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결핵사에 굵직한 업적을 남기고 그 자신도 역사가 되다!
‘주님, 그에게 영원한 빛을 비추소서……!’
1930년 안동에서 출생하여 경북중학(6년제) 재학시절인 14세에 결핵이 발병한 김대규님은 마산 요양원에서 3년 여 간의 긴 투병생활을 하여야만 했습니다. 당시 그는 봄이 오면 가곡 “가고파”의 주제가 된, 호수 같이 잔잔한 바다가 펼쳐진 남녘 땅에서 20대의 고독과 비애, 울분을 가슴에 안고, 투병생활에 정진하던 20여 년 전 그 날의 남모를 감격에 사로잡혀 회상하곤 했습니다. 시인이며 항결핵 운동가인 김대규 前 부회장님이 타계한지도 벌써 6개월이 되었습니다. 늦게나마 그 분의 투병생활과 문학 그리고 그 분이 이룩한 항 결핵운동을 간략히 회고해보며 명복을 빌고자 합니다. ![]() 1930년 안동에서 출생하여 경북중학(6년제) 재학시절인 14세에 결핵이 발병한 김대규님은 마산 요양원에서 3년 여 간의 긴 투병생활을 하여야만 했습니다. 당시 그는 봄이 오면 가곡 “가고파”의 주제가 된, 호수 같이 잔잔한 바다가 펼쳐진 남녘 땅에서 20대의 고독과 비애, 울분을 가슴에 안고, 투병생활에 정진하던 20여 년 전 그 날의 남모를 감격에 사로잡혀 회상하곤 했습니다.
문학과 함께한 항결핵 계몽 운동 1984년 셔우드 홀 박사 내한을 적극 추진했던 김대규 전 부회장
좋은 약제가 보급되기 전이라 창문을 열어놓고 안정을 취하는 지루한 시간과의 싸움이었던 그 시절 김대규님은, 옆에서 괴로움을 호소하며 숨져가는 많은 이들의 모습을 보며 결핵 계몽에 앞장서야 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리곤 자비로 ‘보건세계’를 발간하여 요양의 길잡이 역할을 하였는데, 이 계몽지는 대한결핵협회가 창립되면서 협회에 넘겨져 지금까지 출판돼오고 있으며 우리나라 최초의 보건계몽지로서 가장 장수하는 잡지가 되었습니다. 김대규님은 또한 시인이기도 했습니다. 1945년 복간되어 한국전쟁 직후 유일한 문예지였던 <문예>에 1952년 청마(靑馬) 유치환 시인의 추천으로 등단의 영예를 누렸습니다. 유치환 시인은 추천사에서 “문학은 구도(求道)이다. 한 시인 작가가 어디까지나 그의 인간을 수업함으로서 문학의 길은 열리며, 이루어지며, 스스로 빛나는 것이다”라며 김대규님의 작품 ‘밤’과 ‘상심’을 문단에 추천하였습니다.
밤
김대규님은 ‘동인지’도 만들었습니다.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청포도>는 고인이 1954년 시인으로 등단하기 전에 국립 마산요양원에서 투병중이던 요우(僚友)들 중에 뜻을 같이하는 문학인들과 함께 만든 동인지입니다. 김대규님이 투병생활을 마치고 대한결핵협회 창립시기인 1953년도에 제4집을 끝으로 중단되었습니다.
크리스마스 씰에서 승화시킨 결핵 홍보
1963년 12월 장충동의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공관에서 朴秉來(박병래) 결핵협회장이 朴正熙(박정희)의장의 영부인 陸英修(육영수) 여사에게 크리스마스 씰을 증정하고 있는 모습. 權肅杓(권숙표) 결핵협회 사무총장, 그리고 맨 왼쪽이 김대규 전 부회장
[출처] 항결핵 운동가 김대규|작성자 대한결핵협회
김대규님은 결핵협회가 창립된 이후부터는 결핵홍보와 크리스마스 씰 사업에 매진하였습니다. 우리나라 씰의 역사를 살펴볼 때 이 분을 빼놓고 얘기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입니다. 남다른 애착을 가졌습니다.
1983년 11월 1일부터 30일까지 광화문 지하도에서 결핵협회 창립30주년 기념 크리스마스 씰 전시회를 열고 많은 시민의 호응을 얻었으며 현장에서 씰 판매도 실시했습니다. 전시회를 둘러보고 있는 김대규 전 부회장
2000년 6월 1일 결핵연구원에 결핵정보감시센터(ktbs)를 개설하고 현판식을 가졌습니다. 오른쪽부터 金成鎭(김성진) 전 연구원장, 金尙材(김상재) 연구원장, 김대규 전 부회장, 이준상 국립보건원장, 金建烈(김건열) 회장
한편, 우리나라 최초의 크리스마스 씰은 결핵요양원을 처음으로 세운 셔우드 홀 박사가 1932년도에 발행하였으며, 그가 스파이 누명을 쓰고 강제 추방될 때까지 9년간 계속되었습니다. 그 후 44년 만인 1984년에 고인의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한 셔우드 홀 박사는 훈장과 서울시민증도 품신하도록 했으며, 1991년 타계 시에는 그의 유언에 따라 한국으로 옮겨서 대한결핵협회장으로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안장하고, 탄생 100주년에는 공적비도 제작하는 등 보은(報恩)의 마음으로 정성을 다하였습니다.
마음과 마음을 이어주는
결핵협회 창립40주년 기념식에서 조선일보사 소년소녀 합창단이 이 노래를 합창하기도 하였으나 널리 불려 보급되지는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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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가로, 조직관리자로 추진력 발휘
고조선시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결핵의 역사를 집대성한 ‘한국 결핵사’는 그가 남긴 업적 중 하나입니다. 3년여에 걸쳐 자료를 수집하고 잊혀질 위기에 있는 결핵과 관련이 있는 인사들을 취재하여 1,255쪽에 달하는 방대한 질병사를 엮어냈습니다. 김대규님은 “한국 결핵사 발간은 나의 45간의 항결핵 운동 역정(歷程)을 마무리한 완결편이다”라고 하였습니다. 1994년도 한국 결핵사 발간을 협회사업으로 결정하고 그가 편찬위원장에 위촉되어 33명의 원로들의 육성을 녹취하고 3만여 건에 이르는 결핵관련 정보를 발굴하여 집필할 때 사무실 문제, 예산 문제 등 어려움도 많았습니다. “책으로 말하겠다”며 그 어려움을 극복하였는데, 홍영표 당시 결핵연구원장이 사무실 등 많은 도움을 제공하였습니다. ![]()
2000년 6월 1일 결핵연구원에 결핵정보감시센터(ktbs)를 개설하고 현판식을 가졌습니다. 오른쪽부터 金成鎭(김성진) 전 연구원장, 金尙材(김상재) 연구원장, 김대규 전 부회장, 이준상 국립보건원장, 金建烈(김건열) 회장
김대규님이 이룬 업적은 결핵홍보나 크리스마스 씰 운동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관리자로서도 조직관리, 운영에도 형평성과 균형감각을 가지고 번득이는 창의력과 추진력을 유감없이 발휘하였으며, 결핵연구원이 BCG 생산시설 및 청사를 신축하여 사업을 활성화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연구원 신축부지 마련 과정에서 빚어지는 어려움 속에서도 시・도지부 건물을 신축, 개축하여 부속의원을 열고 결핵 전문기관으로서 역할을 다할 수 있도록 힘을 쏟았습니다. 김대규님이 떠난 지금, 이 협회의 많은 업무가 위축이 되고 기능이 축소되어 아직도 상존(尙存)하는 많은 결핵환자가 있어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결핵운동을 신앙이요, 삶 자체로 여기고 살아간 고인이 그립고 그립습니다.
한국 결핵사의 큰별이 지다 김대규님은 대한결핵협회 뿐만 아니라 대한보건협회, 서울대학교 공중보건연구회, 한국금연운동협회, 대한에이즈예방협회, 한국심장재단, 서울대학교 보건대학원 동창회 등 보건 분야에서도 활발히 참여해 우리나라 보건문제 해결에 많은 역할을 하였습니다. 이를 두고 권이혁 장관은 “우리나라의 보건 전문단체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사실”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정부에서는 국민훈장 목련장을 수여하고, 서울특별시장, 보건부장관, 국무총리표창, 그리고 보건대상, 복십자대상 등을 수상하였습니다. 결핵으로 젊음을 잃었으나 문학을 얻어서 항결핵 운동에 큰 기여를 하여 많은 이에게 봄을 되찾아주고 희망을 주었습니다. 김대규님은 “봄이 오면”, “찾아오는 봄”, “봄이 오는 소리”에서와 같이 봄을 좋아하였으나 질병으로 서울 성모병원, 분당 보바스 기념병원에서 투병하다 희망의 장을 열지 못하고 주님 곁으로 갔습니다. 병원에 찾아뵐 때에는 필답으로 의사를 나누었는데, 그 어떤 날에는 편안한 얼굴로 팔을 벌려 안아 주었으나, 그 후 어버이날에 찾아뵈었을 때에는 얼굴에 봄이 없었습니다. 김대규님은 결핵문제를 해결하는 데 노력한 많은 이에게 보은(報恩)하였습니다. 그러나 결핵운동을 신앙으로 품고 살다 간 이런 분에게 보은하는 이가 있을까? 협회도, 그가 사랑하였던 후배들도 한 번 더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내년 1주기 때에는 안동 선영에 묻힌 김대규님의 묘 옆에 공적비라도 세워드리면 이제라도 조그마한 보은이 될 수 있을까?...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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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항결핵 운동가 김대규|작성자 대한결핵협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