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드위치와 알로하 양상훈
정열적인 훌라춤과 미소로 환대하는 ‘낙원의 땅’ 하와이제도는 2,800여 년 전 화산폭발로 용암이 쏟아져 절묘하게 빚어진 군도로 형성 되어있다. 8개의 큰 섬들을 포함한 그림같이 아름다운 137여개의 크고 작은 섬들과 산호초로 이루어졌다.
면적이 제주도의 9배, 남한의 1/6에 이른다. 빅아일렌드가 가장 큰 섬이고, 오하우가 수도로서 거주자가 가장 많은 인구 밀집 섬(전인구의 80%)이다.
일 년 내내 서늘한 무역풍이 에메랄드 빛 바다를 타고 불어와 습도가 낮은 온화한 평온25'C-28‘C를 유지한다. 맑다 못해 따뜻한 햇살로 인한 청명함은 하와이 아니고는 맛보기 힘들 것이다. 마크트웨인은 하와이를 일찍이 이렇게 노래했다.
“ 천국에서 잠들고 또 다시 천국에서 깨 어 난 다”
난 뉴욕에서 오랫동안 거주하다가 여기 이주한지 7년 정도 지났다. 그 전에 몇 번 방문한 적은 있었지만 고향에 돌아온 친근감을 느낀다. 그동안 정이 많이 들어 왔었다. 막상 살아가보니 점차 매료되어 감회가 새로워진다.
“하와이를 안 가본 사람은 있어도, 한번만 가본 사람은 없다” 는 말을 가끔 듣는다.
.
거리에 현란한 알로하셔츠와 반바지 차림으로 보수적이면서도 개방적인 라이프스타일. 빨간색 하이비스커스(화려한 색의 열대성 하와이주 꽃)를 머리에 꽂고 하와이안 레이를 목에 걸며 해변을 거니는 낭만. 오염되지 않은 아름다운 자연과 신비로운 폴리네시안 문화. 활기 넘치는 다양한 해양스포츠와 완벽한 레저시설 등은 오늘의 하와이를 지상 최고의 관광 휴양지로 손꼽게 하는 매력이 아닌가싶다.
하와이 주민들은 다양한 형태와 종족으로 구성되어있다. 왕국시대부터 대대로 이어 내려온 원주민. 1900년도 초에 중국 일본 한국 등에서 사탕수수밭의 노동자로 고용되어 유입된 이민자들. 특히 미국이 1941년 12월 일본의 진주만 기습 공격에 의한 제2차 대전의 종결로 일본이 패망되고 하와이 집단정착을 허용한 다수의 일본 이주자들. 다른 지역에서 은퇴하여 노후의 여생을 위해 거주하는 형태 등이다. 아시안 백인 원주민과 기타 여러 혈족이 섞여진 혼혈인들이 의외로 많은 편이다.
사람마다 사정이 다르겠지만, 대부분 아메리칸드림이나 현지 환경 요인으로 선택한 경우가 많다. 그러나 아무리 지상 천국이라도 생활 여건과 사회 환경 요건이 어느 정도 충족하지 못하면 적응하기가 어려워진다. 이방인들이 하와이에 들어서면 대부분 문화적 충격이 크지 않다고 한다. 현지 주민들의 따뜻한 대면과 미소로 친절한 배려, 의심하지 않는 순수하고 열린 마음 등에 끌리는 분위기 때문이 아닐 런지. 오랫동안 그들의 일상생활의 저변에서 흐르는 영혼인 '알로하 정신(Aloha Spirit)'이 많은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하와이안 만이 지니고 있는 이 정신은 미소 친절 배려 사랑 정의 등 독특한 상징으로 오래전부터 전통문화로 정착되어왔다. 일상에서 그 향기가 스며들어 좋은 인상으로 외지인들을 즐겁게 하는 것이리라.
하와이로 이사 오는 그 날, 이웃이 평소 잘 아는 사람처럼 마음을 열고 갑자기 인사차 방문하여 잠시 당황한 적이 있었다. 통상적 서구식도 아닌 알로하식의 문화 관습이 아닌가싶다. 과일 선물까지 들고 와 은근히 부담이 되었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그들의 집안 뜰 에서 제배한 열대 과일이었다. 망고 파파야 피그 등으로 그 마음쓰임에 두고두고 고마움을 담게 되었다.
평소 산책하려 나가 이웃 거리에서 남녀노소 없이 만나게 되면 언제나 정월 초하룻날처럼 알로하로 반갑게 맞이한다. 어떤 때는 몸집이 큰 애견을 각각 끌고 온 부부가 좁은 인도에서 마주쳐 미안한 듯이 < 하이! > 하며 다가온다.
옆집 일본인 모리카와씨는 아내와 딸 사위 손자 함께 한집안에 화목하게 사는 모습이 부럽다 가끔 웃음보따리가 밖으로 쏟아져 나오며 주말이면 바비큐 냄새로 거리를 진동시킨다. 손자는 하와이대학에 다니는데 건장하고 잘 생겼다. 착하고 효성이 지극하다고 늘 자랑한다. 집 마당에 설치한 농구대에서 연습하다가 가끔 공이 우리 집에 날려 오면 나는 얼른 집어 던져주기도 한다. 우리가 여행할 때에 집을 비우게 되면 이 학생이 고맙게도 돌봐준다. 일본인 가정은 대부분 그들의 모국어를 사용하곤 하는데 모리카와씨 가족은 하와이어나 영어를 공용하고 있다. 아마 여기서 태어난 일본인 3세대로서 모국어보다 현지어가 더 쉬울 수도 있을 것이다. 하와이에 일본인이 아시안 인들 중에서 다수 비율을 차지하여 곳곳에 일본문화를 많이 경험하게 된다.
하와이에 거주하는 대부분 일본인들은 뉴욕권역의 일본인과는 사뭇 다른 점을 발견하게 된다. 여기 일본인 들은 미국화 되어 그런지 영어도 훨씬 더 잘하고 키도 더 훤칠하여 모국민보다 선량하고 훨씬 더 친밀감이 느껴진다.
미국50주에서 유일하게 하와이 주가 영어와 하와이어를 공식어로 지정하고 있다. 학교에 입학하면 하와이어를 의무적으로 가르치고 있다. 요즘 완화되어 주정부에서 학생들에게 자유롭게 선택권을 주는 시스템으로 점차 전환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하와이 언어구사는 하와이안에게 정체성과 긍지 및 자존감을 고취시켜주는 표상이다. 그들은 백화점이나 마켓에서도 상품을 메이드 인.유.에스.에이 보다 메이드 인.하와이를 더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나 역시 시간이 갈수록 하와이제에 기울러져 티셔츠, 맥주도 미제보다 하와이제를 더 좋아한다. 상품 질에서 전혀 떨어지지 않고 더 우수한 것도 있다.
하와이언어는 13개의 알파벳으로 음절이 모두 모음으로 끝내어 자음의 연속이 없다는 특징이 있어 발음이 쉽지 않다. 난 하와이 지명이나 거리 이름이 본토에 비해 길고 어려워 아직도 익숙하지 못하고 해맬 때가있다. 예컨대 카메하메하,카필로라나이(Kamehameha way . Kapilolani blvd.)등. 이곳 생활에서 전문적으로 하와이어를 꼭 배울 필요성이 없다면 알로하 마할로 누이로아(Aloha.Mahalo Nuiloa 안녕하세요.대단히 감사합니다) 등의 인사말 정도와 간단한 회화만 하면 크게 불편한 경우는 없을 것 같다.
하와이 와서 어느 날 희한한 알로하 이벤트를 목격한 적이 있다. 와이키키 다이아몬드 헤드 분화구와 동서 쌍벽을 이루는 우리 동네 바로 건너편 코코헤드 분화구가 있다. 정상까지 해발 400여m의 높이에는 제2차 대전 당시 섬 방어를 위해 전지를 구축한 아지트가 전쟁 상흔으로 아직 남아있다. 해발고도 400m의 높이밖에 되진 않지만 하늘을 가릴 곳이 없는 개활지(開豁地)로 꾀나 진 땀을 흘러야 하는 코스다.
코코헤드 트레일 등산로는 레일 트레일로 정상까지 1048계단을 밟고 올라가야하는 최고 난이도 코스다.
그 날 힘들게 올라가 파노라마 같은 전망대에서 남녀 한 쌍의 결혼식이 펼쳐지지 않은가! 목사의 주례로 모두 알로하셔츠, 반바지(거의 수영복수준) 차림에 해로 백년을 가약하는 너무 멋진 혼례식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축하객이라야 다행히 그날 오른 등반 자 10여명에 나도 포함한 불청객으로 염치없이 축하객의 한사람이 된 것이다.
구름 높이에서 바다까지 뻗어 내린 웅장한 산맥의 자태와 맑은 날의 산색, 바다색은 마치 수채물감을 풀어 놓은 듯이 아름답다. 이 곳을 결혼예식장으로 택했던 기발한 아이디어에 놀랐다. 신랑과 신부,주례 목사도 모두 정장이 아닌 속살이 보일 듯 말 듯 한 시원한 옷차림이었다. 축하객들로부터 우렁찬 박수소리의 메아리가 태평양 수평선으로 멀리 퍼져 나갔다. 신부의 간단한 알로하인사에 이어 열정적인 키스와 포옹으로 예식이 멋지게 마무리하자 모두 아쉬운 듯 자리를 떠났다. 초대받지 않은 하객들이었으나, 가족처럼 진정한 축하객이 되어 예식이 끝날 때 까지 기다리며 축하해주는 모습이 보기에 좋았다.
하와이는 근대에 까지 왕국이 존재 했으며 미국 내에서 유일한 왕궁이 있는 곳이다.1959년 8월에 미국 50주의 하나로 편입되면서 연방정부의 특구로 관광 및 군사적 전략가치로서 지원을 아끼지 않곤 한다.
하와이의 최초발견은 1788년1월, 영국탐험가 제임스.쿡(James Cook)선장이 태평양을 항해하다가 가장 먼저 화산 폭발한 “카우아이(KAUAI)” 섬을 발견하였다. 샌드위치 백작의 이름을 따 “샌드위치제도”로 명명하여 비로소 세계에 처음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나중에 별칭으로 하와이 제도로 부르지만, 당시 만해도 여러 섬들의 추장이 패권을 다투던 군웅할거(群雄割據)시대였다. 그 때에 빅아일랜드의 왕족의 한 장수가 뛰어난 수완으로 수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하와이제도 8개 섬에 정복의 야망을 품었다. 이웃 마우이,몰로카이부터 차래로 점령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오하우로 건너와 거침없이 진격하여 하와이 역사상 가장 치열한 전투로 이름난 ‘바람 산’ 이란 격전지로 “누우아누 팔리(Nu'uanu Pali)“에서 한판 승부로 역사의 전환점을 그었다.
카메하메하 장수가 계곡으로 적군들을 몰아 맹공을 퍼부어 마침내 승리의 월계관을 걸머졌다. 1810년 3월, 그가 바로 카메하메하1세 대왕으로 하와이 제도에 통일 왕국의 시조로 강성제국의 깃발을 꽂은 영웅이다. 그때에 그는 숭고한 땅에 “알로하 정신”을 처음 선포하였다. 오늘날 하와이 주 표어로 하와이안의 가슴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거룩한 초석을 다진 것이다.
“대지의 생명은 정의가운데 영원히 존재한다.<The Life of The Land is perpetutated in rightheousness> 알로하 정신의 깊은 의미를 담고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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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드위치와 알로하 양상훈
정열적인 훌라춤과 미소로 환대하는 ‘낙원의 땅’ 하와이제도는 2,800여 년 전 화산폭발로 용암이 쏟아져 절묘하게 빚어진 군도로 형성 되어있다. 8개의 큰 섬들을 포함한 그림같이 아름다운 137여개의 크고 작은 섬들과 산호초로 이루어졌다.
면적이 제주도의 9배, 남한의 1/6에 이른다. 빅아일렌드가 가장 큰 섬이고, 오하우가 수도로서 거주자가 가장 많은 인구 밀집 섬(전인구의 80%)이다.
일 년 내내 서늘한 무역풍이 에메랄드 빛 바다를 타고 불어와 습도가 낮은 온화한 평온25'C-28‘C를 유지한다. 맑다 못해 따뜻한 햇살로 인한 청명함은 하와이 아니고는 맛보기 힘들 것이다. 마크트웨인은 하와이를 일찍이 이렇게 노래했다.
“ 천국에서 잠들고 또 다시 천국에서 깨 어 난 다”
난 뉴욕에서 오랫동안 거주하다가 여기 이주한지 7년 정도 지났다. 그 전에 몇 번 방문한 적은 있었지만 고향에 돌아온 친근감을 느낀다. 그동안 정이 많이 들어 왔었다. 막상 살아가보니 점차 매료되어 감회가 새로워진다.
“하와이를 안 가본 사람은 있어도, 한번만 가본 사람은 없다” 는 말을 가끔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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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에 현란한 알로하셔츠와 반바지 차림으로 보수적이면서도 개방적인 라이프스타일. 빨간색 하이비스커스(화려한 색의 열대성 하와이주 꽃)를 머리에 꽂고 하와이안 레이를 목에 걸며 해변을 거니는 낭만. 오염되지 않은 아름다운 자연과 신비로운 폴리네시안 문화. 활기 넘치는 다양한 해양스포츠와 완벽한 레저시설 등은 오늘의 하와이를 지상 최고의 관광 휴양지로 손꼽게 하는 매력이 아닌가싶다.
하와이 주민들은 다양한 형태와 종족으로 구성되어있다. 왕국시대부터 대대로 이어 내려온 원주민. 1900년도 초에 중국 일본 한국 등에서 사탕수수밭의 노동자로 고용되어 유입된 이민자들. 특히 미국이 1941년 12월 일본의 진주만 기습 공격에 의한 제2차 대전의 종결로 일본이 패망되고 하와이 집단정착을 허용한 다수의 일본 이주자들. 다른 지역에서 은퇴하여 노후의 여생을 위해 거주하는 형태 등이다. 아시안 백인 원주민과 기타 여러 혈족이 섞여진 혼혈인들이 의외로 많은 편이다.
사람마다 사정이 다르겠지만, 대부분 아메리칸드림이나 현지 환경 요인으로 선택한 경우가 많다. 그러나 아무리 지상 천국이라도 생활 여건과 사회 환경 요건이 어느 정도 충족하지 못하면 적응하기가 어려워진다. 이방인들이 하와이에 들어서면 대부분 문화적 충격이 크지 않다고 한다. 현지 주민들의 따뜻한 대면과 미소로 친절한 배려, 의심하지 않는 순수하고 열린 마음 등에 끌리는 분위기 때문이 아닐 런지. 오랫동안 그들의 일상생활의 저변에서 흐르는 영혼인 '알로하 정신(Aloha Spirit)'이 많은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하와이안 만이 지니고 있는 이 정신은 미소 친절 배려 사랑 정의 등 독특한 상징으로 오래전부터 전통문화로 정착되어왔다. 일상에서 그 향기가 스며들어 좋은 인상으로 외지인들을 즐겁게 하는 것이리라.
하와이로 이사 오는 그 날, 이웃이 평소 잘 아는 사람처럼 마음을 열고 갑자기 인사차 방문하여 잠시 당황한 적이 있었다. 통상적 서구식도 아닌 알로하식의 문화 관습이 아닌가싶다. 과일 선물까지 들고 와 은근히 부담이 되었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그들의 집안 뜰 에서 제배한 열대 과일이었다. 망고 파파야 피그 등으로 그 마음쓰임에 두고두고 고마움을 담게 되었다.
평소 산책하려 나가 이웃 거리에서 남녀노소 없이 만나게 되면 언제나 정월 초하룻날처럼 알로하로 반갑게 맞이한다. 어떤 때는 몸집이 큰 애견을 각각 끌고 온 부부가 좁은 인도에서 마주쳐 미안한 듯이 < 하이! > 하며 다가온다.
옆집 일본인 모리카와씨는 아내와 딸 사위 손자 함께 한집안에 화목하게 사는 모습이 부럽다 가끔 웃음보따리가 밖으로 쏟아져 나오며 주말이면 바비큐 냄새로 거리를 진동시킨다. 손자는 하와이대학에 다니는데 건장하고 잘 생겼다. 착하고 효성이 지극하다고 늘 자랑한다. 집 마당에 설치한 농구대에서 연습하다가 가끔 공이 우리 집에 날려 오면 나는 얼른 집어 던져주기도 한다. 우리가 여행할 때에 집을 비우게 되면 이 학생이 고맙게도 돌봐준다. 일본인 가정은 대부분 그들의 모국어를 사용하곤 하는데 모리카와씨 가족은 하와이어나 영어를 공용하고 있다. 아마 여기서 태어난 일본인 3세대로서 모국어보다 현지어가 더 쉬울 수도 있을 것이다. 하와이에 일본인이 아시안 인들 중에서 다수 비율을 차지하여 곳곳에 일본문화를 많이 경험하게 된다.
하와이에 거주하는 대부분 일본인들은 뉴욕권역의 일본인과는 사뭇 다른 점을 발견하게 된다. 여기 일본인 들은 미국화 되어 그런지 영어도 훨씬 더 잘하고 키도 더 훤칠하여 모국민보다 선량하고 훨씬 더 친밀감이 느껴진다.
미국50주에서 유일하게 하와이 주가 영어와 하와이어를 공식어로 지정하고 있다. 학교에 입학하면 하와이어를 의무적으로 가르치고 있다. 요즘 완화되어 주정부에서 학생들에게 자유롭게 선택권을 주는 시스템으로 점차 전환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하와이 언어구사는 하와이안에게 정체성과 긍지 및 자존감을 고취시켜주는 표상이다. 그들은 백화점이나 마켓에서도 상품을 메이드 인.유.에스.에이 보다 메이드 인.하와이를 더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나 역시 시간이 갈수록 하와이제에 기울러져 티셔츠, 맥주도 미제보다 하와이제를 더 좋아한다. 상품 질에서 전혀 떨어지지 않고 더 우수한 것도 있다.
하와이언어는 13개의 알파벳으로 음절이 모두 모음으로 끝내어 자음의 연속이 없다는 특징이 있어 발음이 쉽지 않다. 난 하와이 지명이나 거리 이름이 본토에 비해 길고 어려워
아직도 익숙하지 못하고 해맬 때가있다. 예컨대 카메하메하,카필로라나이(Kamehameha way . Kapilolani blvd.)등. 이곳 생활에서 전문적으로 하와이어를 꼭 배울 필요성이 없다면 알로하 마할로 누이로아(Aloha.Mahalo Nuiloa 안녕하세요.대단히 감사합니다) 등의 인사말 정도와 간단한 회화만 하면 크게 불편한 경우는 없을 것 같다.
하와이 와서 어느 날 희한한 알로하 이벤트를 목격한 적이 있다. 와이키키 다이아몬드 헤드 분화구와 동서 쌍벽을 이루는 우리 동네 바로 건너편 코코헤드 분화구가 있다. 정상까지 해발 400여m의 높이에는 제2차 대전 당시 섬 방어를 위해 전지를 구축한 아지트가 전쟁 상흔으로 아직 남아있다. 해발고도 400m의 높이밖에 되진 않지만 하늘을 가릴 곳이 없는 개활지(開豁地)로 꾀나 진 땀을 흘러야 하는 코스다.
코코헤드 트레일 등산로는 레일 트레일로 정상까지 1048계단을 밟고 올라가야하는 최고 난이도 코스다.
그 날 힘들게 올라가 파노라마 같은 전망대에서 남녀 한 쌍의 결혼식이 펼쳐지지 않은가! 목사의 주례로 모두 알로하셔츠, 반바지(거의 수영복수준) 차림에 해로 백년을 가약하는 너무 멋진 혼례식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축하객이라야 다행히 그날 오른 등반 자 10여명에 나도 포함한 불청객으로 염치없이 축하객의 한사람이 된 것이다.
구름 높이에서 바다까지 뻗어 내린 웅장한 산맥의 자태와 맑은 날의 산색, 바다색은 마치 수채물감을 풀어 놓은 듯이 아름답다. 이 곳을 결혼예식장으로 택했던 기발한 아이디어에 놀랐다. 신랑과 신부,주례 목사도 모두 정장이 아닌 속살이 보일 듯 말 듯 한 시원한 옷차림이었다. 축하객들로부터 우렁찬 박수소리의 메아리가 태평양 수평선으로 멀리 퍼져 나갔다. 신부의 간단한 알로하인사에 이어 열정적인 키스와 포옹으로 예식이 멋지게 마무리하자 모두 아쉬운 듯 자리를 떠났다. 초대받지 않은 하객들이었으나, 가족처럼 진정한 축하객이 되어 예식이 끝날 때 까지 기다리며 축하해주는 모습이 보기에 좋았다.
하와이는 근대에 까지 왕국이 존재 했으며 미국 내에서 유일한 왕궁이 있는 곳이다.1959년 8월에 미국 50주의 하나로 편입되면서 연방정부의 특구로 관광 및 군사적 전략가치로서 지원을 아끼지 않곤 한다.
하와이의 최초발견은 1788년1월, 영국탐험가 제임스.쿡(James Cook)선장이 태평양을 항해하다가 가장 먼저 화산 폭발한 “카우아이(KAUAI)” 섬을 발견하였다. 샌드위치 백작의 이름을 따 “샌드위치제도”로 명명하여 비로소 세계에 처음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나중에 별칭으로 하와이 제도로 부르지만, 당시 만해도 여러 섬들의 추장이 패권을 다투던 군웅할거(群雄割據)시대였다. 그 때에 빅아일랜드의 왕족의 한 장수가 뛰어난 수완으로 수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하와이제도 8개 섬에 정복의 야망을 품었다. 이웃 마우이,몰로카이부터 차래로 점령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오하우로 건너와 거침없이 진격하여 하와이 역사상 가장 치열한 전투로 이름난 ‘바람 산’ 이란 격전지로 “누우아누 팔리(Nu'uanu Pali)“에서 한판 승부로 역사의 전환점을 그었다.
카메하메하 장수가 계곡으로 적군들을 몰아 맹공을 퍼부어 마침내 승리의 월계관을 걸머졌다. 1810년 3월, 그가 바로 카메하메하1세 대왕으로 하와이 제도에 통일 왕국의 시조로 강성제국의 깃발을 꽂은 영웅이다. 그때에 그는 숭고한 땅에 “알로하 정신”을 처음 선포하였다. 오늘날 하와이 주 표어로 하와이안의 가슴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거룩한 초석을 다진 것이다.
“대지의 생명은 정의가운데 영원히 존재한다. " 알로하 정신의 깊은 의미를 담고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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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드위치와 알로하 양상훈
정열적인 훌라춤과 미소로 환대하는 ‘낙원의 땅’ 하와이제도는 2,800여 년 전 화산폭발로 용암이 쏟아져 절묘하게 빚어진 군도로 형성 되어있다. 8개의 큰 섬들을 포함한 그림같이 아름다운 137여개의 크고 작은 섬들과 산호초로 이루어졌다.
면적이 제주도의 9배, 남한의 1/6에 이른다. 빅아일렌드가 가장 큰 섬이고, 오하우가 수도로서 거주자가 가장 많은 인구 밀집 섬(전인구의 80%)이다.
일 년 내내 서늘한 무역풍이 에메랄드 빛 바다를 타고 불어와 습도가 낮은 온화한 평온25'C-28‘C를 유지한다. 맑다 못해 따뜻한 햇살로 인한 청명함은 하와이 아니고는 맛보기 힘들 것이다. 마크트웨인은 하와이를 일찍이 이렇게 노래했다.
“ 천국에서 잠들고 또 다시 천국에서 깨 어 난 다”
난 뉴욕에서 오랫동안 거주하다가 여기 이주한지 7년 정도 지났다. 그 전에 몇 번 방문한 적은 있었지만 고향에 돌아온 친근감을 느낀다. 그동안 정이 많이 들어 왔었다. 막상 살아가보니 점차 매료되어 감회가 새로워진다.
“하와이를 안 가본 사람은 있어도, 한번만 가본 사람은 없다” 는 말을 가끔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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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에 현란한 알로하셔츠와 반바지 차림으로 보수적이면서도 개방적인 라이프스타일. 빨간색 하이비스커스(화려한 색의 열대성 하와이주 꽃)를 머리에 꽂고 하와이안 레이를 목에 걸며 해변을 거니는 낭만. 오염되지 않은 아름다운 자연과 신비로운 폴리네시안 문화. 활기 넘치는 다양한 해양스포츠와 완벽한 레저시설 등은 오늘의 하와이를 지상 최고의 관광 휴양지로 손꼽게 하는 매력이 아닌가싶다.
하와이 주민들은 다양한 형태와 종족으로 구성되어있다. 왕국시대부터 대대로 이어 내려온 원주민. 1900년도 초에 중국 일본 한국 등에서 사탕수수밭의 노동자로 고용되어 유입된 이민자들. 특히 미국이 1941년 12월 일본의 진주만 기습 공격에 의한 제2차 대전의 종결로 일본이 패망되고 하와이 집단정착을 허용한 다수의 일본 이주자들. 다른 지역에서 은퇴하여 노후의 여생을 위해 거주하는 형태 등이다. 아시안 백인 원주민과 기타 여러 혈족이 섞여진 혼혈인들이 의외로 많은 편이다.
사람마다 사정이 다르겠지만, 대부분 아메리칸드림이나 현지 환경 요인으로 선택한 경우가 많다. 그러나 아무리 지상 천국이라도 생활 여건과 사회 환경 요건이 어느 정도 충족하지 못하면 적응하기가 어려워진다. 이방인들이 하와이에 들어서면 대부분 문화적 충격이 크지 않다고 한다. 현지 주민들의 따뜻한 대면과 미소로 친절한 배려, 의심하지 않는 순수하고 열린 마음 등에 끌리는 분위기 때문이 아닐 런지. 오랫동안 그들의 일상생활의 저변에서 흐르는 영혼인 '알로하 정신(Aloha Spirit)'이 많은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하와이안 만이 지니고 있는 이 정신은 미소 친절 배려 사랑 정의 등 독특한 상징으로 오래전부터 전통문화로 정착되어왔다. 일상에서 그 향기가 스며들어 좋은 인상으로 외지인들을 즐겁게 하는 것이리라.
하와이로 이사 오는 그 날, 이웃이 평소 잘 아는 사람처럼 마음을 열고 갑자기 인사차 방문하여 잠시 당황한 적이 있었다. 통상적 서구식도 아닌 알로하식의 문화 관습이 아닌가싶다. 과일 선물까지 들고 와 은근히 부담이 되었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그들의 집안 뜰 에서 제배한 열대 과일이었다. 망고 파파야 피그 등으로 그 마음쓰임에 두고두고 고마움을 담게 되었다.
평소 산책하려 나가 이웃 거리에서 남녀노소 없이 만나게 되면 언제나 정월 초하룻날처럼 알로하로 반갑게 맞이한다. 어떤 때는 몸집이 큰 애견을 각각 끌고 온 부부가 좁은 인도에서 마주쳐 미안한 듯이 < 하이! > 하며 다가온다.
옆집 일본인 모리카와씨는 아내와 딸 사위 손자 함께 한집안에 화목하게 사는 모습이 부럽다 가끔 웃음보따리가 밖으로 쏟아져 나오며 주말이면 바비큐 냄새로 거리를 진동시킨다. 손자는 하와이대학에 다니는데 건장하고 잘 생겼다. 착하고 효성이 지극하다고 늘 자랑한다. 집 마당에 설치한 농구대에서 연습하다가 가끔 공이 우리 집에 날려 오면 나는 얼른 집어 던져주기도 한다. 우리가 여행할 때에 집을 비우게 되면 이 학생이 고맙게도 돌봐준다. 일본인 가정은 대부분 그들의 모국어를 사용하곤 하는데 모리카와씨 가족은 하와이어나 영어를 공용하고 있다. 아마 여기서 태어난 일본인 3세대로서 모국어보다 현지어가 더 쉬울 수도 있을 것이다. 하와이에 일본인이 아시안 인들 중에서 다수 비율을 차지하여 곳곳에 일본문화를 많이 경험하게 된다.
하와이에 거주하는 대부분 일본인들은 뉴욕권역의 일본인과는 사뭇 다른 점을 발견하게 된다. 여기 일본인 들은 미국화 되어 그런지 영어도 훨씬 더 잘하고 키도 더 훤칠하여 모국민보다 선량하고 훨씬 더 친밀감이 느껴진다.
미국50주에서 유일하게 하와이 주가 영어와 하와이어를 공식어로 지정하고 있다. 학교에 입학하면 하와이어를 의무적으로 가르치고 있다. 요즘 완화되어 주정부에서 학생들에게 자유롭게 선택권을 주는 시스템으로 점차 전환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하와이 언어구사는 하와이안에게 정체성과 긍지 및 자존감을 고취시켜주는 표상이다. 그들은 백화점이나 마켓에서도 상품을 메이드 인.유.에스.에이 보다 메이드 인.하와이를 더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나 역시 시간이 갈수록 하와이제에 기울러져 티셔츠, 맥주도 미제보다 하와이제를 더 좋아한다. 상품 질에서 전혀 떨어지지 않고 더 우수한 것도 있다.
하와이언어는 13개의 알파벳으로 음절이 모두 모음으로 끝내어 자음의 연속이 없다는 특징이 있어 발음이 쉽지 않다. 난 하와이 지명이나 거리 이름이 본토에 비해 길고 어려워
아직도 익숙하지 못하고 해맬 때가있다. 예컨대 카메하메하,카필로라나이(Kamehameha way . Kapilolani blvd.)등. 이곳 생활에서 전문적으로 하와이어를 꼭 배울 필요성이 없다면 알로하 마할로 누이로아(Aloha.Mahalo Nuiloa 안녕하세요.대단히 감사합니다) 등의 인사말 정도와 간단한 회화만 하면 크게 불편한 경우는 없을 것 같다.
하와이 와서 어느 날 희한한 알로하 이벤트를 목격한 적이 있다. 와이키키 다이아몬드 헤드 분화구와 동서 쌍벽을 이루는 우리 동네 바로 건너편 코코헤드 분화구가 있다. 정상까지 해발 400여m의 높이에는 제2차 대전 당시 섬 방어를 위해 전지를 구축한 아지트가 전쟁 상흔으로 아직 남아있다. 해발고도 400m의 높이밖에 되진 않지만 하늘을 가릴 곳이 없는 개활지(開豁地)로 꾀나 진 땀을 흘러야 하는 코스다.
코코헤드 트레일 등산로는 레일 트레일로 정상까지 1048계단을 밟고 올라가야하는 최고 난이도 코스다.
그 날 힘들게 올라가 파노라마 같은 전망대에서 남녀 한 쌍의 결혼식이 펼쳐지지 않은가! 목사의 주례로 모두 알로하셔츠, 반바지(거의 수영복수준) 차림에 해로 백년을 가약하는 너무 멋진 혼례식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축하객이라야 다행히 그날 오른 등반 자 10여명에 나도 포함한 불청객으로 염치없이 축하객의 한사람이 된 것이다.
구름 높이에서 바다까지 뻗어 내린 웅장한 산맥의 자태와 맑은 날의 산색, 바다색은 마치 수채물감을 풀어 놓은 듯이 아름답다. 이 곳을 결혼예식장으로 택했던 기발한 아이디어에 놀랐다. 신랑과 신부,주례 목사도 모두 정장이 아닌 속살이 보일 듯 말 듯 한 시원한 옷차림이었다. 축하객들로부터 우렁찬 박수소리의 메아리가 태평양 수평선으로 멀리 퍼져 나갔다. 신부의 간단한 알로하인사에 이어 열정적인 키스와 포옹으로 예식이 멋지게 마무리하자 모두 아쉬운 듯 자리를 떠났다. 초대받지 않은 하객들이었으나, 가족처럼 진정한 축하객이 되어 예식이 끝날 때 까지 기다리며 축하해주는 모습이 보기에 좋았다.
하와이는 근대에 까지 왕국이 존재 했으며 미국 내에서 유일한 왕궁이 있는 곳이다.1959년 8월에 미국 50주의 하나로 편입되면서 연방정부의 특구로 관광 및 군사적 전략가치로서 지원을 아끼지 않곤 한다.
하와이의 최초발견은 1788년1월, 영국탐험가 제임스.쿡(James Cook)선장이 태평양을 항해하다가 가장 먼저 화산 폭발한 “카우아이(KAUAI)” 섬을 발견하였다. 샌드위치 백작의 이름을 따 “샌드위치제도”로 명명하여 비로소 세계에 처음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나중에 별칭으로 하와이 제도로 부르지만, 당시 만해도 여러 섬들의 추장이 패권을 다투던 군웅할거(群雄割據)시대였다. 그 때에 빅아일랜드의 왕족의 한 장수가 뛰어난 수완으로 수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하와이제도 8개 섬에 정복의 야망을 품었다. 이웃 마우이,몰로카이부터 차래로 점령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오하우로 건너와 거침없이 진격하여 하와이 역사상 가장 치열한 전투로 이름난 ‘바람 산’ 이란 격전지로 “누우아누 팔리(Nu'uanu Pali)“에서 한판 승부로 역사의 전환점을 그었다.
카메하메하 장수가 계곡으로 적군들을 몰아 맹공을 퍼부어 마침내 승리의 월계관을 걸머졌다. 1810년 3월, 그가 바로 카메하메하1세 대왕으로 하와이 제도에 통일 왕국의 시조로 강성제국의 깃발을 꽂은 영웅이다. 그때에 그는 숭고한 땅에 “알로하 정신”을 처음 선포하였다. 오늘날 하와이 주 표어로 하와이안의 가슴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거룩한 초석을 다진 것이다.
“대지의 생명은 정의가운데 영원히 존재한다. " 알로하 정신의 깊은 의미를 담고 있다. (끝)
,
샌드위치와 알로하 양상훈
정열적인 훌라춤과 미소로 환대하는 ‘낙원의 땅’ 하와이제도는 2,800여 년 전 화산폭발로 용암이 쏟아져 절묘하게 빚어진 군도로 형성 되어있다. 8개의 큰 섬들을 포함한 그림같이 아름다운 137여개의 크고 작은 섬들과 산호초로 이루어졌다.
면적이 제주도의 9배, 남한의 1/6에 이른다. 빅아일렌드가 가장 큰 섬이고, 오하우가 수도로서 거주자가 가장 많은 인구 밀집 섬(전인구의 80%)이다.
일 년 내내 서늘한 무역풍이 에메랄드 빛 바다를 타고 불어와 습도가 낮은 온화한 평온25'C-28‘C를 유지한다. 맑다 못해 따뜻한 햇살로 인한 청명함은 하와이 아니고는 맛보기 힘들 것이다. 마크트웨인은 하와이를 일찍이 이렇게 노래했다.
“ 천국에서 잠들고 또 다시 천국에서 깨 어 난 다”
난 뉴욕에서 오랫동안 거주하다가 여기 이주한지 7년 정도 지났다. 그 전에 몇 번 방문한 적은 있었지만 고향에 돌아온 친근감을 느낀다. 그동안 정이 많이 들어 왔었다. 막상 살아가보니 점차 매료되어 감회가 새로워진다.
“하와이를 안 가본 사람은 있어도, 한번만 가본 사람은 없다” 는 말을 가끔 듣는다.
.
거리에 현란한 알로하셔츠와 반바지 차림으로 보수적이면서도 개방적인 라이프스타일. 빨간색 하이비스커스(화려한 색의 열대성 하와이주 꽃)를 머리에 꽂고 하와이안 레이를 목에 걸며 해변을 거니는 낭만. 오염되지 않은 아름다운 자연과 신비로운 폴리네시안 문화. 활기 넘치는 다양한 해양스포츠와 완벽한 레저시설 등은 오늘의 하와이를 지상 최고의 관광 휴양지로 손꼽게 하는 매력이 아닌가싶다.
하와이 주민들은 다양한 형태와 종족으로 구성되어있다. 왕국시대부터 대대로 이어 내려온 원주민. 1900년도 초에 중국 일본 한국 등에서 사탕수수밭의 노동자로 고용되어 유입된 이민자들. 특히 미국이 1941년 12월 일본의 진주만 기습 공격에 의한 제2차 대전의 종결로 일본이 패망되고 하와이 집단정착을 허용한 다수의 일본 이주자들. 다른 지역에서 은퇴하여 노후의 여생을 위해 거주하는 형태 등이다. 아시안 백인 원주민과 기타 여러 혈족이 섞여진 혼혈인들이 의외로 많은 편이다.
사람마다 사정이 다르겠지만, 대부분 아메리칸드림이나 현지 환경 요인으로 선택한 경우가 많다. 그러나 아무리 지상 천국이라도 생활 여건과 사회 환경 요건이 어느 정도 충족하지 못하면 적응하기가 어려워진다. 이방인들이 하와이에 들어서면 대부분 문화적 충격이 크지 않다고 한다. 현지 주민들의 따뜻한 대면과 미소로 친절한 배려, 의심하지 않는 순수하고 열린 마음 등에 끌리는 분위기 때문이 아닐 런지. 오랫동안 그들의 일상생활의 저변에서 흐르는 영혼인 '알로하 정신(Aloha Spirit)'이 많은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하와이안 만이 지니고 있는 이 정신은 미소 친절 배려 사랑 정의 등 독특한 상징으로 오래전부터 전통문화로 정착되어왔다. 일상에서 그 향기가 스며들어 좋은 인상으로 외지인들을 즐겁게 하는 것이리라.
하와이로 이사 오는 그 날, 이웃이 평소 잘 아는 사람처럼 마음을 열고 갑자기 인사차 방문하여 잠시 당황한 적이 있었다. 통상적 서구식도 아닌 알로하식의 문화 관습이 아닌가싶다. 과일 선물까지 들고 와 은근히 부담이 되었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그들의 집안 뜰 에서 제배한 열대 과일이었다. 망고 파파야 피그 등으로 그 마음쓰임에 두고두고 고마움을 담게 되었다.
평소 산책하려 나가 이웃 거리에서 남녀노소 없이 만나게 되면 언제나 정월 초하룻날처럼 알로하로 반갑게 맞이한다. 어떤 때는 몸집이 큰 애견을 각각 끌고 온 부부가 좁은 인도에서 마주쳐 미안한 듯이 < 하이! > 하며 다가온다.
옆집 일본인 모리카와씨는 아내와 딸 사위 손자 함께 한집안에 화목하게 사는 모습이 부럽다 가끔 웃음보따리가 밖으로 쏟아져 나오며 주말이면 바비큐 냄새로 거리를 진동시킨다. 손자는 하와이대학에 다니는데 건장하고 잘 생겼다. 착하고 효성이 지극하다고 늘 자랑한다. 집 마당에 설치한 농구대에서 연습하다가 가끔 공이 우리 집에 날려 오면 나는 얼른 집어 던져주기도 한다. 우리가 여행할 때에 집을 비우게 되면 이 학생이 고맙게도 돌봐준다. 일본인 가정은 대부분 그들의 모국어를 사용하곤 하는데 모리카와씨 가족은 하와이어나 영어를 공용하고 있다. 아마 여기서 태어난 일본인 3세대로서 모국어보다 현지어가 더 쉬울 수도 있을 것이다. 하와이에 일본인이 아시안 인들 중에서 다수 비율을 차지하여 곳곳에 일본문화를 많이 경험하게 된다.
하와이에 거주하는 대부분 일본인들은 뉴욕권역의 일본인과는 사뭇 다른 점을 발견하게 된다. 여기 일본인 들은 미국화 되어 그런지 영어도 훨씬 더 잘하고 키도 더 훤칠하여 모국민보다 선량하고 훨씬 더 친밀감이 느껴진다.
미국50주에서 유일하게 하와이 주가 영어와 하와이어를 공식어로 지정하고 있다. 학교에 입학하면 하와이어를 의무적으로 가르치고 있다. 요즘 완화되어 주정부에서 학생들에게 자유롭게 선택권을 주는 시스템으로 점차 전환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하와이 언어구사는 하와이안에게 정체성과 긍지 및 자존감을 고취시켜주는 표상이다. 그들은 백화점이나 마켓에서도 상품을 메이드 인.유.에스.에이 보다 메이드 인.하와이를 더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나 역시 시간이 갈수록 하와이제에 기울러져 티셔츠, 맥주도 미제보다 하와이제를 더 좋아한다. 상품 질에서 전혀 떨어지지 않고 더 우수한 것도 있다.
하와이언어는 13개의 알파벳으로 음절이 모두 모음으로 끝내어 자음의 연속이 없다는 특징이 있어 발음이 쉽지 않다. 난 하와이 지명이나 거리 이름이 본토에 비해 길고 어려워
아직도 익숙하지 못하고 해맬 때가있다. 예컨대 카메하메하,카필로라나이(Kamehameha way . Kapilolani blvd.)등. 이곳 생활에서 전문적으로 하와이어를 꼭 배울 필요성이 없다면 알로하 마할로 누이로아(Aloha.Mahalo Nuiloa 안녕하세요.대단히 감사합니다) 등의 인사말 정도와 간단한 회화만 하면 크게 불편한 경우는 없을 것 같다.
하와이 와서 어느 날 희한한 알로하 이벤트를 목격한 적이 있다. 와이키키 다이아몬드 헤드 분화구와 동서 쌍벽을 이루는 우리 동네 바로 건너편 코코헤드 분화구가 있다. 정상까지 해발 400여m의 높이에는 제2차 대전 당시 섬 방어를 위해 전지를 구축한 아지트가 전쟁 상흔으로 아직 남아있다. 해발고도 400m의 높이밖에 되진 않지만 하늘을 가릴 곳이 없는 개활지(開豁地)로 꾀나 진 땀을 흘러야 하는 코스다.
코코헤드 트레일 등산로는 레일 트레일로 정상까지 1048계단을 밟고 올라가야하는 최고 난이도 코스다.
그 날 힘들게 올라가 파노라마 같은 전망대에서 남녀 한 쌍의 결혼식이 펼쳐지지 않은가! 목사의 주례로 모두 알로하셔츠, 반바지(거의 수영복수준) 차림에 해로 백년을 가약하는 너무 멋진 혼례식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축하객이라야 다행히 그날 오른 등반 자 10여명에 나도 포함한 불청객으로 염치없이 축하객의 한사람이 된 것이다.
구름 높이에서 바다까지 뻗어 내린 웅장한 산맥의 자태와 맑은 날의 산색, 바다색은 마치 수채물감을 풀어 놓은 듯이 아름답다. 이 곳을 결혼예식장으로 택했던 기발한 아이디어에 놀랐다. 신랑과 신부,주례 목사도 모두 정장이 아닌 속살이 보일 듯 말 듯 한 시원한 옷차림이었다. 축하객들로부터 우렁찬 박수소리의 메아리가 태평양 수평선으로 멀리 퍼져 나갔다. 신부의 간단한 알로하인사에 이어 열정적인 키스와 포옹으로 예식이 멋지게 마무리하자 모두 아쉬운 듯 자리를 떠났다. 초대받지 않은 하객들이었으나, 가족처럼 진정한 축하객이 되어 예식이 끝날 때 까지 기다리며 축하해주는 모습이 보기에 좋았다.
하와이는 근대에 까지 왕국이 존재 했으며 미국 내에서 유일한 왕궁이 있는 곳이다.1959년 8월에 미국 50주의 하나로 편입되면서 연방정부의 특구로 관광 및 군사적 전략가치로서 지원을 아끼지 않곤 한다.
하와이의 최초발견은 1788년1월, 영국탐험가 제임스.쿡(James Cook)선장이 태평양을 항해하다가 가장 먼저 화산 폭발한 “카우아이(KAUAI)” 섬을 발견하였다. 샌드위치 백작의 이름을 따 “샌드위치제도”로 명명하여 비로소 세계에 처음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나중에 별칭으로 하와이 제도로 부르지만, 당시 만해도 여러 섬들의 추장이 패권을 다투던 군웅할거(群雄割據)시대였다. 그 때에 빅아일랜드의 왕족의 한 장수가 뛰어난 수완으로 수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하와이제도 8개 섬에 정복의 야망을 품었다. 이웃 마우이,몰로카이부터 차래로 점령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오하우로 건너와 거침없이 진격하여 하와이 역사상 가장 치열한 전투로 이름난 ‘바람 산’ 이란 격전지로 “누우아누 팔리(Nu'uanu Pali)“에서 한판 승부로 역사의 전환점을 그었다.
카메하메하 장수가 계곡으로 적군들을 몰아 맹공을 퍼부어 마침내 승리의 월계관을 걸머졌다. 1810년 3월, 그가 바로 카메하메하1세 대왕으로 하와이 제도에 통일 왕국의 시조로 강성제국의 깃발을 꽂은 영웅이다. 그때에 그는 숭고한 땅에 “알로하 정신”을 처음 선포하였다. 오늘날 하와이 주 표어로 하와이안의 가슴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거룩한 초석을 다진 것이다.
“대지의 생명은 정의가운데 영원히 존재한다. " 알로하 정신의 깊은 의미를 담고 있다. (끝)
,
샌드위치와 알로하 양상훈
정열적인 훌라춤과 미소로 환대하는 ‘낙원의 땅’ 하와이제도는 2,800여 년 전 화산폭발로 용암이 쏟아져 절묘하게 빚어진 군도로 형성 되어있다. 8개의 큰 섬들을 포함한 그림같이 아름다운 137여개의 크고 작은 섬들과 산호초로 이루어졌다.
면적이 제주도의 9배, 남한의 1/6에 이른다. 빅아일렌드가 가장 큰 섬이고, 오하우가 수도로서 거주자가 가장 많은 인구 밀집 섬(전인구의 80%)이다.
일 년 내내 서늘한 무역풍이 에메랄드 빛 바다를 타고 불어와 습도가 낮은 온화한 평온25'C-28‘C를 유지한다. 맑다 못해 따뜻한 햇살로 인한 청명함은 하와이 아니고는 맛보기 힘들 것이다. 마크트웨인은 하와이를 일찍이 이렇게 노래했다.
“ 천국에서 잠들고 또 다시 천국에서 깨 어 난 다”
난 뉴욕에서 오랫동안 거주하다가 여기 이주한지 7년 정도 지났다. 그 전에 몇 번 방문한 적은 있었지만 고향에 돌아온 친근감을 느낀다. 그동안 정이 많이 들어 왔었다. 막상 살아가보니 점차 매료되어 감회가 새로워진다.
“하와이를 안 가본 사람은 있어도, 한번만 가본 사람은 없다” 는 말을 가끔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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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에 현란한 알로하셔츠와 반바지 차림으로 보수적이면서도 개방적인 라이프스타일. 빨간색 하이비스커스(화려한 색의 열대성 하와이주 꽃)를 머리에 꽂고 하와이안 레이를 목에 걸며 해변을 거니는 낭만. 오염되지 않은 아름다운 자연과 신비로운 폴리네시안 문화. 활기 넘치는 다양한 해양스포츠와 완벽한 레저시설 등은 오늘의 하와이를 지상 최고의 관광 휴양지로 손꼽게 하는 매력이 아닌가싶다.
하와이 주민들은 다양한 형태와 종족으로 구성되어있다. 왕국시대부터 대대로 이어 내려온 원주민. 1900년도 초에 중국 일본 한국 등에서 사탕수수밭의 노동자로 고용되어 유입된 이민자들. 특히 미국이 1941년 12월 일본의 진주만 기습 공격에 의한 제2차 대전의 종결로 일본이 패망되고 하와이 집단정착을 허용한 다수의 일본 이주자들. 다른 지역에서 은퇴하여 노후의 여생을 위해 거주하는 형태 등이다. 아시안 백인 원주민과 기타 여러 혈족이 섞여진 혼혈인들이 의외로 많은 편이다.
사람마다 사정이 다르겠지만, 대부분 아메리칸드림이나 현지 환경 요인으로 선택한 경우가 많다. 그러나 아무리 지상 천국이라도 생활 여건과 사회 환경 요건이 어느 정도 충족하지 못하면 적응하기가 어려워진다. 이방인들이 하와이에 들어서면 대부분 문화적 충격이 크지 않다고 한다. 현지 주민들의 따뜻한 대면과 미소로 친절한 배려, 의심하지 않는 순수하고 열린 마음 등에 끌리는 분위기 때문이 아닐 런지. 오랫동안 그들의 일상생활의 저변에서 흐르는 영혼인 '알로하 정신(Aloha Spirit)'이 많은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하와이안 만이 지니고 있는 이 정신은 미소 친절 배려 사랑 정의 등 독특한 상징으로 오래전부터 전통문화로 정착되어왔다. 일상에서 그 향기가 스며들어 좋은 인상으로 외지인들을 즐겁게 하는 것이리라.
하와이로 이사 오는 그 날, 이웃이 평소 잘 아는 사람처럼 마음을 열고 갑자기 인사차 방문하여 잠시 당황한 적이 있었다. 통상적 서구식도 아닌 알로하식의 문화 관습이 아닌가싶다. 과일 선물까지 들고 와 은근히 부담이 되었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그들의 집안 뜰 에서 제배한 열대 과일이었다. 망고 파파야 피그 등으로 그 마음쓰임에 두고두고 고마움을 담게 되었다.
평소 산책하려 나가 이웃 거리에서 남녀노소 없이 만나게 되면 언제나 정월 초하룻날처럼 알로하로 반갑게 맞이한다. 어떤 때는 몸집이 큰 애견을 각각 끌고 온 부부가 좁은 인도에서 마주쳐 미안한 듯이 < 하이! > 하며 다가온다.
옆집 일본인 모리카와씨는 아내와 딸 사위 손자 함께 한집안에 화목하게 사는 모습이 부럽다 가끔 웃음보따리가 밖으로 쏟아져 나오며 주말이면 바비큐 냄새로 거리를 진동시킨다. 손자는 하와이대학에 다니는데 건장하고 잘 생겼다. 착하고 효성이 지극하다고 늘 자랑한다. 집 마당에 설치한 농구대에서 연습하다가 가끔 공이 우리 집에 날려 오면 나는 얼른 집어 던져주기도 한다. 우리가 여행할 때에 집을 비우게 되면 이 학생이 고맙게도 돌봐준다. 일본인 가정은 대부분 그들의 모국어를 사용하곤 하는데 모리카와씨 가족은 하와이어나 영어를 공용하고 있다. 아마 여기서 태어난 일본인 3세대로서 모국어보다 현지어가 더 쉬울 수도 있을 것이다. 하와이에 일본인이 아시안 인들 중에서 다수 비율을 차지하여 곳곳에 일본문화를 많이 경험하게 된다.
하와이에 거주하는 대부분 일본인들은 뉴욕권역의 일본인과는 사뭇 다른 점을 발견하게 된다. 여기 일본인 들은 미국화 되어 그런지 영어도 훨씬 더 잘하고 키도 더 훤칠하여 모국민보다 선량하고 훨씬 더 친밀감이 느껴진다.
미국50주에서 유일하게 하와이 주가 영어와 하와이어를 공식어로 지정하고 있다. 학교에 입학하면 하와이어를 의무적으로 가르치고 있다. 요즘 완화되어 주정부에서 학생들에게 자유롭게 선택권을 주는 시스템으로 점차 전환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하와이 언어구사는 하와이안에게 정체성과 긍지 및 자존감을 고취시켜주는 표상이다. 그들은 백화점이나 마켓에서도 상품을 메이드 인.유.에스.에이 보다 메이드 인.하와이를 더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나 역시 시간이 갈수록 하와이제에 기울러져 티셔츠, 맥주도 미제보다 하와이제를 더 좋아한다. 상품 질에서 전혀 떨어지지 않고 더 우수한 것도 있다.
하와이언어는 13개의 알파벳으로 음절이 모두 모음으로 끝내어 자음의 연속이 없다는 특징이 있어 발음이 쉽지 않다. 난 하와이 지명이나 거리 이름이 본토에 비해 길고 어려워
아직도 익숙하지 못하고 해맬 때가있다. 예컨대 카메하메하,카필로라나이(Kamehameha way . Kapilolani blvd.)등. 이곳 생활에서 전문적으로 하와이어를 꼭 배울 필요성이 없다면 알로하 마할로 누이로아(Aloha.Mahalo Nuiloa 안녕하세요.대단히 감사합니다) 등의 인사말 정도와 간단한 회화만 하면 크게 불편한 경우는 없을 것 같다.
하와이 와서 어느 날 희한한 알로하 이벤트를 목격한 적이 있다. 와이키키 다이아몬드 헤드 분화구와 동서 쌍벽을 이루는 우리 동네 바로 건너편 코코헤드 분화구가 있다. 정상까지 해발 400여m의 높이에는 제2차 대전 당시 섬 방어를 위해 전지를 구축한 아지트가 전쟁 상흔으로 아직 남아있다. 해발고도 400m의 높이밖에 되진 않지만 하늘을 가릴 곳이 없는 개활지(開豁地)로 꾀나 진 땀을 흘러야 하는 코스다.
코코헤드 트레일 등산로는 레일 트레일로 정상까지 1048계단을 밟고 올라가야하는 최고 난이도 코스다.
그 날 힘들게 올라가 파노라마 같은 전망대에서 남녀 한 쌍의 결혼식이 펼쳐지지 않은가! 목사의 주례로 모두 알로하셔츠, 반바지(거의 수영복수준) 차림에 해로 백년을 가약하는 너무 멋진 혼례식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축하객이라야 다행히 그날 오른 등반 자 10여명에 나도 포함한 불청객으로 염치없이 축하객의 한사람이 된 것이다.
구름 높이에서 바다까지 뻗어 내린 웅장한 산맥의 자태와 맑은 날의 산색, 바다색은 마치 수채물감을 풀어 놓은 듯이 아름답다. 이 곳을 결혼예식장으로 택했던 기발한 아이디어에 놀랐다. 신랑과 신부,주례 목사도 모두 정장이 아닌 속살이 보일 듯 말 듯 한 시원한 옷차림이었다. 축하객들로부터 우렁찬 박수소리의 메아리가 태평양 수평선으로 멀리 퍼져 나갔다. 신부의 간단한 알로하인사에 이어 열정적인 키스와 포옹으로 예식이 멋지게 마무리하자 모두 아쉬운 듯 자리를 떠났다. 초대받지 않은 하객들이었으나, 가족처럼 진정한 축하객이 되어 예식이 끝날 때 까지 기다리며 축하해주는 모습이 보기에 좋았다.
하와이는 근대에 까지 왕국이 존재 했으며 미국 내에서 유일한 왕궁이 있는 곳이다.1959년 8월에 미국 50주의 하나로 편입되면서 연방정부의 특구로 관광 및 군사적 전략가치로서 지원을 아끼지 않곤 한다.
하와이의 최초발견은 1788년1월, 영국탐험가 제임스.쿡(James Cook)선장이 태평양을 항해하다가 가장 먼저 화산 폭발한 “카우아이(KAUAI)” 섬을 발견하였다. 샌드위치 백작의 이름을 따 “샌드위치제도”로 명명하여 비로소 세계에 처음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나중에 별칭으로 하와이 제도로 부르지만, 당시 만해도 여러 섬들의 추장이 패권을 다투던 군웅할거(群雄割據)시대였다. 그 때에 빅아일랜드의 왕족의 한 장수가 뛰어난 수완으로 수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하와이제도 8개 섬에 정복의 야망을 품었다. 이웃 마우이,몰로카이부터 차래로 점령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오하우로 건너와 거침없이 진격하여 하와이 역사상 가장 치열한 전투로 이름난 ‘바람 산’ 이란 격전지로 “누우아누 팔리(Nu'uanu Pali)“에서 한판 승부로 역사의 전환점을 그었다.
카메하메하 장수가 계곡으로 적군들을 몰아 맹공을 퍼부어 마침내 승리의 월계관을 걸머졌다. 1810년 3월, 그가 바로 카메하메하1세 대왕으로 하와이 제도에 통일 왕국의 시조로 강성제국의 깃발을 꽂은 영웅이다. 그때에 그는 숭고한 땅에 “알로하 정신”을 처음 선포하였다. 오늘날 하와이 주 표어로 하와이안의 가슴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거룩한 초석을 다진 것이다.
“대지의 생명은 정의가운데 영원히 존재한다. " 알로하 정신의 깊은 의미를 담고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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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드위치와 알로하 양상훈
정열적인 훌라춤과 미소로 환대하는 ‘낙원의 땅’ 하와이제도는 2,800여 년 전 화산폭발로 용암이 쏟아져 절묘하게 빚어진 군도로 형성 되어있다. 8개의 큰 섬들을 포함한 그림같이 아름다운 137여개의 크고 작은 섬들과 산호초로 이루어졌다.
면적이 제주도의 9배, 남한의 1/6에 이른다. 빅아일렌드가 가장 큰 섬이고, 오하우가 수도로서 거주자가 가장 많은 인구 밀집 섬(전인구의 80%)이다.
일 년 내내 서늘한 무역풍이 에메랄드 빛 바다를 타고 불어와 습도가 낮은 온화한 평온25'C-28‘C를 유지한다. 맑다 못해 따뜻한 햇살로 인한 청명함은 하와이 아니고는 맛보기 힘들 것이다. 마크트웨인은 하와이를 일찍이 이렇게 노래했다.
“ 천국에서 잠들고 또 다시 천국에서 깨 어 난 다”
난 뉴욕에서 오랫동안 거주하다가 여기 이주한지 7년 정도 지났다. 그 전에 몇 번 방문한 적은 있었지만 고향에 돌아온 친근감을 느낀다. 그동안 정이 많이 들어 왔었다. 막상 살아가보니 점차 매료되어 감회가 새로워진다.
“하와이를 안 가본 사람은 있어도, 한번만 가본 사람은 없다” 는 말을 가끔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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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에 현란한 알로하셔츠와 반바지 차림으로 보수적이면서도 개방적인 라이프스타일. 빨간색 하이비스커스(화려한 색의 열대성 하와이주 꽃)를 머리에 꽂고 하와이안 레이를 목에 걸며 해변을 거니는 낭만. 오염되지 않은 아름다운 자연과 신비로운 폴리네시안 문화. 활기 넘치는 다양한 해양스포츠와 완벽한 레저시설 등은 오늘의 하와이를 지상 최고의 관광 휴양지로 손꼽게 하는 매력이 아닌가싶다.
하와이 주민들은 다양한 형태와 종족으로 구성되어있다. 왕국시대부터 대대로 이어 내려온 원주민. 1900년도 초에 중국 일본 한국 등에서 사탕수수밭의 노동자로 고용되어 유입된 이민자들. 특히 미국이 1941년 12월 일본의 진주만 기습 공격에 의한 제2차 대전의 종결로 일본이 패망되고 하와이 집단정착을 허용한 다수의 일본 이주자들. 다른 지역에서 은퇴하여 노후의 여생을 위해 거주하는 형태 등이다. 아시안 백인 원주민과 기타 여러 혈족이 섞여진 혼혈인들이 의외로 많은 편이다.
사람마다 사정이 다르겠지만, 대부분 아메리칸드림이나 현지 환경 요인으로 선택한 경우가 많다. 그러나 아무리 지상 천국이라도 생활 여건과 사회 환경 요건이 어느 정도 충족하지 못하면 적응하기가 어려워진다. 이방인들이 하와이에 들어서면 대부분 문화적 충격이 크지 않다고 한다. 현지 주민들의 따뜻한 대면과 미소로 친절한 배려, 의심하지 않는 순수하고 열린 마음 등에 끌리는 분위기 때문이 아닐 런지. 오랫동안 그들의 일상생활의 저변에서 흐르는 영혼인 '알로하 정신(Aloha Spirit)'이 많은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하와이안 만이 지니고 있는 이 정신은 미소 친절 배려 사랑 정의 등 독특한 상징으로 오래전부터 전통문화로 정착되어왔다. 일상에서 그 향기가 스며들어 좋은 인상으로 외지인들을 즐겁게 하는 것이리라.
하와이로 이사 오는 그 날, 이웃이 평소 잘 아는 사람처럼 마음을 열고 갑자기 인사차 방문하여 잠시 당황한 적이 있었다. 통상적 서구식도 아닌 알로하식의 문화 관습이 아닌가싶다. 과일 선물까지 들고 와 은근히 부담이 되었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그들의 집안 뜰 에서 제배한 열대 과일이었다. 망고 파파야 피그 등으로 그 마음쓰임에 두고두고 고마움을 담게 되었다.
평소 산책하려 나가 이웃 거리에서 남녀노소 없이 만나게 되면 언제나 정월 초하룻날처럼 알로하로 반갑게 맞이한다. 어떤 때는 몸집이 큰 애견을 각각 끌고 온 부부가 좁은 인도에서 마주쳐 미안한 듯이 < 하이! > 하며 다가온다.
옆집 일본인 모리카와씨는 아내와 딸 사위 손자 함께 한집안에 화목하게 사는 모습이 부럽다 가끔 웃음보따리가 밖으로 쏟아져 나오며 주말이면 바비큐 냄새로 거리를 진동시킨다. 손자는 하와이대학에 다니는데 건장하고 잘 생겼다. 착하고 효성이 지극하다고 늘 자랑한다. 집 마당에 설치한 농구대에서 연습하다가 가끔 공이 우리 집에 날려 오면 나는 얼른 집어 던져주기도 한다. 우리가 여행할 때에 집을 비우게 되면 이 학생이 고맙게도 돌봐준다. 일본인 가정은 대부분 그들의 모국어를 사용하곤 하는데 모리카와씨 가족은 하와이어나 영어를 공용하고 있다. 아마 여기서 태어난 일본인 3세대로서 모국어보다 현지어가 더 쉬울 수도 있을 것이다. 하와이에 일본인이 아시안 인들 중에서 다수 비율을 차지하여 곳곳에 일본문화를 많이 경험하게 된다.
하와이에 거주하는 대부분 일본인들은 뉴욕권역의 일본인과는 사뭇 다른 점을 발견하게 된다. 여기 일본인 들은 미국화 되어 그런지 영어도 훨씬 더 잘하고 키도 더 훤칠하여 모국민보다 선량하고 훨씬 더 친밀감이 느껴진다.
미국50주에서 유일하게 하와이 주가 영어와 하와이어를 공식어로 지정하고 있다. 학교에 입학하면 하와이어를 의무적으로 가르치고 있다. 요즘 완화되어 주정부에서 학생들에게 자유롭게 선택권을 주는 시스템으로 점차 전환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하와이 언어구사는 하와이안에게 정체성과 긍지 및 자존감을 고취시켜주는 표상이다. 그들은 백화점이나 마켓에서도 상품을 메이드 인.유.에스.에이 보다 메이드 인.하와이를 더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나 역시 시간이 갈수록 하와이제에 기울러져 티셔츠, 맥주도 미제보다 하와이제를 더 좋아한다. 상품 질에서 전혀 떨어지지 않고 더 우수한 것도 있다.
하와이언어는 13개의 알파벳으로 음절이 모두 모음으로 끝내어 자음의 연속이 없다는 특징이 있어 발음이 쉽지 않다. 난 하와이 지명이나 거리 이름이 본토에 비해 길고 어려워
아직도 익숙하지 못하고 해맬 때가있다. 예컨대 카메하메하,카필로라나이(Kamehameha way . Kapilolani blvd.)등. 이곳 생활에서 전문적으로 하와이어를 꼭 배울 필요성이 없다면 알로하 마할로 누이로아(Aloha.Mahalo Nuiloa 안녕하세요.대단히 감사합니다) 등의 인사말 정도와 간단한 회화만 하면 크게 불편한 경우는 없을 것 같다.
하와이 와서 어느 날 희한한 알로하 이벤트를 목격한 적이 있다. 와이키키 다이아몬드 헤드 분화구와 동서 쌍벽을 이루는 우리 동네 바로 건너편 코코헤드 분화구가 있다. 정상까지 해발 400여m의 높이에는 제2차 대전 당시 섬 방어를 위해 전지를 구축한 아지트가 전쟁 상흔으로 아직 남아있다. 해발고도 400m의 높이밖에 되진 않지만 하늘을 가릴 곳이 없는 개활지(開豁地)로 꾀나 진 땀을 흘러야 하는 코스다.
코코헤드 트레일 등산로는 레일 트레일로 정상까지 1048계단을 밟고 올라가야하는 최고 난이도 코스다.
그 날 힘들게 올라가 파노라마 같은 전망대에서 남녀 한 쌍의 결혼식이 펼쳐지지 않은가! 목사의 주례로 모두 알로하셔츠, 반바지(거의 수영복수준) 차림에 해로 백년을 가약하는 너무 멋진 혼례식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축하객이라야 다행히 그날 오른 등반 자 10여명에 나도 포함한 불청객으로 염치없이 축하객의 한사람이 된 것이다.
구름 높이에서 바다까지 뻗어 내린 웅장한 산맥의 자태와 맑은 날의 산색, 바다색은 마치 수채물감을 풀어 놓은 듯이 아름답다. 이 곳을 결혼예식장으로 택했던 기발한 아이디어에 놀랐다. 신랑과 신부,주례 목사도 모두 정장이 아닌 속살이 보일 듯 말 듯 한 시원한 옷차림이었다. 축하객들로부터 우렁찬 박수소리의 메아리가 태평양 수평선으로 멀리 퍼져 나갔다. 신부의 간단한 알로하인사에 이어 열정적인 키스와 포옹으로 예식이 멋지게 마무리하자 모두 아쉬운 듯 자리를 떠났다. 초대받지 않은 하객들이었으나, 가족처럼 진정한 축하객이 되어 예식이 끝날 때 까지 기다리며 축하해주는 모습이 보기에 좋았다.
하와이는 근대에 까지 왕국이 존재 했으며 미국 내에서 유일한 왕궁이 있는 곳이다.1959년 8월에 미국 50주의 하나로 편입되면서 연방정부의 특구로 관광 및 군사적 전략가치로서 지원을 아끼지 않곤 한다.
하와이의 최초발견은 1788년1월, 영국탐험가 제임스.쿡(James Cook)선장이 태평양을 항해하다가 가장 먼저 화산 폭발한 “카우아이(KAUAI)” 섬을 발견하였다. 샌드위치 백작의 이름을 따 “샌드위치제도”로 명명하여 비로소 세계에 처음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나중에 별칭으로 하와이 제도로 부르지만, 당시 만해도 여러 섬들의 추장이 패권을 다투던 군웅할거(群雄割據)시대였다. 그 때에 빅아일랜드의 왕족의 한 장수가 뛰어난 수완으로 수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하와이제도 8개 섬에 정복의 야망을 품었다. 이웃 마우이,몰로카이부터 차래로 점령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오하우로 건너와 거침없이 진격하여 하와이 역사상 가장 치열한 전투로 이름난 ‘바람 산’ 이란 격전지로 “누우아누 팔리(Nu'uanu Pali)“에서 한판 승부로 역사의 전환점을 그었다.
카메하메하 장수가 계곡으로 적군들을 몰아 맹공을 퍼부어 마침내 승리의 월계관을 걸머졌다. 1810년 3월, 그가 바로 카메하메하1세 대왕으로 하와이 제도에 통일 왕국의 시조로 강성제국의 깃발을 꽂은 영웅이다. 그때에 그는 숭고한 땅에 “알로하 정신”을 처음 선포하였다. 오늘날 하와이 주 표어로 하와이안의 가슴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거룩한 초석을 다진 것이다.
“대지의 생명은 정의가운데 영원히 존재한다. " 알로하 정신의 깊은 의미를 담고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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