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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나무에 걸린 손수건                                                                                  

 

   시골 고향 마을에서 집안 어른들은 아침 일찍 까치 우는 소리가 나면 그날은 경사스런 일이 생길 것이라며 길조라고 기뻐했다. 반대로 까마귀가 울면 흉조라며 그날에는 불길한 예감이 든다고 불쾌감을 감추지 못했다. 다 같은 새인데 왜 우리 인간에게 길조와 흉조를 가져오는 새로 구분이 되었을까. 모양새와 우는 소리가 달라서 그럴까.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어릴 때부터 나는 까마귀가 까 악 까 악 우는 소리를 내면 무척 기분이 나빴다. 나는 까마귀만 보면 집으로 숨어 버렸다. 마치 마귀를 보는 것처럼 무서움마저 들곤 했다. 그런데 까치는 정답게 느껴지고 우는 소리도 정겹게 들렸다. 

   나는 가을이 오면 감과 함께 까치를 추억하며 향수에 젖게 된다. 이곳 미국에서는 까치를 볼 수 없어서 더 까치가 생각나는 계절이기도 하다. 고국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를 때면 이곳 이역만리 미국 땅에서는 더욱 감회가 깊다. 가을의 갖가지 정취를 자아내는 풍경들이 파도처럼 밀려와 내 눈앞에 아른거리게 된다. 그런데 나는 가을이 오면 유독 감하고의 인연을 잊을 수 없다. 까치밥으로 마지막까지 앙상한 가지에 대롱대롱 달려 있던 노을빛 고운 감! 내 마음의 화폭에 아름다운 환상의 그림으로 남아 있다. 

   이곳 미국에서는 고국의 떫은 감이 아니고 단감이다. 북가주에 사부인 집에는 큰 감나무가 있어서 해마다 내가 감을 좋아하는 줄 알고 그 무거운 감을 한 상자씩 소포로 보내 주곤 했다. 단감이 크고 어찌나 맛있는지 시장에서 사 먹는 감하고는 비교가 안 되었다. 올가을은 돌아가신 사부인을 생각하니 감이 다 떨어지고 앙상한 가지만 남은 겨울 감나무를 연상하게 된다. 인정이 많았던 사부인이 일 년 시한부 삶을 선고받았지만 육 개월 만에 돌아가셨다. 매년 정성스럽게 보내 주던 감 생각이 나서 사부인이 더욱 그리워진다. 이젠 어디 가서 그 맛있는 단감을 맛볼 수 있으며 사부인을 만날 수 있을까. 사부인이 보내주던 탐스러운 감을 생각하니 고향 시골에서 먹던 감 생각이 절로 난다. 

   시골에 가면 감나무가 앞뜰 뒤뜰에 여러 그루 있어서 가을만 되면 온통 온 집이 감 과수원으로 변하고 만다. 초가지붕 위에는 익어가는 박이 넝쿨과 함께 온 지붕을 뒤덮고 울타리 주위에는 수박만 한 호박들이 여기저기 달려 있었다. 마당에는 빨간 고추가 널려 있어 주황색으로 익어가는 감과 함께 수채화를 그려 놓은 듯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어느덧 가을도 다 지나가고 초겨울이 다가올 때, 나는 내 감나무에 감을 다 따고 몇 개를 남겨 둔다. 기쁜 소식을 전해 준다는 까치가 먹을 수 있도록 내 버려둔다. 

   친척들은 까치밥이라고 먹고 싶어도 따 먹지 않고 쳐다보며 입맛만 다신다. 나는 몇 개라도 남겨 두어야 수고한 감나무에 덜 미안하고 쳐다보는 사람들에게 기쁨을 나누어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나에게도 큰 위안이었고 내가 가장 싫어하는 겨울이 아니 오기를 바라는 간절한 소망 때문이기도 했다. 

   나는 오 헨리의 ‘마지막 잎새’가 생각났다. 폐렴으로 죽어가는 존 시가 한 개 남은 마지막 담쟁이 잎새가 떨어지는 날 자기가 죽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마지막 잎새는 떨어지지 않고 벽에 그대로 남아 있자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 다시 살아나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난다. 그러나 아래층에 사는 베어 맨 무명 화가 노인이 밤새 비바람을 맞으며 그 마지막 잎새가 떨어진 그 같은 벽에다 똑같은 마지막 담쟁이 잎새를 그려놓고 본인은 막상 비바람을 맞은 탓에 폐렴으로 죽어 간다. 

   나도 누군가가 저 앙상한 가지에 매달려 있는 빨갛게 익은 감을 쳐다보는 순간 절망을 넘어 생의 애착과 의욕을 갖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해 보았다. 삭막하고 스산한 초겨울 날씨에도 끝까지 버티며 눈을 맞아도 매달려 있는 마지막 한 개의 감을 바라보는 감동은 필설로 형언키 어렵다. 홀로 고운 색깔로 마지막 가는 늦가을의 여운을 길게 물들이는 저 아름다운 자연의 선물. 가을 내내 감과 씨름하다 보면 나의 심장은 봉선화 로 손톱을 붉게 물들이듯 감 색깔로 붉게 물들여진다. 어느덧 겨울이 오면 활활 타오르는 불꽃 되어 추운 겨울을 거뜬히 녹이는 화롯불이 되어 준다. 

   그런데 어느 날 초겨울 첫눈이 펄펄 내리고 있었다. 나는 하얀 창호지를 바른 시골집 방문을 열고 설경이 보고 싶어 밖으로 나왔다. 뒤 뜰에 있는 한 개 남은 감이 얼어 죽지 않고 아직 달려 있는지 몹시 궁금했다. 하얀 눈꽃이 내리고 있는 감나무를 쳐다보니 감은 온데간데없어지고 감색 손수건이 눈보라에 나부끼며 걸려 있었다. 누군가가 감을 따 먹고 대신 감색 손수건을 걸어 놓은 것이 분명했다. 사람이 먹든 까치가 먹든 감을 먹을 수 있는 행복을 준 사실에 나는 기뻤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뒷집에 사는 할머니가 초겨울이 오자 천식이 악화하여 기침을 몹시 했는데 감나무에 달린 감을 먹고 싶다고 했단다. 따 먹고 싶어도 마지막 남은 한 개의 감을 따 먹고 자기가 죽을지도 모른다며 그냥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런데도 며느리는 감을 따서 시어머니께 드렸다. 앙상한 가지만 남아 있는 감나무를 쳐다보니 외롭고 쓸쓸하게 보였다. 을씨년스러운 초겨울의 풍경을 정감있게 해 보고 싶어서 궁리 끝에 감색 손수건을 만들어 걸어 놓았다. 

   온 천지가 하얀 눈으로 뒤덮여 있고 감나무 가지 위에도 눈이 쌓였다. 감은 사라졌지만 바람에 나부끼는 감색 손수건이 햇빛에 반사되어 어쩜 그렇게 아름답게 보일 수 있었을까. 홍시를 먹고 병이 호전된 할머니는 어느 날 아침 눈부신 은백의 눈 위에서 감나무에 매달아 놓은 손수건이 보고 싶어 밖으로 나왔다. 그만 눈 위에서 미끄러져 넘어진 후 일어나지 못하고 병이 악화하여 그만 돌아가셨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그 자리에 나는 감나무 한 그루를 더 심어 할머니의 죽음을 기렷다. 가을이 되면 탐스러운 감이 주렁주렁 열려 할머니의 혼이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 같았다. 시골 산야는 단풍으로 온통 빨갛게 물들어갔다. 감과 함께 까치는 온통 제 세상 만난 듯 풍성한 까치밥에 신이 나 있었다. 

 

* 10월 24일 2011 중앙일보 문예 마당에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