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트 레나드우드의 추억
며칠 전 신문에서 흥미 있는 기사를 읽었다.
오바마 대통령과 바이든 부통령이 백악관 근처 햄버거 가게에서 햄버거와 음료수를 각자 돈을 내고 사 먹었다는 내용이었다. 미국 생활 40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이런 뉴스는 내겐 조금 낯설다. 대통령이란 분이 아랫사람이 햄버거 값을 따로 내게 하다니. 또 그 가게도 어떻게 대통령과 부통령에게서 햄버거 값을 받을 수 있을까. 왕림하신 것만으로도 감격하고도 남을 일이 아닌가.
이 기사를 읽으며 문득 40여 년 전, 한적한 소도시에서 공부할 때의 일을 떠올렸다. 어느 주말 아침, 학교에서 연락이 왔다. 한국에서 온 여행객이 있는데 안내 해줄 한국인을 찾고 있으니 우리 내외가 해 주면 고맙겠다고 했다. 그분은 키가 자그마하고 통통한 체격의 고위 공무원이었고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수행원이 동행하고 있었다.
관광명소인 샌디아 마운틴을 구경시켜드리고 그곳에 사는 우리도 방학이나 되어야 놀러 가는 타오까지 돌아서 우리 차로 아침부터 온종일 모시고 다녔다. 그런데 의외인 점은 어느 시설, 어느 식당을 가도 일절 그분은 지갑을 꺼내지 않았다. 곁의 비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분들과 하등의 이해관계가 없던 우리는 비용을 나중에 몰아서 주려나 보다 했다.
그때 우리가 학교에서 받는 리서치 엔지니어의 월급은 270불. 학교에서 제공되는 대학원생 아파트 렌트비가 70불, 나머지 200불로 식비와 책값, 가스 값, 차 유지비, 보험료를 내어야 했다. 그런데 그분은 점심 식사 값은 물론 여러 곳의 입장료까지 가난한 고학생에게 짐 지우고는 만족한 얼굴로 명함 한 장을 내밀고 떠나갔다. 명함엔 < 대한민국 XX남도 도지사 민XX >. 그 잊을 수 없는 분은 글자마다 금빛 양각도 찬란한 대한민국 유수의 도백이었다.
훗날 교수로 재직하던 학교에서 있었던 일이다.
학교에서 20분쯤 서쪽으로 달리면 숲속에 한국의 논산 훈련소 격인 FT. Leonard Wood가 있었다. 어느 날 그 도시의 DMV에서 학교의 추천을 받았다며 우리에게 편지를 보내왔다. 운전면허시험 문제지를 한국어로 번역해 줄 수 있는가 하는 내용이었다. 포트 레나드우드에서 근무하는 병사의 한국인 부인들이 면허시험이 어려워 운전면허를 받지 못하고 있어 한국어로 문제를 제출할까 한다는 부연 설명이 있었다.
그곳의 한국인 부인들에 대한 평판은 그때 우리 학교의 부인들 사이에선 별로 좋은 편이 아니었다. 한 병영에 여러 나라의 여자들이 북적대니 싸움이 끊이질 않았는데, 일본과 베트남 부인들은 MP(Military Police)가 나타나기만 해도 흩어지는데 한국 부인들은 호스로 물을 뿌려도 흩어지지 않아서 엠피들이 모두 손을 내 저으며 출동을 꺼린다는 것이었다.
이런 선입견을 갖고 시작됐지만 우리가 그곳을 떠날 때까지 3년여 동안 그곳 부인들과는 참으로 따뜻한 교류를 나누었다. 어느 날 학교에서 연락처를 받았다며 우리를 만나보고 싶다는 부인을 만났다. 한국 이름이 김선희라는 Mrs.로버츠는 점잖고 기품이 있었다. 면허시험 문제지의 한국어 번역을 조금 고쳤으면 좋겠다고 했다. 우리 생각에도 그 부분이 조금 미흡한 것 같아서 그녀의 의견대로 문구 를 수정했다.
그날 선희씨는 농사지은 깻잎을 밥 위에 찌어 우리 부부를 극진히 대접했다. 텃밭에서 막 따 온 오이는 여느 오이 맛과 달리 아주 달았고 그 외에도 일 년에 몇 개밖에 열리지 않는다는 귀한 가지를 한사코 우리 차에 던져 넣어 주었다.
학교에선 종종 부인들이 함께 모여서 그곳 텃밭에서 키운 채소를 사러 가곤 했다. 우리가 가는 날은 그녀들은 돌아가면서 우리에게 따끈한 점심을 대접했다. 그때 우린 MJB 커피 깡통에 구멍을 뚫어서 옹색하게 콩나물을 키워 먹었는데 그녀들은 제법 큼직한 시루에 콩나물을 넉넉히 키워서 우리에게 맛깔스런 콩나물밥도 대접했다. 공부하느라 애쓴다며 한 포기 채소라도 더 주지 못해 안달할 정도로 그녀들은 정이 많았다.
그중에도 캐시라는 여인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매달 캐시가 생리를 시작하는 날은 온 막사 안에 삽시간에 소문이 퍼졌다. 그녀가 그로서리건 가구건 되는대로 집어 던지며 서럽게 통곡을 했기 때문이다. 가무잡잡한 얼굴에 보조개가 귀여운 캐시는 초등학교도 다닌 적이 없고 낳아 준 부모의 얼굴도 모르지만 남편 지미를 하늘처럼 여기며 행복한 삶을 꾸려 갈 희망을 갖고 있었다. 백인 남편을 가진 여자들은 자기를 무시하지만 자기에겐 지미가 있다며 남편을 그윽한 눈으로 쳐다보곤 했다.
"언니는 참 복도 많데이. 우짜다가 한국남자를 얻었노?"
하며 가끔 비명이 나올 정도로 내 어깨를 내려치곤 하던 그녀는 아이 갖기가 그토록 소원이었지만 과거의 험한 생활이 임신을 어렵게 했다. 안타깝게도 우리가 그곳을 떠날 때 까지도 기다리는 소식이 없었고 얼마 뒤 지미가 전역이 되어 다른 부대로 떠났다는 소식을 풍문으로 들었다.
지금도 포트 레나드 우드에 가면 거기 캐시가 있을 것만 같다. 자녀를 낳고 손자, 손녀들과 어디선가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