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름은 덥지 않은 이상한 여름이었다. 내가 맞게 될 예기치 못한 삶의 계절을 알려준 걸까. 1980년7월29일, 나는 두 번째 딸아이를 제왕절개 수술로 분만하였다. 자연으로 아기를 낳은 산모보다 입원 기간이 길었고 배의 상처가 아물기 전까지 몸을 움직이기가 어려웠다. 3층 병실에서 열흘을 머물렀다.
그해 여름은 쓸쓸했다. 남편은 뉴욕 지사에 근무 발령을 받았지만, 아기의 출산을 보기 위해 출국을 미뤘다. 기다리던 아들이 아니었으나 섭섭한 속내를 감추고 둘째 딸을 안아 보고 이튿날 미국으로 떠났다. 여자들이 흔히 겪는 산후 우울증이 아니더라도 아이를 낳을 때면 돌아가신 엄마 생각에 마음이 가라앉곤 했다. 이번엔 남편마저 곁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 했는가 ~~' 이 노래는 당시 조용필이 부른 라디오 연속극의 주제가였다. '창밖의 여자'라는 제목과 달리 나는 입원실 창안에서 그 노래를 계속 들었다. 누가 틀어 놓았을까. 혹시 실연당한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다. 병원 뒤편에 있는 자동차 정비소에서 온종일 반복되는 그 노래를 나도 곧 따라 부를 수 있게 되었다.
그 여름 이후 내 삶은 많이 바뀌었다. 마지막 여름 방학이 되었다. 몸이 회복 되는 대로 남편에게로 가야 했기에 7년 동안 근무한 여자 중학교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교편생활을 시작할 때만 해도 평생을 선생님으로 살게 될 줄 알았다. 학생들과의 하루가 무척 즐거웠다. 미국으로 올 기회가 아니었다면 아마도 지금까지 교직을 지키고 있었을 것이다. 남편의 해외 근무로 시작된 미국에서의 새로운 날들을 상상하지 못했다.
여름은 생명을 키우는 힘을 갖고 있다. 주재원 시절이 끝나며 내게 닥친 낯선 이민자의 치열한 삶은 뜨거운 여름 볕 아래 몸을 달구어 마지막 열매를 밀어내는 작업이었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일상과 실패의 시간, 날마다 겪는 새로운 경험은 봄이 틔워낸 연한 초록의 새순을 거칠게 더욱 억세게 키워갔다. 이처럼 나의 여름을 방어적 위험 기제의 인생관으로 살아내야 했다. 돌밭 위에 떨어진 씨앗들처럼 아예 말라버린 희망이 얼마나 많은지. 때론 주변의 모든 환경에 순응하고자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어야 했다. 가족이라는 엄청난 힘을 통해 이겨낼 수 있었던 삶의 파고였다. 고맙게도 그 안에서 7월의 아기는 잘 자라났고 지금 서른네 번째의 여름을 맞고 있다.
인생에도 계절이 있다면 여름은 이미 내 곁에서 멀어진 지 오래다. 예순세 번의 여름 동안 무엇을 만들고 키워 왔을까. 인생의 의미를 만든다거나 유익을 찾으려 어지간히 노력하며 살았다. 내 눈으로 나의 얼굴을 볼 수 없듯 그 시간을 살아낼 땐 그저 앞만 보고 달려왔다. 이제야 돌아서서 바라볼 뿐. 고통이나 환난 중에서 역설적으로 감사의 마음을 갖고 기쁨을 누린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아침에 도를 깨우치면 저녁에 죽어도 좋을 것'이라는 선현의 말씀을 상기한다.
가을이 내게 가까이 왔는지 삶이 예전과 많이 다르다. 급한 성격도 조금 다스려진 느낌이고 온갖 걱정으로 잠 못 이루던 밤도 적다. 겁 없이 달려들던 기개마저 사라진 듯하다. 참아낸 고통이 결국 나를 변화시켜 살게 한 원동력이 되었음을 깨닫는다.
다시 올 여름을 희망한다. 새로운 봄이 지나가면 약동의 계절이 뒤이어 올 것이다. 나는 그 길 위 나무그늘에 걸터앉아 뭇사람의 삶을 바라보고 싶다. 행여 더위에 넘어지는 이, 너무 달리다 지쳐 목마른 사람이 있다면 일으켜 주고 물을 건네리라. 이 또한 아름다운 세상의 한 모퉁이를 채우는 몫이 될 터이니까. 틈틈이 내가 치열하게 살아낸 여름을 기억하리라. 후회도, 미련도 소용없는 자국들을 추억할 때면 함께 머물렀던 사람들이 그리워질 것이다. 나의 마지막 여름을 지낸 후 추수한 곡식단을 한 아름 안고 누런 가을 들녘에 서서 웃고 있는 내 모습을 그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