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중앙일보] 발행 2021/06/25 미주판 21면 입력 2021/06/24 20:00 수정 2021/06/25 16:54

 

 

 

박세리와 장 방 드 벨드

 

1998년, 위스콘신주 블랙 울프 골프장에서 ‘LPGA US 오픈’이 열렸을 때였다. 연장전 마지막 18번 홀에서 박세리는 티샷을 홀의 왼쪽 연못가로 보냈다. 신발과 양말을 벗고 개울물에 들어가 풀숲에 떨어 진 공을 침착하게 쳐 내던 그녀의 모습은, 햇볕에 검게 탄 그의 종아리와는 너무나 대조적인 새하얀 발목의 모습과 함께 당시 초보 골퍼였던 내게도 무척 감동적인 장면으로 각인되었다.

다음 해, 스코틀랜드의 카누스티 골프장에서 열렸던 'PGA 디 오픈 챔피언십’의 마지막 날, 그때까지 선두를 달리던 프랑스의 장 방 드 벨드는 최종 라운드 18번 홀에서 공을 개울에 빠트렸다. 3타 차로 앞서던 그는 더블 보기만 해도 우승인데 신발을 벗고 물에 빠진 공을 치려고 개울에 들어섰다. 개울둑은 높았다. 물속에서 3타를 쳐서 연장전 끝에 그는 우승을 스코틀랜드 출신의 폴 로리에게 헌납했다. 그때 중계방송 중이던 골프 전문가들은 그의 서툰 전략을 안타까워했고 나는 그 전 해에 있었던 박세리의 빛나는 홀 공략을 떠 올렸다. 박세리는 과감하게 물에 들어가서 성공했고 벨드는 불필요하게 물에 들어가서 실패했다.

그날의 골프를 취재한 LA타임스의 다음 날 관련 기사 제목은 ‘프렌치 디스커넥션(French Disconnection)’이었다. 진 헤크만 주연 영화 ‘프렌치 커넥션(French Connection)을 패러디해 뒷심이 부족했던 프랑스의 신예 벨드를 비꼰 것이다.

요즘 골프가 대세지만 끝나고 나면 준비해 온 도시락이나 클럽 하우스에서 투고한 음식을 궁색하게 벤치에 앉아서 먹을 수밖에 없다. 함께 플레이 한 멤버들과 앉아 아웅다웅 18홀을 복기하며 웃음꽃을 피우던 것도 까마득한 옛날 일이 되었지만 카트를 혼자 탈 수 있고 같은 팀원들과도 거리 두기를 할 수 있는 유일한 운동이다.

골프는 인간의 죄를 벌하기 위해 스코틀랜드의 칼비니스트들이 만들어 낸 전염병이라고 한다. 한 번 그 매력에 빠지면 헤어 나오기가 쉽지 않다. 우리 부부도 한때는 주말이면 동틀 무렵부터 석양이 지나 공이 희끗희끗 겨우 보일 때까지 골프장에서 살다시피 했다.

남편은 하루에 20보도 채 걷지 않는 사람이었다. 퇴근하면 차고에서 식탁으로 곧장 와서 저녁을 먹고 대 여섯 걸음 옮겨서 거실에서 시간을 보내다 스포츠 뉴스가 끝나면 침실로 가는 일상이었다. 열 걸음 정도의 복도를 지나 침실로 가는 동안 벽에 걸린 그림에 눈길 한번 안 주는, 반걸음도 불필요한 행보는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이런 그가 필드에 나가면 30파운드 가까운 골프 가방을 짊어지고 18홀 걷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애초에는 골프에 취미가 없었지만 뒤에는 남편의 건강을 생각해서 부지런히 골프장에 함께 다녔다.

골프는 우리 삶과 닮았다. 성공과 실패와 경쟁과 좌절과 인격과 속임수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다섯 시간여의 인생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다. 골프에 가장 걸림돌이 되는 바람 부는 날에는 골프를 칠 수 있어도 스코어를 속이는 사람과는 못 친다고 한다.

얼마 전에 권좌를 물러난 어느 국가 최고 지도자가 라운딩을 마치고 오늘은 한번도  속임수를 쓰지 않았다고 하면 그건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이 장대 뛰기 선수라는 것과 같은 거짓말이라는 우스개가 있다.

 

‘바람 없어 좋은 날’ 친구들과 클럽하우스에 앉아서 막 끝낸 18홀을 복기하고 싶다. 

IMG_0672 (1).jpg

St. Andrews Golf Cour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