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관한 종교적 사색                                                          양 상 훈

 

  사람은 누구나 죽음을 슬퍼하고 허무하여 두려워한다.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현대 의학과 종교철학까지도 모두 동원된다.

그러나 죽음은 소리 없이 다가오며 누구에게나 피할 수 없는 공평한 기회를 주는 것이다. 가장 침통한 것이 죽음이며 또한 언제나 작별과 고통을 동반하고 있다.

불교의 윤회설이나 기독교에서의  부활과 구원의 확신이 서더라도 지금 당장 천국행 티켓이 있으니 나오라고 한다면 대부분 망설어지는 것이다.

 

뉴욕에 살면서  가끔씩 맨허탄에 있는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을 찾아가는 일이 있었다..

2층에 있는 갤러리에 들어서면 소크라테스가 침상에서 평화스러운 모습으로 독배를 마시는 그림이 있다. 그리고 다른 곳에는 십자가에서 처절한 모습으로 운명하는 예수의 그림들이 각각 다른 모습으로 걸려있다.

 

 이 실존했던 두분들의 죽음 직전의 모습은 메우 대조적이다. 소크라테스는 평화스러운 모습으로 독배를 마셨고, 예수는 알 수 없는 울부짖음으로 운명을 했다.

소크라테스의 죽음은 아름다운 것이었다.

 

삶에 관한 문제들은 경험자의 조언을 받을 수 있지만 죽음에 대한 경험자의 자문은 불가능하다. 우리들은 죽음을 "인간 일방에 관계된 것으로 착각하기 쉽다. 메일 죽음의 사건들이 일어나지만 그것은 남에게서 일어난 일로 생각하여 나에게 닥쳐올 불안한 사건에서 회피하려하고 잊으려한다.

하이덱커는 이런 현상을 "착각"이라고 했다. 그는 죽음을 추상적인 개념으로 생각 하지 말고 내 자신이 메일 죽음을 향해서 달리고 있는 결단으로 받아 드릴 때 죽음이 "인간 일방"이라는 '자기착각'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하였다.

 

심리학자인 프로이드는 그의 리비도(libido)이론에서 모든 유기체가 있는 본능은 삶의 본능과 죽음에 대한 본능을 함께 갖고 있어서 삶과 죽음에 대한 양면이 항상 긴장관계 에 있다고 했다.

 

 여기서 잠간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이해해보자.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법정에서 죽음의 선고를 받고 감옥에 있을때 제자들에 의해서 죽음을 피할 수 있는 길이 마련되었다. 그러나 그는 그 길을 거부하고 조용히 독배를 마셨다. 그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육체의 죽음을 통해서 보다 차원이 높은 영혼의 자유를 믿었기 때문 이었다.

그의 제자 풀라톤이 그린 소크라테스의 죽음은 아름다운 죽음이었고 공포가 없는 죽음이었다. 왜냐하면 죽음은 단지 육체와 영혼의 분리이기 때문이었다.

풀라톤이 본 인간의 육체는 영혼의 감옥이었다. 육체가 살아 있는 한, 영혼은 육체 안에 갇혀서 영원한 본질과 연합할 수 없는 상태였는데 죽음을 통해서 인간의 영혼은 육제의 쇠사슬로부터 해방을 얻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소크라테스의 죽음은 비극이 아니고 실존적인 육체와 그 속에 있는 영혼을 분리하는 자유의 과정 이었으며 축복의 기회였었다.그런데도 우리가 죽음을 슬퍼함은  그것을 평소에 초연하게 받아드릴수 있는

사생관의 확립이 부족한데서 온다.

 

 한편 예수의 죽음은 어떠했었는가.

예수의 죽음에 대한 관점은 자연적인 사건을 넘어선 요소가 있다.

예수의 죽음은 소크라테스의 죽음과는 아주 다르다. 그에게 죽음은 두려움과 슬픔 그 자체였다.

죽음의 광경도 무척 처절하였다.

정치범에게 지워진 십자가 위에서 손발이 쇠못으로 박혔고 조롱의 상징으로 가시관이 씌워 졌다. 아침에 시작한 사형집행이 반나절이 넘도록 고통스러운 와중에 목말라했다.

 

하나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그리고 알지 못할 몇 마디를 크게 지르고 운명했다. 예수의 죽음은 이렇게 처절했다.

그런데 예수의 죽음은 그 사건으로 끝나버리지 않았다. 삼일 후에 그 무덤은 비어있었고 부활한 예수를 보았다는 여인들과 제자들의 증언으로 "대속적인 죽음의 가치"를 찾게 되었다.

 

 바울은 기독교를 체계화한 학자 였는 데  그가 본 예수의 죽음은 인간의 숙명적인 원죄와 죽음의 사슬을 끊기 위해서 인간의 모습으로 세상의 고난 속으로 뛰어 들었다고 했다.

이것은 인간의 눈 높이 만큼 자기 몸을 낮추어 오신 하나님의 " 자기 겸허라고 했다. 하나님은 예수 안에서 유한한 인간으로 계셨고  이 유한한 인간성에 함께 참여해서 마지막에는 죽음의 고통도 함께 겪었다고 했다.

하나님의 자기 겸허는 예수의 모든 생애와 교훈을 통해서 나타내 보였고,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궁극적인 그의 섭리가 예수의 죽음으로 완성을 보았다고 한다.

 

 이것은 죽음을 향해서 걷고 있는 인간의 생명에 관한 하나님의 메시지이다. 이렇게 해서 기독교인의 죽음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자기 자신의 것으로 만들게 되고 이러한 확신이 죽음의 권세에서 해방으로 받고 예수와 함께 부활의 역사 속으로 들어간다고 했다.

헬레니즘의 영혼 불멸에 대한 모든 지식을 탐닉하던 바울이 예수를 본후 그 지식을 쓰레기라고 고백한 이유가 무엇 때문 이었을까?

 

 종교적 신념이 죽음에 대한 공포에 어떤 형태로 영향을 미치는 가에 대해서 일치된 견해는 없다. 일반적으로 종교인들은 죽음을 긍정적으로 받아 드리고 있다.

신앙심이 깊은 사람이나 자아 정체감이 확실한 사람들은 살면서 죽을 준비를 하는 자기 실현의 경지에 있는 사람들이다. 아무도 죽음을 넘어설 수 는 없다.

 

죽음을 회피하거나 거부하지 말고 죽음을 수용하면 바울이 설파한 죽음에 이르는 병인 불안을 줄일 수 있다.

죽음을 긍정하고 평안히 맞은 칸트는'좋다' 말로 임종을 맞이했고. 괴테는 '빛을 더' 라고 해서 임종을 지켜보던 가족과 친지들이 햇빛이 잘드는 뜰 앞으로 옮겨 햇빛을 더 받으면서 임종을 맞이했다고 한다.

소크라테스의 죽음도 아름다운 죽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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