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놈 중 만들지요 / 박양근

 

봉정암 정경을 티브이에서 본 적이 있다. 오세암에서 깔딱고개를 넘는 길을 스님과 불자들이 삼보일배로 올라가는 과정을 다큐로 담은 템플스테이 기록이었다. 한 달 일정으로 산사 체험을 마친 후 마지막 과정인데 군대로 치면 30킬로를 걷는 야간행군쯤 된다. 나름의 뜻을 품고 산으로 들어온 분들의 고행이니 몸이 마음을 끄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몸을 당긴다. 소파에 느긋하게 앉아 수행자들의 모습을 지켜보는 나는 그저 무덤덤했다. 회향의 불심이 없거나, 산사의 울림을 갈구하지 않는 탓일지도 모르겠다.

잿빛 전진은 엄숙하였다. 겨울 설악산이 위엄에 넘친 게 아니라 무릎을 굽혀 오르는 작은 몸이 무섭도록 장엄하고 경탄스러웠다. 돌 투성이 길에 무릎을 꿇게 하는 맨손이 신비롭기까지 했다.

그들은 눈물을 흘렸다. 불자도 스님도 죽죽 눈물을 흘렸다. 아픔이 아니라, 자신을 깎아내는 희열이니, 그 눈물은 빛나는 이슬이었다.

언젠가 김제 인근의 청운사에서 연잎 이슬을 지켜본 적이 있다. 연잎의 녹색을 고스란히 비추는 이슬이 구슬 같았다. 구슬이라도 구르다 보면 긁히고 흠집이 생겨날 텐데 이슬은 생채기 하나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구를수록​ 초롱초롱 빛나고 하룻밤을 새워도 티 하나 없는 순결이었다. 순결이란 아무리 나뒹굴어도 제 질량과 부피를 지켜가는 이슬의 속성을 갖는다. 그것들은 신음도 비명도 지르지 않는다.

그들이 흘리는 눈물에는 상처에 대한 기억도 없다. 씻었으므로, 버렸으므로, 상처를 입어도 곧바로 지우고, 찔린 흔적조차 깨끗이 아문다. 허공에서 탄생하여 허공으로 소멸하는 맑은 눈이 이슬이라면 백팔번뇌를 씻기 위해 흘리는 땀과 눈물은 세상에서 가장 맑은 이슬일 것이다. 그 물방울에 비친 세상을 만나고 싶다.

누구나 푸른 산과 푸른 바다를 보기는 본다. 그러나 사람의 눈에는 승용차의 사이드미러처럼 보지 못하는 틈이 있다. 흐릿한 해석, 고정관념과 응답부재의 무신경이 그것이다. 무엇보다 맹안이 맹심 안에 있으니 그런 것이다.

하지만 절에 사는 사람에게는 맹안이 거의 없다. 인조 눈썹도, 마스카라도 없다. 이슬 같은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이유도 그 때문이라고 여기고 싶다. 이슬과 달리 눈물은 몸 안에서 생기므로 종착지도 마음 안에 있다. 만일 솔바람과 계곡물소리가 합치는 어느 암자의 마루에서 눈물을 흘리면 마음의 맹점이 사라져줄까.

깔딱고개를 8부 능선쯤 오르면 절이 보이던 때가 있었다. 마을에서 쳐다보면 빤히 보이는 암자는 솔숲으로 내가 들어가면 사라져버렸다. 그 절을 마음에 그리며 산에 오르곤 했다. 짧은 두 다리를 휘젓던 어린 시절이다. 허리가 꼬부라진​ 할매 보살님이 배낭을 메고 쉼 없이 오르면 그제야 뒤질세라 팔을 흔들어 속도를 냈다. 시골 어르신들은 절에 가면 뭔가 큰 이치를 얻으리라 믿었는지 모르지만 나는 그냥 절이 좋았다. 넓은 마당을 내려다보는 돌계단에 앉아 따뜻한 햇살을 맞는 것이 좋았다. 큰 바위 밑에서 솟아난 물이 대나무를 타고 흐르는 소리를 듣는 게 좋았다. 등 뒤에는 해가 저물도록 든든하게 나를 지켜주는 황금빛 부처님이 떡 버티고 계셨다. 그분이 나의 보호자인 듯한 게 가장 좋았다. 공양 때가 되면 밥을 주셨고, 때때로 떡과 과일도 주셨다. 겨울 해가 짧아 미처 마을로 내려가지 못하면 마루방 한편을 내어주셨다. 그래도 나는 절을 제대로 할 줄 몰랐고 할매 보살님들이 다 외우는 천수경을 끝까지 외우지 못했다.

보살님들은 매번 농담 반 진담 반의 청을 스님께 넣곤 했다.

"저놈 중 만들지요."

그런 소리를 들으면 나는 어둑해지는 산그늘과 경주하듯 산 밑까지 줄행랑을 쳤다.​

줄행랑이 뭔가. 도망치는 것이다. 낯익고 마음 놓은 곳이 괜히 무서워 도망치는 것이다. 그런데 줄행랑을 쳐본 사람은 알지만 일단 낯선 곳으로 내빼면 그러지 말았을 걸 하고 뉘우치게 된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제 목적지로 향하는데 나만 갈 곳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모든 것도 낯설어진다. 푸근하던 햇살과 부드러운 바람 소리조차 겁이 나고 눈 익은 길도 멀게 보인다. 내 후견인에게서 도망치고 머물러야 할 자리를 벗어난 탓이다.

산길을 구르듯 내려올 동안 나는 늘 입을 앙다물었다. 그리고 사하촌 조그만 초가집이 보이면 소리 내어 울었다. 대숲이 가만히 울음을 받아주고 컴컴한 어둠이 내려앉은 쪽마루는 내 엉덩이를 받쳐주었다. 지금도 그 차가운 어둠이 어제인 양 떠오르면 다시 눈물이 난다.

나는 명색이 불교 신자다. 절에 이름을 올리고 오다가다 절이 보이면 법당에서 허리 굽혀 참배를 한다. 그런데도 아직 불연은 멀기만 하다. 오직 그 절로 달음질치고 달음박질로 내려오던 시절만큼 삼보일배를 흉내 낸 적도 없을 것 같다. 무엇보다 절 밥을 먹고 절 방에서 자던 어린 시절의 눈물이 이슬 같았던 적도 없다. ​

다음 날 아침이 되면 서리 묻은 솔숲을 지나 부처님댁으로 갔다. 그냥 등 뒤에 그분이 계시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놓였기 때문이다.

그때가 벌써 갑자년이 다 되어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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