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광등
백열등의 불빛을 좋아한다. 밝지만 차가운 느낌을 주는 형광등보다 따뜻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부엌이나 식탁에선 더욱 그렇다. 음식의 색깔을 자연 그대로 보여 주기에 미각을 훨씬 더 자극하는 듯하다.
아버지는 눈솔미가 좋았고 아이디어가 뛰어나며 게다가 웬만한 것은 손수 만드시는 재주꾼이셨다. 우리 형제들의 책상과 의자, 꽃밭의 찔레 넝쿨 아치도 모두 아버지의 작품이었다. 아버지만큼은 아니지만 나도 조금은 그 손재주를 이어받은 것 같다. 집안의 사소한 고장은 전문가를 부르기 전에 먼저 고쳐보기를 시도해 보는 습관으로 보아서다. 가끔 잘못 건드려 문제를 크게 만들기도 한다. 여전히 내게 흥미 있는 일임엔 틀림없다. 쉽게 문제가 풀려 성공을 맛볼 때의 쾌감은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신난다.
초등학교 여름방학 숙제는 의레이 곤충채집과 식물채집이 많았다. 어느 해인지는 폐품을 이용한 작품 만들기가 방학숙제였다. 아버지는 수명이 다 된 형광등으로 무언가를 만드셨다.
기다란 형광전구의 안쪽에 있는 하얀 칠을 말끔히 벗겨내신 후 며칠 동안 물을 부어 씻어내셨다. 화학성분을 제거하시고 투명한 전구 속으로 수초와 예쁜 금붕어 두 마리를 넣어주셨다. 긴 나무판을 대어 고정한 후 개학 날 가지고 갈 때까지 마루 기둥에 붙여놓으시니 내 눈높이에서 움직이는 물고기와 친구가 되었다.
요즈음 생산되는 형광등은 옛날의 것들과는 많이 다르다. 한국에서 처음 나온 형광등은 전기 스위치를 올리면 꼬마전구가 깜박이기를 몇 번 반복한 후에야 기다란 형광등에 불이 켜졌다. 전구가 오래된 것일수록 좀 더 기다려야 했다. 흔히 감각이 느린 편인 사람들을 형광등이라고 칭한 것도 이런 이유다.
기다림의 여유가 점점 사라져 가는 시대에 살고있다. 사람들은 즉석에서 모든 해답이 나오기 원한다. 스위치를 올림과 동시에 환한 불이 들어오는 요즈음의 형광등과 같이.
나도 모르는 새에 이런 삶에 익숙해져 감을 부인할 수 없다. 자칫 머뭇거리기라도 하다간 대열에서 뒤처져 패자가 될까 하는 불안함 때문일까. 남의 실수를 참아주지 못함과 내 생각을 거침없이 뱉어내는 무례도 거리낌 없음이 새삼 부끄럽다.
침대에 누워 리모컨의 스위치를 눌러본다. 반사적으로 켜지는 불빛은 참으로 편리함을 주지만 왠지 따뜻함은 느낄 수 없다. 잠깐 머릿 속에, 가슴에 새겨본 다음 반응해도 그리 늦지 않을 것을.
옛날 꼬마전구의 깜박임이 여유와 지혜로움으로 다가온다. 형광등이라 불려도 그리 섭섭할 것 같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