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떠돈다
한영
익숙하지 않은 곳에 가면 어색하다. 주위의 문화나 관습을 잘 모르면 불안하기도 하여 조심하게 된다. 게다가 예상하지 못한 반응을 상대방이 보이면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하다. 대한민국은 내가 태어난 곳이지만 오랜만에 방문하면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여 당황한다. 마치 미국에 처음 이민하여 느끼던 이방인의 감정을 갖게 된다.
한국방문 중에 독감 예방주사를 꼭 맞는 게 좋다는 권고를 들었으나 무심하게 흘려들었다. 뒤늦게 막상 맞으려하니 내가 머무르고 있던 소도시에서는 백신이 다 소진되어 맞을 수 없다고 했다. 외국에서 온 사람은 유로로 맞아야 하고 그 수량은 한정돼 있다고 했다. 서울에 있는 병원을 알아보기로 했다. 여러 곳을 문의한끝에 겨우 한 곳을 찾아냈다. 다행히도 서울 고속버스 터미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인터넷에서 지도를 검색하고 가는 길을 머릿속에 그려 두었다. 고속버스에서 내려 내 생각대로 터미널을 나선 것이 잘못이었다. 한참을 가도 그 빌딩을 찾을 수 없었다. 갑자기 방향 감각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전화기를 꺼내 길 안내를 열어 보았으나 당황한 마음에 더욱 혼돈이 가중되었다. 사거리에 서서 방향을 정하지 못하고 있는데, 노란 조끼를 입은 남자분이 보였다. 아마 공무원이거나 건설 일을 하는 분 같았다. 길을 물어보는 게 낫겠다 싶어서 다가갔다. 빌딩 이름을 대면서 혹시 아는지 물어봤다. 그는 잘 모르겠으나 얼마 전에 새로 생긴 건물이 저쪽에 있다며 한 방향을 가리켰다. 자신 없는 말투였다. 그러고는 나에게 어디를 가려 하냐고 물었다. 병원이라고 하니까 갑자기 그의 목소리가 커졌다. 왜 미리 자세히 알아보고 오지 않았느냐고 큰 소리로 말했다. 야단맞는 기분이 들어서 그냥 말없이 돌아섰다. 황당한 기분이 들었다. 모르면 모른다고 하지 왜 화를 내지? 그의 무례함이 거북한 감정으로 마음에 남았다.
오전에는 자주 산책을 나갔다. 새로 지어진 아파트 뒤로는 잡목이 무성한 언덕이 있다. 옆길에는 산책하기 좋도록 포장이 잘되어 있다. 나무와 풀잎 냄새를 맡으며 언덕을 올라 왼쪽으로 돌아 나오면 포장된 산책길이 나온다. 길옆으로는 각종 운동기구가 즐비하다. 기구에 올라서서 허리 운동을 하던 여인이 어느새 옆으로 다가오더니 말을 건다. 산에서 내려오는 걸 봤을 텐데 어디 갔다 오느냐고 묻는다. 언덕을 돌아 나온다고 대답해 줬다.
“아니, 여기서 해도 운동이 되는데 왜 힘들게 거기에 갔다 왔어요?” 여인이 큰 소리로 말한다. 마치 비난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순간 마음이 불편하다. 나는 충분히 즐기고 왔는데, 그게 야단맞을 일인가. 금세 대답이 나오지 않아서 애매하게 웃으며 경사진 길을 계속 내려갔다. 그 여인이 따라오면서 말한다.
“에이, 그렇게 곧장 걸으면 운동이 하나도 되지 않아요. 자 이렇게 지그재그로 걸어 봐요.” 내 앞에서 시범을 보인다. 성가신 기분이 들었으나 빨리 따라 해야 그 자리를 벗어날 수 있을 것 같다. 발걸음을 재촉했다. 내 등 뒤로 그녀의 시선이 따라온다.
운동하던 여인의 목소리에 겹쳐서 서울에서 만났던 노란 조끼의 남자가 생각난다. 오지랖, 과잉 친절과 과도한 참견이지만 그들은 타인에 감정이입을 시도하고 공감을 나누며 도와주려고 했다. 그 마음은 알면서도 당황함과 어색함은 여전히 남는다. 개인주의에 익숙한 나의 몸과 마음은 과한 관심과 호의를 받는 것에 어색하다. 예(Yes) 아니요(No) 같이 명확한 말로 간단히 끝나는 문화에 익숙해졌으나, 그 안에서 가끔 설명할 수 없는 써늘한 느낌이 들긴 했다. 그러나 또한 ‘정’이라고 표현되는, 고향 사람들 정서에 함께 도달하기에는 여유가 부족하다. 다른 문화권에서 세월의 흐름을 따라 어렵사리 적응하려 했던 시간이 이제는 모국의 문화에 부딪혀 버석거린다. 번화한 거리에서 맞지 않은 옷을 입고 서 있는 듯, 시선은 방향을 잃고 헤맨다. 어색한 몸짓으로 이방인이 되어 떠도는 느낌에 외롭다. 차라리 인생은 여행이라고, 아직도 즐거운 여행을 계속하는 중이라고 자신을 설득해 보면 좀 나아지려나.
엘리베이터 안에 초등학생 두 명이 들어온다. 나를 보더니 꾸뻑하고 절을 하며 “안녕하세요?”한다. 전혀 모르는 아이들이 인사를 하니 오히려 내가 잠시 당황한다. 그래~ 우물쭈물 말을 더듬는다.
<중앙일보 2023.01.27>
한영 선생님의 수필이 미주 중앙일보에 실린 것을 축하드려요!
미국에서 오래 지내다보니 선생님의 '지금도 떠돈다'란 말씀에 동감해요. 꾸뻑 인사하는 초등학생들이 정말 귀엽고 기특하니 완전 반전이네요^^
저에게도 허탈한 에피소드가 있답니다. 몇 년 전에 생각에 잠겨 지하도를 걷다가 문득 고개를 들었는데 어느 술 취한 남자가 제게 막 욕을 하면서 "왜 땅을 보며 걷고 G랄이야?" 그런 사람에게 대꾸하지 않고 정말 기막혀서 입을 꾹 다물고 있었는데 ... 당시 바닥으로 떠돌던 생각을 다 잊고 말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