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틴 다리


발칸반도의 남쪽에 있는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를 동서로 흐르는 밀랴츠카 강 위에 라틴 다리가 있다.


1914618, 오스트리아의 페르디난트 황태자 부부가 이 다리 위에서 한 세르비아계 청년의 총격을 받아 피살되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게 된다

 

그해의 618일은 일요일이었다. 합스부르크가의 왕위계승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과 그의 임신한 부인 소피는, 그날 세르비아에서 있었던 '육군 대연습'을 시찰한 후, 빈으로 돌아갈 예정이었는데 대공이 지난번 자신들에 대한 암살 기도가 있었을 때 부상을 당해 병원에 입원하고 있는 사람들을 문병하겠다고 끝까지 고집해서 이 다리 입구까지 오게 되었다.


세르비아 비밀결사의 일원이었던 암살범 가브릴로 프린치프는 그날 하루는  임무를 포기하고 부근에서 식사를 하고  있다가 다가오는 대공의 자동차를 보았고 곧 거리로 뛰쳐나와 총을 두 발 쏘았다. 그날 대공 부부가 문병을 포기하고 곧장 빈으로 갔더라면 1차 세계대전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역사에 가정은 있을 수 없다지만, 안타까운 마음을 누르기 어려웠다


그로부터 한 달여 뒤인 728,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에 선전포고했다. 8월엔 오스트리아의 동맹국인 독일이 러시아와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했고, 그다음 날엔 영국이 독일에 각각 선전포고를  하였다. 8월에 전쟁을 시작하며 각국은 전장에 보낼 병사들의 동복(冬服)도 준비하지 않았던 사실은 그 전쟁이 4년여를 끌며 세계인구 천만 명 이상이 희생당하는 유례없는 비극의 역사로 기록되리라고는 그 누구도 집작하지 못했다는 증거가 아닐까.  


10미터 정도의 맑은 강물 위에 견고한 돌다리가 놓여 있고 다리 건너편에는 황태자 암살을 추모하는 박물관이 있다. 다리 위에 저격범 프린치프가 서 있던 자리에는 그의 발자국이 표시되어 있었다는데 지금은 파괴된 건지 누가 뜯어갔는지 사라지고 없다.


20105, 나는 이 다리 위에 서 있었다. 가보고 싶은 곳 1순위였던 라틴 다리다. 감회가 깊었다. 우리 일행은, 그 때 동맹국 측이었던 독문학 전공이 두 명, 연합국 측이었던 영문과의 K와 역시 연합국이었던 불문과의 나, 이렇게 네 명이었다. 과거에 죽기 살기로 맞서 싸운 나라들의 언어와 문화를 각기 공부했다고 해서 우리 네 사람 사이에 무슨 구원(舊怨) 같은 것이 있을 리는 없었고, 더구나 독문과  두 사람은 같은 과 C C였다.


구유고슬라비아 연방이었던 이 지역은 우리 넷의 공통의 관심사여서 피곤한 버스 여행에도 잠시도 눈을 붙일 수 없었다. 1차 대전과 보스니아내전 등 두 개의 전쟁터였고 무슬림과 카톨릭, 동방정교 등 세 개의 종교와 네 개의 언어와 다섯 개의 민족과 여섯 개의 공화국과 일곱 개의 주변국, 즉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헝가리, 루마니아, 불가리아, 그리스, 알바니아에 둘러싸인 복잡하고도 다양한 문화와 역사를 갖고 있었다


알려진 바와 같이 발칸의 화약고로 불리기에 조금도 모자람이 없는 곳이었지만 무심한 관광객들은 낮엔 발칸반도의 아름다운 구릉들과 강을 따라 달리고 저녁엔 푸른 아드리아해가 아득한 발아래로 넘실거리는 고성의 테라스에서 동유럽 각국의 포도주를 골고루 즐겼다. 아드리아해 건너에 있는 이탈리아반도가 손에 잡힐 듯이 가깝게 느껴졌다.


1차 대전에 희생된 원혼들의 저주일까, 티토 사후, 구유고슬라비아 공화국이 해체되는 과정에서 다시 이곳에 내전이 일어났다. 1992년부터 1995년까지 삼 년 동안 계속된 보스니아 전쟁은 동족 간의 내전으로는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비참하고도 잔혹한 것이었다. 그 전쟁의 원흉인 밀라노비치를 제거하기 위해 보스니아내전에 개입을 결정하던 무렵의 미국의 고뇌와 무거웠던 분위기를 지금까지 생생히 기억한다.


곳곳에 부서진 폐가, 폭격의 흔적, 마치 새가 쪼아 놓은 듯한 총탄의 자국들을 건물마다 남겨 놓았다. 길에 면한 공동묘지들에는 비석이 촘촘히 세워져 있었는데 이슬람교도의 비석은 기름한 흰 말뚝이었고 가톨릭은 흰 십자가를, 그리고 동방정교는 검은 십자가를 세워 놓았다. 죽어서도 서로 화합하지 못하는 이 복잡한 땅의 비극에 나는 진저리를 쳤다.


<사라예보의 첼리스트>로 불리는 베드란 스마일로비치는 이 죽음의 거리에서 22일 동안 알비노니의 <아다지오 G단조>를 연주했다. 1992527, 바세 미스키나에 있는 시장 뒤쪽에서 빵을 사려고 줄을 서 있던 한 무리의 사람들을 여러 개의 박격포 탄이 덮쳐 22명이 사망했다. 그들을 기리기 위해 이튿날부터 스마일로비치는 첼로를 들고 거리에 나와 하루에 한 번씩 22일 동안 <아다지오 G단조>를 연주했다. 용케도 그는 그때 저격을 면하고 무사히 북아일랜드로 피신했다.


사라예보는 사면이 언덕으로 둘러싸인 긴 띠 모양의 편평한 땅이다. 도시의 고지에서 언덕 위에서 마치 사냥하듯 학살을 일삼던 세르비아계 저격수들이 그때 왜 8분 동안이나 <아다지오>를 연주하던 스마일로비치를 저격하지 않았는지 알 수 없다. 그 장중하고 처절한 진혼의 선율에 그들도 잠시 취했었던 것일까.


넘실대는 아드리아해는 여전히 깊고 푸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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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atin Bridge, May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