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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거인 피천득 교수님 추모의 글                                               

 

   교수님은 아들 둘과 딸 모두 삼 남매를 슬하에 두고 계셨다. 교수님은 딸 서영이를 무척 사랑하셨다. 옆에서 지켜보노라면 좀 도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사랑하셨다. 초등학교 다니는 서영이를 학교에 데려다주시고 하교 때에는 교문 밖에 서서 기다리시다가 서영이를 집으로 데려오시는 것이었다. 

   큰 아드님이 피천득 교수님의 반대에도 영화 연극과를 전공하겠다고 대학에 들어갔을 때 몹시 못마땅해하셨다. 그 당시만 해도 연예인들을 별로 좋게 생각하지 않던 시절이었다. 교수님 기대에 어긋난 전공과목을 택했다고 불만을 말씀하시곤 했다. 그래서 말 잘 듣는 서영이를 더 사랑하게 된 것이 아닌가 하고 나 나름대로 생각해 보았다. 서영이를 너무 편애하시는 것 같아 민망스러울 정도였다. 아드님이 안쓰럽기까지 했다.       

   나는 교육부(그 당시 문교부)로부터 고등학교 이급 영어 정교사 자격증을 받아들고 고등학교 교사로 취직하기 위해 동분서주할 때였다. 모교에 발령을 받을 것인가 다른 고등학교로 갈 것인가 고심하고 있을 때였다. 하루는 교수님께서 저를 부르셔서 고등학교 교편을 잡는 것보다 Peabody English Language Center가 사범대학 부설로 세워졌는데 그곳에서 미국 피버 디 사범대학교에서 오신 교환교수 밑에서 전임 강사로 영어 발음학과 영어 언어학(Linguistics)교습을 받아 영어과 1학년을 가르치라고 하셨다. 

   일 년후 미국 유학을 갔다 와서 본교에 영문학 교수가 되도록 최선을 다해 보라고 고무적인 격려의 말씀을 아끼지 않으셨다. 같은 반 영어과 졸업생들은 고등학교에 영어교사로 모두 취직을 했지만  나는 고등학교 교편을 포기하고 대학교에 남기로 하고  피천득 교수님의 추천을 감사히 생각하며 꿈에 부풀어 열심히 영어과 1학년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일 년 후 미국 컬럼비아 대학교에 유학 가기 위해 절차를 준비하던 중 건강 검진에 걸려 미국 유학을 포기해야만 했다.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 뒤 돌아보면 피천득 교수님께 고마움과 동시에 죄송한 마음 금할 길 없다. 하지만 대학교수가 되어 달라는 교수님의 기대를 모두 충족시켜 드리지 못했다. 늦게나마 수필가로 등단하게 됨은 전적으로 교수님께서 저에게 문인의 길을 걸을 수 있도록 초석이 되어 주신 은사로서의 은공을 잊을 길이 없다.    가까이서 지켜본 교수님은 성품이 참 소탈하시고 검소하셨다. 만년 소년처럼 피안의 세계에 사시는 분 같았다. 키가 작으만 하시지만, 셰익스피어 강의를 하실 때는 정말 작은 거인이셨다. 같은 대학 국문과를 졸업한 김남조 시인을 무척 아끼시고 사랑하셨다. 성품처럼 글도 간결하면서도 학처럼 기품이 있다. 교수님이 쓰신 여러 편의 시 가운데 교수님은 <너>란 시를 무척 아끼시고 좋아하셨다. 아사 코와의 세 번의 만남과 헤어짐을 쓴 수필 <인연>으로 유명한 명수필가로 이름이 났다.     

   교수님의 차남이신 피 수영 울산의대 교수는 선친을 경기도 남양주시 모란공원에 안장하고 일주기 때 교수님 묘 옆에 <너>를 새긴 시비를 세웠다. ‘눈보라 헤치며/날아와//눈 쌓이는 가지에 나래를 털고//그저  /앉아 있다가//깃털 하나/아니 떨구고//아득한 눈 속으로/사라져가는/너’ 나는 <후회>란 시도 좋아한다. 지난날을 뒤돌아보면 내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두 분이 계신다. 한 분은 나에게 문학의 길을 열어주신 고 피천득 교수님이시고 또 다른 한 분은 나에게 신앙의 길을 열어주신 우리나라 애국지사이신 고 스코필드 박사님이시다. 오늘의 나를 있게 만든 이 두 분은 각기 다른 분야에서 괄목할만한 업적을 남기셨다. 나의 삶에 보석처럼 빛나는 스승들로서 일생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귀한 분들을 가까이서 모실 수 있었던 것은 나에게 큰 축복이고 영광이라고 생각한다. (2011년)/늘 추억의 저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