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터

 

물로 비석을 씻어내린다. 동판 위에 새겨진 이름을 쓰다듬을 때 그이의 숨결이 손끝에 느껴온다. 모든 감각기관을 동원해 아주 섬세한 전율까지도 흡인한다. 남편과 내가 함께 쉴 자리로 마련된 곳은 집에서 불과 2 마일 떨어진 성공회 묘지이다. 나누고 싶은 세상 얘깃거리가 떠오르면 이곳을 찾는다. 아직 더 하고픈 말이 있는데 마주 보고 들어줄 그는 없다. 좋아하던 흰 데이지 들꽃 한 묶음으로 안부를 묻는다. 밑가지 잎을 훑어내고 꽃병에 는다. 편히 누운 그들의 가슴 위치에 꽃병이 놓이는 것이라 한다. 내가 그에게 주는 꽃이지만 그의 가슴에 품은 외로움 다발을 내가 건네받는 듯하여 가엾은 그리움이 스친다. 주변 묘지에 시들지 않은 꽃들이 많은 것은 그만큼 기억하는 이들이 있어 영혼에게 기쁨을 전함이다.

 

머리맡에 이고 있는 비석의 오른편은 나의 빈자리다. 어느 날, 더는 그리움 때문에 별 사이를 방황하지 않아도 될 날에 채워질 공간이다. 무엇으로 기억될 것인가. 숱한 만남의 시간 속에서 어떤 뒷모습을 보여줄 것인가. 모여진 하루하루를 빈 종이 위에 얹어 본다. 수 없이 다른 모양의 나날들, 채색된 삶의 조각들이 어우러져 창공을 수 놓을 때 멀리멀리 수묵향기로 퍼지고 싶다.

 

남편은 아픔과 함께 삶을 지탱하면서 그가 떠난 후 남겨질 상황에 대비한 자신의 역할을 최대한으로 갖추어 놓았다. 눈에 보이는 것들의 소유권 이양은 물론 아빠의 자리까지도 감당해야 할 내게 아이들의 튼튼한 울타리가 되라는 다짐을 잊지 않았다. 생애의 마지막 가을, 햇살 스미든 어느 날 그는 스스로 영원한 쉼터를 정하고 싶어 했다. 내 가슴은 차마 이별이 다가올까 시려 오는 듯 무거운데 묘지 직원의 안내에 따라 빈자리들을 둘러보는 그의 침묵은 차라리 살얼음판이었다.

가파르지 않게 언덕진 곳, 남향으로 굽어 보이는 산자락이 드넓은 천국의 평원처럼 해맑다. 머무는 햇살이 종일토록 따사롭다. 뒤편엔 토팽가 캐년의 바위산이 병풍처럼 둘러 있어 행여 외로움을 기대며 쉴 수 있을 듯하다. 낯선 영혼들 틈에서 우리가 겪어 온 이민자의 서러움을 다시 이겨 내느라 애쓰는 건 아닐까.

촘촘히 자리한 비석들이 이름으로 가득하다. '사랑받았던 아빠, 엄마, 남편, 아내, 또는 할아버지, 할머니', 어느 젊은이의 자리엔 '귀여운 내 아기'라는 구절도 있다. 각기 끝없는 메아리로 남겨주고 싶은 이야기들이 마분지 만한 동판 위에 너울거린다. '사랑해요', '언제까지나 우리 가슴 속에 있어요.' '당신을 잊지 못해요.'

 

그는 나와 함께 묻히는 자리를 원했다. 세상에서 못다 한 우리들의 이야기를 계속 나누기 원함일까. 손잡고 머물렀던 시간이 행복했다. 서로 다른 모양의 마음을 짜 맞추느라 부딪히며 아파한 날도 많았다. 고달픔을 상대에게 떠넘기고 도망쳐 사라지고픈 때도 있었다. 사랑하고 아끼며 기대어 함께 지탱해온 긴 시간이 나를 휘감아 남겨진 내 삶을 끌어갈 쟁기가 될 것이다.

그와 함께한 33년의 세월에 너무 익숙해 있음인가, 문득 내 혼자됨에 놀라곤 한다. 각종 서류의 ‘미망인’칸에 표시해야 할 때, 연말 남편 동문파티에 갈 수 없을 때, 동창모임에서 남편 자랑에 맞장구치지 못할 때면 가슴 한 이 시려 온다. 죽음도 삶의 한 부분이라 마음에 새기며 일상에 몸을 맡긴다. 외로움 한 자락씩 만이라도 거둘 수 있다면 가벼운 날갯짓으로 높은 창공을 날아 보리라.

 

가을이 깊어 가는지 국화가 만발이다. 해마다 11월이면 많은 기억이 나를 깨운다. 시집간 달이고 첫 딸도 11월에 낳았다. 사랑하는 엄마도 가을 국화 향기와 함께 11월 끝에 하늘로 떠나셨다. 모두가 풍요의 계절이라고, 감사의 절기라며 마음 넉넉한 시절이 돌아오면 늘 내 가슴은 떠나버린 제비들이 남긴 처마 끝 빈 둥지가 된다. 철새들은 봄이면 다시 오리라마는 세상 길을 헤매어도 그 어디에서 만날 수 없는 사랑하는 이들이다. 좀 더 머물러 주지 그랬어. 나 혼자선 너무 힘든데.

둘이 맞잡고 가야할 길을 홀로 가는 일은 외롭다. 사람은 물론 모든 사물은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가 정해져 있고 지켜야 할 시간이 있음이다. 애당초 함께 계획한 삶의 설계도가 끝날에까지 어긋나서는 안 될 일이다. 한참 진행 중인 건축물이 지진을 만난 것처럼 무너져 버린 내 마음을 추스르기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이제 그가 남겨준 좋은 것들만 안고 살아간다. 따뜻한 가슴을, 다정했던 그 손길에 묻어나는 체온을 더듬는다. 정확한 음정과 박자는 아니었지만, 자신의 마음이라며 불러주던 나훈아의 노래 '사랑' 이 들리는 듯 하다. 두 딸에게서 아빠 닮은 모습을 찾아 본다. 손자에게도 외할아버지의 사랑 한 줌이 녹아있음을 느낀다.

죽음을 준비하며 의식이 돌아올 때마다 내게 되풀이하여 들려준 남편의 마지막 말, '미안해, 고마워, 사랑해.' 라고 귀에 맴돌아 울린다. 남은 시간 동안 아름다운 모습으로 살다가 나 그에게로 돌아가리라. 다시는 놓지 않으리라.

청명한 하늘에 갈까마귀 한 마리가 솟구쳐 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