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밖, 그 시선
한 영
초여름 아침 해가 고목의 큰 가지 위에 머문다. 북향으로 난 창가에 앉아서 차를 마시고, 책을 읽고 무심히 창밖으로 눈을 돌리기도 한다. 이 창가에 있는 것을 좋아한다. 마음이 편안해지기 때문이다. 창문을 통해 보이는 것들, 모든 것이 그대로 인 것 같은데도 느껴지는 미세한 변화, 그것이 좋다. 모든 것이 정지된 것 같은 요즈음이지만, 어쩌면 다 잘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창밖의 풍경은 단순하다. 나이 먹은 유칼립투스 나무가 오른쪽 창을 가득 채우고 있다. 머리 쪽에 푸른 잎가지가 있을 뿐 몸뚱이는 그저 굵기만 하다. 희끄무레한, 바랜 연회색의 몸통은 군데군데 껍질이 갈색이 되어 떨어져 나갈 듯 간신히 붙어있다. 구석진 북쪽에 있는 이 고목은 늘 조용하다. 아침에 해님이 잠깐 아는 체하고 가면 저녁나절이 돼야만 마감 인사를 할 수 있다. 든든히 서 있는 것을 흔들어 보는 것은 재미없는지 바람도 이곳을 피해 가는 것 같다. 아무리 좋아 보여도 창을 통해서 보는 바깥은 액자 속의 사진일 뿐이다. 가끔은 지루하고 갑갑하여 유리를 뚫고 나가고 싶은 이 느낌, 너무 익숙하다.
유리창 앞에 앉은 내가 갑자기 줌 아웃(Zoom Out)된다. 뒤로 물러서고 모든 것이 작아진다. 나는 여섯 살이다.
아이가 작은 유리창을 통하여 바깥세상을 엿보고 있다. 초등학교 들어갈 때까지 홍역이나 볼거리 같은 호흡기병을 많이 앓았다. 약 기운에 땀을 흘리며 방안에 갇혀 있다시피 했다. 할머니 방에는 아이들 손바닥만 한 유리가 마당을 향한 미닫이문에 달려있었다. 유리를 덮고 있는 창호지 뚜껑을 열면 마당이 보였다. 어머니는 치마를 단단히 여며 묶고 그 위에 행주치마를 덧대 입었다. 아침나절 수돗가에서 방망이를 리드미컬하게 두드려 빨래하고, 뽀얗게 헹군 것을 마당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빨랫줄에 걸어 놓는다. 쌀을 씻는 어머니를, 독들이 가지런히 놓여있던 장독대를, 줄에 널린 빨래를 딴 세상처럼 바라보았다.
햇살이 창호지를 뚫고 방으로 들어오는 오후가 되면 지루해져서 할머니가 잠시 눈을 붙이신 사이에 살짝 마루로 나갔다. 어머니의 시선을 붙잡아 보려고 그 모습을 뒤쫓아 가는데 언뜻 뒤돌아본 어머니는 놀라서 뛰어왔다. 그리고는 손짓을 하며 다시 방으로 들여보냈다. 그곳이 아이가 있어야 할 곳 같았는데 언제나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다시 방으로 들어가야 했다. 창밖은 아름답고 즐겁고 쾌적한 곳이라고 생각으나 또한 허락되지 않은 곳이었다. 아이가 자라나고, 갇혀 있을 필요가 없이 건강하게 자라났을 때야 사실 그런 게 아니었다고 알게 되었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행복하게 수돗가에서 부엌으로 경쾌하게 드나든 것 같은 어머니는 사실은 추위에 동동거리며 밥을 짓고, 손 시린 찬물에 빨래한 거였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아픈 자식도 들여다보지 못하고 새벽부터 밤까지 일한 고단한 생활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창밖이 낙원같이 보였던 이유는 그곳에 어머니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떠오르는 장면은 선명하지만 이미 너무나 멀어진 시절은 잡히지 않고 아득하기만 하다.
아쉬움으로 미련이 많은 사람처럼 자리를 차고 나가는 꿈을 자주 꾼다. 꿈처럼, 어린 시절처럼, 있는 자리를 떠나보고 싶다. 그래야 살아 있다고 느낄 것 같다. 안에서 보는 창밖은 아름답고, 활기차고, 향기로워 보이지만 실상은 짐작했던 것보다 더 뜨거울 수도, 아니면 싸늘한 기운이 느껴질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그곳에는 내가 원하고 또 필요한 것들, 자유와 따뜻한 마음과 밝은 미소가 있으리라고 믿는다.
여전히 창밖의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 그곳은 변함이 없다. 열어야 할 것은 유리문이 아니라 내마음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 스쳐지나간다. 찾는 것은 창밖에 있는 게 아니라 내안에 있을지도 모른다. 시선을 돌려야 하나? 밖의 고목처럼 몸은 움직임이 없는데 마음은 시공을 넘나들며 부산하게 헤매고 있다.
며칠 비가 오기에 창을 통해 자주 밖을 바라 보았습니다.
한영선생님의 작품을 읽으며 둘째 언니의 모습과 겹쳐졌습니다.
방에서 손바닥만한 유리창으로 밖을 보며 잔 기침을 하던 언니의 등이.......
기관지가 나빴던 언니가.....
언니도 선생님과 같은 마음이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