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국 의 쉬 바 이 처
양상훈
그늘진 음지에서 일생을 통하여 희생하고 고귀한 사랑을 실천하며 이웃과 사회에 공헌해온 의사이면서, 이산가족의 아픔으로 우리의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1995년 12 월 25일 성탄절에 영면한 장기려 박사는 한국의 쉬바이처 이라고 알려지고 있다.
평생 어렵고 가난한 이웃을 위해 사랑의 인술과 복음을 전파한 큰 의사이다.
45 년 동안 북에 두고온 아내와 가족을 잊지 못해 “수절”한 그의 간절한 가족재회의 소망은 끝내 이뤄지지 못했지만 그가 이 땅에 남긴 사랑은 한없이 넓고 깊다.
1909년 평북 홍천군 양하면에서 태어난 장박사는 개성 송도고보를 졸업하고, 32년 서울의대의 전신인 경성 의학 전문학교를 졸업했다.
장박사가 의사가 되기로 결심한 계기는“ 의사를 한 번도 못보고 죽어가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뒷산 바윗돌처럼 항상 서 있는 의사가 되기 위해서” 였다고 한다.
1940년부터 평양의과대학 외과교수와 평양도립 병원장을 지낸 그는 6.25 전쟁이 한창이던 1950 년 12 월 부인 김봉숙(당시 39세)여사와 5남매를 남겨두고 차남 가용(서울의대 교수)씨만을 데리고 월남 하였다. 장박사는 51년부터 부산 영도구에 천막을 치고 복음병원(현 고신의료원)을 세워 전화戰火 속에 절망하며 헐벗은 이웃들을 무료로 치료해 주었다.
1968년에 우리나라 최초의 의료보험 조합인 부산 청십자 의료보험조합을 설립하여 의료 구호사업에 헌신하였던 인물이다.
임종하기 1년전 부터 건강이 불편하여 거동이 힘든 상태에서도 메일 오전 부산 청십자병원에서 하루 10여명의 환자를 돌봐 왔던 것이다.
장박사는 길에서 만난 거지에게 줄 돈이 없자 수표를 선 뜻 건네주기도 했고, 추운 방에서 자취하는 제자에게 며느리가 해온 이불을 덮석 주어 보내기도 했다.
한번은 병원비가 없는 환자를 그 냥 퇴원 시키는 그에게 직원들이 뭐라 하자 환자에게 뒷문을 열어주며 도망치라고 했다는 일화도 남아있다.
장박사는 평생을 무소유로 일관한 분이었다. 75년 퇴임이후에도 기거할 집한 체가 없어 고산의료원이 병원옥상에 마련해준 20여 평 관사에서 노년을 보냈다. 그가 걸어온 45년 세월은 모든 이산가족의 아픔이기도 했다.
그는 이산가족 만남 신청이 있을 때마다 항상 1번이었다. 재혼하라는 주위의 권유에 “우리의 사랑은 육체의 이별과 무관하다. 사랑하는 사람과 영원히 살기위해 혼자 산다” 고 말하곤 했다.
1988년 미국에 있는 친지를 통해 부인과 5 남매의 사진과 편지를 전해 받는 간접 상봉만을 했을 뿐, 끝내 재회의 소망을 이루지 못했다.
장박사는 비문에 주를 섬기다 간 사람이라고 적어달라는 소박한 유언을 남겼다.
성탄 축복 속에 영원히 잠든 장기려박사. 그는 이 땅에 한없는 사랑을 남기곤 간 참 인술의 장본인으로 한평생을 헌신해온 한국의 쉬바이처 이다.
그의 사랑의 향기는 아직도 만인의 가슴에 스며 들어 그 향기가 멀리멀리 퍼져 나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