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은 펭귄의 날갯짓 / 윤태봉- 제16회 동서문학상 수필부문 은상

 

 

 

 

시속 20㎞의 강풍이 부는 영하 60도 극한의 땅 남극, 포식자와 추위로부터 새끼를 지키려는 수컷 황제펭귄의 부성은 65일 동안 눈만 먹으며 서서 자는 고행도 마다치 않는다. 몸무게가 반으로 주는 고통 속에서도 제 위를 게워 새끼에게 펭귄 밀크를 먹이는 희생은 감히 사람도 흉내 내기 힘든 숭고함이다. 눈보라로 한 치 앞이 구분키 어려운 혹한에서의 사투, 그것은 품은 새끼를 지키기 위해 –조심스레 뒤뚱거리며-수천의 수컷 펭귄들이 서로의 체온을 안팎으로 바꾸는 허들 링에서 최고의 정점을 찍는다. 차마 눈물겹기까지 하다. 누가 펭귄을 한낱 말 못 하는 동물일 뿐이라고 말할 수 있으랴. 짐승도 저러한데 권위적이며 표현이 적다고 누가 내 아버지의 사랑이 모성애보다 못하다고 말할 수 있으랴.

 

보름이 넘게 감기로 헤메고 있었다. 며칠 콧물 훌쩍이다 말 줄 알았는데, 한 움큼의 약을 목에 털어 넣고 밤낮없이 온열매트에 늘어 붙어 찜질 판을 벌였어도 몸은 피폐해져만 갔다. 감기는 상심으로 허해 있는 내 안을 알아차려 작정하고 침투한 것 같았다. 기진해 몸을 누우니 자고 자도 잠으로 빠져드는 어느 틈인가 비몽사몽 아버지 목소리가 귓가를 점령했다.

“너희들이 나 외로운데 보태분 거 있냐? 가산을 탕진할 것도 아닌데 왜 이 야단들이냐! 연락도 하지 마라”

겨우 몸을 일으켜 먹기 수월한 요거트 한 스푼을 넘치도록 떠서 쓰고 메마른 입안에 밀어 넣었다. 그런데 아프거나 속상할 때-먹고 살겠다고 허기진 속을 채울 때-밥 한 숟가락 입에 물면 청승맞게 눈물이 솟는 습관이 발동한 것일까. 눈앞이 벙벙해 왔다. 고인 눈물샘 위로 걱정스레 나를 내려다보던 먼 아버지의 모습이 출렁거렸다. 아버지의 모습은 발 위에 품은 알이, 갓 부화한 새끼가, 떨어질세라 눈보라 속에서도 미동 않고 서 있는 저 남극의 수컷 황제 펭귄을 닮아있었다.

 

새끼를 지키기 위한 아빠 펭귄의 부동자세 위로 눈발이 떨어진다. 떨어지고 쌓이는 눈발 사이로 눈발처럼 시렸던 아버지의 영상 하나 흔들리며 다가온다. 출근하는 아버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가 기겁하게 놀라 울음보를 터뜨렸던 그 날, 아버지는 계집애가 재수 없게 어디 어깨에 손을 얹느냐고 호통을 쳤다. 어린 마음에 얼마나 무안하고 놀랐는지 그 이후로 내 유년은 늘 아버지의 차가운 눈발을 피해 겉돌았다. 신작로를 지나 너른 벌판을 30분은 족히 걸어야 도착하는 극장을 따라갔던 유년의 길에서도, 중학교 입학식을 가던 사춘기의 길에서도 나는 멀찍이 떨어져 아버지의 눈을 피했다. 내게 아버지는 어렵고 차가운 눈발 같은 존재였다. 그래도 고등학교 시험에 붙자 척박했던 형편에 그것도 딸의 입학을 허락했던 일은 획기적인 일이었다. 이북 난민이 모여 사는 산동네로 흘러든 가난한 양복쟁이가 계집애들이란 중학교만 졸업하면 돈을 벌어야 한다는 지론을 거두었으니 내게는 하늘을 날아오르는 기쁨이었다. 나를 앉혀놓고 동생들의 학비라는 짐을 어깨에 실어주던 당신의 서릿발은 무거웠지만 말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아버지와의 약속을 이행했다. 서울로 직장을 다니며 봉투째 월급을 내놓고 한 달 교통비만 타서 쓰는 착실한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자의든 타의든 내 인생이 그리 순탄하지는 못해서 얼마 지나지 않아 한 남자의 칠전팔기에 귀를 기울인 것이 사고였다. 설상가상 조그맣게 양복점을 운영하던 아버지 앞에 찾아든 그 남자는 나와의 교재를 허락받으려고 소란을 피웠는데 아버지의 노발대발은 양복점이 날아갈 기세였다. 학력도 직장도 내놓을 것 없는 그는 당장 쫓겨났고 내게는 금족령이 내려졌다. 돌아보면 세상을 보는 혜안이란 없는 철부지 시절이었다. 직장을 며칠씩 나가지 않은 것은 물론, 끼니를 거부하며 누워 시위하던 어느 날 퇴근한 아버지가 내 앞에 털썩 주저앉아 눈물을 흘렸다. 이 자식아! 그놈은 절대 안된다. 네 인생이 고생길이 될 것이야. 내 앞에서 눈물 흘리는 아버지를 처음 보았다. 몇 날을 딸 때문에 고심하다 기어코 당신의 철옹성을 허물며 눈물로 호소하던 아버지. 언제나 권위적인 눈발만 쏟아붓는다고 불평했던 아버지의 꾸중이 온후한 방패막이였던 것을 나는 몰랐다. 그날 아버지의 머리 위로 희뜩희뜩 쌓여있던 세월의 눈발을 나는 잊을 수 없다. 아버지는 혹한을 견디며 내게 쏟아지는-험한 세상이라는-차가운 눈발을 막아주고 있었던 것이다. 알에서 깨어나 건강한 새끼로 부화 되는 확률이 20%로 출점에 서기까지 나를 지켜주고 있었던 것이다. 당신의 품을 떠나려는 딸자식의 첫걸음을 걱정 어린 눈빛으로 지켜주던 아버지를 원망만 했던 나는 한 마리 철없는 새끼 펭귄이었다.

 

엄마가 떠난 지 십 년이 넘는다. 엄마 병시중 9년으로 지친 아버지 몸에 회복보다 먼저 아흔이라는 고령의 굴레가 씌워져 날로 안타깝기만 하다. 그러다 얼마전 부터인가 여자 친구가 생긴 것이다. 엄마가 떠나고 자식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 의연한 척 했지만, 혼자 산 세월이 힘드셨을 것이다. 가끔 찾아가는 동생과 나의 행동이 어찌 흡족할 수 있었을까. 늘 남산으로 온양으로 전국을 방랑하다 인연을 만든 것 같다.

 

마침내 늙은 수컷 펭귄이 휴식을 취하려고 한다. 오랜 세월 맹추위 속에서도 꿋꿋했던 가장과 부성의 멍에를 벗어던지고 너른 바다로 훌훌 말년의 여행을 떠나려고 한다. 새 친구와 함께. 그런데 자식이라는 이름으로 동생과 내가 아버지의 여행길을 우려하고 있다. 아니 막아서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아버지와 새 친구의 나이가 너무 차이 난다고. 백 세를 바라보는 노인에게 접근한 자체가 절대 순수한 의도가 아닌 것 같다고. OECD 국가 중, 우리나라가 가장 높다는 노년의 우울과 고독사를 생각해 본다. 한편으로 아버지의 새 친구가 아버지를 궁지로 몰아넣는 사람이 아니길 간절히 바라도 본다. 그러면서도 노인의 외로움을 이용한 매스컴의 사기 사례들이 떠오르면 문득문득 아버지가 불안해진다. 외로움에 보태준 거 있냐는 역정에 조심하시라고 했다가 부녀지간에 불편해진 시간이 속절없이 흐르고 있다. 과연 나는 아버지의 여행을 참견할 자격이 되는가. 낡은 비디오 테이프를 되감으면, 끼니를 거부하며 금족령에 시위할 때 노심초사 나를 염려하던 아버지를 만난다. 아빠 펭귄의 발등 같았던 당신의 따스한 가슴, 그 가슴에서 토해낸 펭귄 밀크 같은 눈물로 내게 일깨움을 먹여주셨던 나의 아버지. 이제는 당신의 촉박한 여생을 위해 미력이나마 내 발등을 내드려야 하는 것은 아닐까? 지겨운 감기를 털 듯 알량한 파심을 탈탈 털어내고 당신의 바다를 향한 마지막 날갯짓에 흔쾌히 박수를 보내야 하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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