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각의 링
권투를 하는 사람들은 사각의 링 안이 그들 세계의 전부다. 그 안에서 승자와 패자가 갈린다. 몇 분의 게임을 위해 얼마나 치열하게 연습을 하는지 영화 ‘록키’ 시리즈를 보면 나온다. 때리고 맞는 것이 싫어 권투경기를 보지 않는다. 남을 때리고 바닥에 눕혀야 이기는 세상. 맞고 피 흘리는 장면을 보면서 치명적 순간을 놀려 한방 더 치라고 흥분하는 관객들을 보면 무섭기까지 하다.
시아주버니 조지Gorge는 권투 트레이너였다. 그래서인지 72세지만 아직도 단단한 체력의 소유자다. 세계 챔피언이자 바르셀로나 올림픽의 메달리스트인 오스카데 라호야와 찍은 사진이 그의 방문을 열면 바로 보이게 걸어 놓았다. ‘골든보이’로 불리는 라호야의 기본 틀을 잡아준 사람이다. 초등학교 때 그를 훈련시켰다. 무슨 일이든 기초가 든든해야 하는 법이기에 그는 자신이 오스카를 세계 챔피언으로 키우는데 큰 공을 세운 장본인이라고 자랑스러워 한다.
남편은 그의 트레이너로써의 자질을 인정한다.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했고, 그 자신이 챔피언을 해 보지 못했지만, 훈련은 잘 시킨다는 것이다. 어린 오스카는 자주 집에 와서 어머니가 해준 음식을 맛나게 먹고 가곤 했단다. 형이 오스카를 가리키며 차세대 복싱 왕이라고 할 때 남편은 ‘저렇게 삐쩍 마르고 작은 아이가 어떻게’ 하며 믿지 않았단다. 결국 그 아이의 아버지와 사이가 나빠져서 그만 두기는 했지만 아직도 오스카는 자신이 키운 영웅이라고 동네방네 자랑이다.
조지는 누구와 오래 사귀지를 못한다. 복싱 트레이너지 인생에 대한 조언자는 아닌데 그것을 혼동한다. 조금 안면을 익혔다 싶으면 참견을 하고 가르치려든다. 이건 이렇다 저건 저렇다. 내말대로 해야 한다. 몇 번은 예의로 들어 주다가 나중에는 모두들 슬슬 피한다. 특히 그의 실력을 전해들은 부모들은 자식을 맡겼다가 길어야 석 달, 계속되는 그의 잔소리에 질려서 트레이너를 바뀌어 버린다.
한동안 친해지려고 노력을 많이 했다. 아침이면 반갑게 인사를 하고 한국 음식을 하면 먹어보라고 권하기도 했다. 주위에서 흉을 보아도 그의 방문 앞을 지날 때마다 ‘당신과 친해지고 싶어요.’ 하며 마음속으로 기도도 했었다.
내가 가까이 가려고 노력할수록 그는 공격적이 된다. 할 말 있으면 링 위로 올라오라는 듯. 시작 종소리와 함께 권투 장갑을 턱 부딪치는 순간에 동물적인 감각으로 상대가 나보다 강한지 약한지 금방 알아차린다더니 나는 한방 쨉걸이도 안 될 것이다. 긍정으로 한 발자국 다가가면 그는 부정으로 두 스텝 물러서며 반격할 기회를 노린다. 가끔 말도 안 되는 트집을 잡아 남편에게 고자질도 한다.
링이 둥글다면 달랐을까. 사각의 모서리기에 무언가가 닿을 때마다 그는 경계의 눈으로 움츠려든다. 주먹을 휘둘러 소년원에 다녀온 후로 생긴 열등감이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점점 그만의 세계로 침잠시키는지도 모른다. 직장도 길게 머물지 못하고, 이웃들이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피해의식에 항상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풀리기는커녕 매사 꼬이기만 하는 삶 속에서 상처투성이가 된 몸을 끌어안고 어쩔 줄 모른다. 아내와 자식들도 연을 끊은 지 20년도 넘었다니.
이겼다고 드레이너의 어깨 위에 올라 만세를 부르고 승리의 인터뷰를 하는 한쪽 눈이 퉁퉁 부풀어 오른 선수가 아니다. 시합이 끝나 관중석도 텅텅 비고 불마저 커져버린 링의 한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있다. 그림자조차 등을 돌린 그의 삶은 패배의 연속이다. 들킬까봐 강한 척 허세를 부리지만 그런 모습이 더욱 초라하게 만든다.
외톨이인 그를 남편은 잘 챙긴다.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형이 죽을 때까지 돌봐주라고 유언을 하셨다는 것이다. 며칠 집을 비울 때에도 냉장고를 채워놓는다. 글을 잘 모르기에 서류를 챙겨주거나 관공서갈 일이 있을 때 도와주고 해결해 준다. 챔피언을 가리는 권투시합이 있을 때는 돈을 따로내고 케이블 회사에 신청을 해서 형이 볼 수 있게 해 준다.
시부모보다 더 어렵다는 시아주버니. 그는 그렇게 링 위에 웅크린 채 세상에 대한 피해의식으로 몸을 둘둘 감고 있다. 어머니가 던진 하얀 수건으로 인해 남편과 나는 그를 지켜보며 링 주위를 맴돈다. 링 위에서 싸워야 하는 상대는 본인임을 그가 알아야 할 터인데. 승패를 떠나 최선을 다한 사람이 진정한 승자가 아닐까. 실패를 한들 어떠리. 우린 누구나 실패를 겪는다. 그 자체를 인정하고, 그 것을 바탕으로 더 노력하며 사는 것이 인생살이다.
시아주머니 조지. 피할 것이 아니라, 숨을 것이 아니라 당당하게 링에서 내려와 가족들과 어울려 남은 삶을 즐겼으면 좋겠다. 아무도 그를 패배자라 하지 않는다. 스스로 씌운 둘레를 훌훌 털어버리고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오길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