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레드밀 이야기

 

스테이 앳 홈과 12차 봉쇄가 권고되자 가까운 트레일도 나가기가 꺼려진다.


아이들이 서로 의논 끝에 집에 트레드밀을 들여 놓아 주었다. 생애 세 번째 만나는 트레드밀이다. 자그마해서 정겨운데 이번엔 제대로 주인을 만났기를 바란다.


40대 중반에 체중이 늘어 처음으로 트레드밀을 구입했다. 매일 열심히 운동하던 중에 우연한 기회에 집 가까이에 있는 헬스클럽에 가입하게 되었다. 그때부터 나의 트레드밀은 자리만 차지한 가구로 전락했다. 어느 날, 청소하러 오던 로사가 좋아라하며 들고 갔다.


몇 년 후, 이번엔 정말 멋진 트레드밀을 구입했다. 보기도 좋았고 소음도 거의 없었다. 하루 두 번씩 사용하다가 사흘에 한 번, 일주일, 열흘로 멀어졌다. 그때쯤 새벽에 해안가를 달리는 조깅 재미에 푹 빠졌을 때였다. 아이들도 모두 대학으로 떠나고 남편도 그쪽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머신 위에 먼지가 소복소복 쌓였다. 어느 날, 집에 오던 가드너가 아들을 데리고 와 함께 들고 갔다.


겨울과 밤과 그리고 비 올 때가 책을 읽기에 가장 좋은 때라고 하는데 그러한 때는 운동하기에도  좋은 때다.가까운 이들의 체온을 느낄 수 없는 겨울보다 더 추운 계절, 30분 정도 뛰고 나면 땀이 나고 체온이 오른다. 낮에도 밤처럼 외출이 꺼려지고 비가 오지 않아도, 봄꽃이 들판을 덮어도 꽃 사이를 헤집고 다니며 그 향기를 맡아 볼 용기를 낼 수 없는 요즈음이다.


아침에 눈을 뜨면 창문을 열고 트레드밀과 함께 달리며 운동과 어울리는 행진곡을 찾아 귀에 꽂는다. ‘빈의 행진곡을 들으며 합스부르크가의 영욕을 생각한다. 프랑스의 왕과 정략결혼한 오스트리아 왕녀 마리 앙투아네트를 적국의 시누이들은 무척 싫어했다. 처음엔 그녀를 오트리시엔(오스트리아 여자)라고 부르다 파니에를 떨쳐입은 그녀의 모습에서 타조를 연상 했는지 나중엔 그녀를 오트뤼시엔(타조와 암캐의 합성어)라고 불렀다. 양국 간의 화합도 이루지 못하고 38세에 단두대에서 진 그녀의 짧은 생이 안타깝다.


머신의 경사도를 높이며 생각은 먼 옛날로 달린다.

그날은 목요일이었다. 오후 강의에 가려고 막 교문을 들어서는데 군복 차림의 한 남자가 다가왔다. 차려 자세로 거수경례를 하곤 화학과의 이옥자를 좀 불러 줄 수 있겠느냐고 했다. 화학과 실험실에서 키가 작고 얼굴도 가무잡잡한 이옥자를 대면하고 내심 안도하는 나 자신에 놀랐다.

   

다음 목요일 오후, 군복은 또 교문 앞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그 시간은 대부분의 강의가 끝나 모두 하교하는 중이라서 부탁을 할 사람이 마땅찮던 그가 교정 쪽으로 가는 나를 보고 다가오다가 멈칫하는 모습이 보였다.

이옥자 불러 드려요?”

다가가 묻자 그는 보일 듯 말 듯 미소를 지었다. 그의 어깨위의 소위 계급장에 오후의 옅은 햇살이 한 줌 내려앉아 있었다.


경춘선의 기적이 아스라이 들려오던 교정의 청량대에서 그 봄을 보내는 동안 내 생애 처음의 가슴 두근거림은 그렇게 피고 졌다. 목요일 오후가 되면 교문 쪽을 두리번거렸지만 그의 모습은 더는 보이지 않았다.

못다 한 것은 모두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