fame’에서 해마다 5월이면 이 행사를 개최한다. 활주로에는 이미 40대의 역사를 품은 전투기들이 줄을 서서 방문객들을 맞이한다. 세계 1차 대전과 2차 대전 때, 여러 나라의 전선을 누비며 위용을 떨치던 그들이 기름칠을 한 날개로 번쩍 번쩍 햇볕을 쏘아 보낸다.

   각국의 전투기들이 자신들의 멋을 뽐내며 날개를 활짝 펴고 으쓱대는 모습은 장관이다. 캘리포니아 주의 작은 도시 치노에서 열리는 이 에어쇼는 일명 ‘골동품 비행기 쇼’로 불리며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전시장에 구경거리로 놓여만 있는 것이 아니라 노병은 죽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날이기도 하다.

   요술 봉이 스치고 지나는 듯, 줄지어 대기 중이던 전투기들이 하나씩 요란한 엔진 소리를 낸다. 매캐한 연기를 뿜으며 몸을 흔들기 시작한다. 활주로를 힘차게 차고 올라 푸르른 5월의 하늘에 놀이판을 펼친다. 10팀의 비행단이 그동안 갈고 닦은 공중 곡예Air Acrobatic를 한다. 션 터커 팀은 빨간색 오라클 첼리저를 타고 구름 사이를 장난치듯 굴러 나닌다. 옆으로 다섯 바퀴 돌고, 일직선으로 솟아올랐다가 맥없이 뚝 떨어지기도 한다. 체조 선수가 재주를 펼치듯 자유자재로 나는 모습에 탄성과 박수를 보냈다. 마치 누군가 리모컨으로 조절하는 장난감처럼 보여서 손바닥을 펼치면 그 위에 살포시 내려앉을 것 같다.

박물관 관장인 스티브 힌튼의 리드로 하늘의 캐딜락이라 불리는 P-51머스탱기 3대가 날아오른다. 그들은 날렵한 몸매를 자랑하며 하얀 연기를 길게 꼬리에 달고 리본을 만들어 낸다. 태양을 반환점으로 삼은 듯 치솟아 올라갈 때는 반짝이는 점이 되어 버린다. 꼬리와 동체도 없이 거대한 노란색 날개만 보이는 전익기 northrop N9MB flying Wing, 영화 ‘펄 하버’에서 보았던 P-40, 이곳에서만 볼 수 있다는 포케 폴프 등 일일이 이름을 열거 할 수가 없다.

   전투기들이 그때를 재현하는 공중전을 보여준다. 우수한 성능으로 미군과 연합군을 놀라게한 미쓰비시 제로기는 그들의 상징인 붉은 태양을 양 날개에 새겼다. 미국 공군의 P-38과 P-51이 그들을 추격한다. 쫒고 쫒기며, 아슬아슬하게 엇갈리는 전투기들로 손에 땀이 난다. 지상에서는 군인들이 지프차를 타고, 벙커에서 서로 총격전을 펼친다. 랩터F-22 Raptor가 폭탄을 투하하자 불기둥이 하늘로 치솟는다. 사실은 지상에 설치된 화약이 터진 것이지만 타오르는 불길에 가슴이 벌렁거린다. 

  군인들이 비명을 지르며 이리저리 뒹구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전쟁터의 긴박감을 생생하게 그려낸다.

랩터는 현재 인간이 만든 전투기용 제트엔진 중 가장 강력하단다. 그 소리가 활주로를 쾅쾅 울려 양손으로 귀를 막아야 했다. 문을 활짝 열어 속에 품은 미사일과 폭탄을 보여주는 것으로 그의 위용을 보이며 로켓처럼 수직 상승을 한다. 큰 체격에 비해 적에게 걸리지 않는 고기능 스텔스 전투기라니 믿어지지 않는다.

   한국전쟁에서 능력이 증명된 스카이 레이더Skyraider. 고장 난 변기에 화약을 부착한 ‘변기 폭탄’을 북베트남에 투하했다는 일화가 있다. 대동강의 교량에 손상을 입히는데 성공하며 강력한 화력 지원군이었다고 한다. 활주로에 내려 관람객들 앞을 천천히 지나는데 반으로 접은 날개에 미사일이 차곡차곡 부착된 모습이 마치 양팔을 반쯤 올리고 근육을 자랑하는 바디빌더 같다.

   5시간에 걸친 화려한 에어쇼를 마쳤다. 지상에는 세계 대전 당시를 재현하는 군인용 막사들이 설치되어 있다. 독일군과 연합군복장의 노병들이 나란히 서서 잡담을 나눈다. 당시 사용하던 타자기와 총과 의류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90도의 날씨에 귀찮은 내색도 없이 관람객들에게 설명해 주는 할아버지가 되어버린 참전용사들의 모습에 고개가 숙여진다. 모두 자원봉사자들이다.

   시끌벅적한 소리에 그쪽으로 향했다. 비행을 마친 일본의 미쓰비시 제로기 앞에 일본군 복장을 한 두 명의 노병이 서 있다. 한 명은 태양이 뻗혀 나간 모양의 옛 일장기를, 다른 사람은 사무라이 검을 들었다. 관람객들을 불러 자신들 사이에 세웠다. 셋이 양손을 위로 펼치고 ‘반자이’를 외치며 사진을 찍었다. 사진기를 든 사람에게 미쓰비시 제로기가 배경으로 들어가게 찍어야 된다고 강조를 한다.

   히로시마에 핵폭탄을 투하했다며 아직도 미국을 살인범들의 나라로 타도하는 일본인들이다. 미국인들에게 반자이를 외치게 하는 그 발상은 과거에 왕성했던 힘에 대한 그리움인가. 아님 단순한 재미를 주려는 서비스 정신에서인가. 일본은 진 것이 아니라는 그들의 주장을 대변하게 만들려는 것인가. 얼른 등을 돌렸다. 가슴속에 있던 무언가가 명치를 치고 올라왔다. 나의 무의식속에 잠재된 일본에 대한 감정이 이건 아니라고 외친다. 얼마 전에 다녀온 글렌데일의 양손을 꼬옥 움켜진 위안부 할머니 동상이 떠오른다. 몸이 부르르 떨린다.

   모든 진실은 미쓰비시 제로기와 오늘 하늘을 날며 역사를 재현한 전투기들이 알겠지. 세계대전을 겪으며 창공에서 삶과 죽음을 목격하고, 그 중심에 있지 않았던가. 긴 세월동안 생생한 기록을 날개에 담고 있는 그들 아닌가. 한번 씩 이렇게 날개를 펴서 역사는 죽지 않고 흐르는 것임을 말한다.

   치노의 에어쇼는 역사의 현장이다. 전쟁을 겪지 않은 세대들에게는 에어쇼 중간에 참전용사가 직접 경험담을 들려주니 귀로 듣고 눈으로 보고 느낄 수 있는 생생한 증언 장이다. 그 시간이 있었기에 지금 우리가 존재하는 것이다. 이런 게 역사다.

 

 

  세월을 품은 전투기들을 돌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