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과 그늘 / 박용수

 

벚꽃이 만발한 초사월, 아파트 주변은 온통 꽃 잔치였다.

식당으로 가는 50여 미터의 거리임에도 그는 두 번을 주저앉았다. 푹신한 소파, 아니 그냥 딱딱한 나무 의자도 아닌 길바닥에 텁석 주저앉은 것이다. 그가 앉은 길 위에는 벚꽃이 하늘거리며 꽃눈 개비를 토해내고 있었다.

식당 문 앞에 이르러서는 급기야 토하고 말았다. 나는 거대한 고목이 쓰러지는 것을 느꼈다. 그 여름 매서운 태풍에도 굳건했던 당산나무가 야금야금 파고든 벌레 한 마리에 보잘것없이 넘어지는 것 같은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식사를 취소하고 부랴부랴 커피숍으로 장소를 변경했다. 그를 부축하고 자리에 앉히는 동안 헐렁해진 소매와 기력이 빠져나간 가벼운 팔의 움직임을 감지했다. 다행스럽게 자리가 안정되었는지 분위기가 그랬는지 따끈한 차 한 잔이 그나마 기력을 회복시켰는가 보다. 그는 쉴 새 없이 그동안의 병원 생활, 즉 자신의 병이 희망이 없지 않다는 것과 의사나 간호사가 들려준 이야기를 재해석해서 설명해 주었다.

사람은 배만 고파지는 것이 아님을 알았다. 그는 말이 고팠는지 시종일관 이야기를 했다. 나는 열심히 귀를 빌려주었다. 그는 설교를 하는 목사처럼 대학의 강사처럼 말을 쏟아냈다. 제 몸에 갇혀 있었던 말들이 둑 터진 봇물처럼 쏟아져 나왔다.

병원에서의 생활, 그리고 자신의 병의 진척 정도, 앞으로 자신에게 펼쳐질 몇 가지 가정들은 모두 자신에 관한 것이었다. 나는 이미 그 아내의 이야기를 통해 조금은 그의 병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는 왜 그 이야기를 해주고 싶었을까. 그리고 나는 왜 그 어느 때보다 더 진지하게 그의 삶을 존중하고 경청했을까.

꽃이 피기는 어려워도 지기는 쉽다던 말을 믿지 않는다. 나는 꽃이 짐으로써 잎이 나고 열매가 맺히는 과정을 존중한다. 구태여 꽃일 필요는 없다. 잎이어도 좋고 열매여도 좋다. 나무에는 같은 생의 주기일 것이다

그를 바래다준 아파트 앞에 동백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꽃그늘 아래서 그는 제 고향 강진 백련사 아기 동백 이야기를 했다. 그 동백에 비하면 교합종인 아파트 앞 동백은 형편없이 크고 형편없이 향기가 없으며 그마저 일찍 떨어져 지저분해진 꽃임이 분명하다. 그가 아기 동백의 이야기를 한다는 것도 그 수난만은 애잔하고 씁쓸했다.

나는 말이 별로 없는 편이다. 그렇다고 아주 말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대신 나는 늘 나에게 말을 하곤 한다. 나는 늘 함께 하기를 좋아한 나를 설득하곤 했다. 고독과 친해져야 한다고 말이다. 익숙해져야 할 친구, 진짜 친구는 바로 나밖에 없다고 매정하고 타인과 결별을 촉구하기도 했다. 오직 나밖에 없다는 또 다른 나에게 말 걸기를 통해 혼자의 기쁨을 만드는 연습에 골몰해왔다. 어린아이들이 걸음마를 걷듯 나도 이제 제2의 걸음마를 시작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운 좋게 내가 먼저 떠나면 좋겠지만, 세월이 가면 하나 둘 내 곁을 떠나갈 것이다. 설혹 있다고 해도 다리에 힘이 풀리고 눈도 희미해지면 오가는 것도 불편해질 것이다. 종국에 왕래가 뜸해질 것이고 어두컴컴한 방 안에 혼자 있을 시간은 더욱 많아질 것이다. 혼자 있다는 것은 내면의 무수한 갈등과 싸움이란 뜻이다. 보이는 적보다 보이지 않는 내전을 치르는 것처럼 참혹한 전쟁도 없다. 기다림이건 고독이건 나는 나와의 답 없는 전쟁을 해야 할 것이다.

삶은 한순간도 휴전이 없었던 것 같다. 젊은 시절, 상대방과 싸우는 전토는 그나마 쉬웠던 것 같다. 하지만 혼자 남았을 때, 내 안에 적을 향해 총을 난사하고 백병전으로 피투성이가 되었을 때도 나는 죽지 않았다.

꽃이 지면 무성한 그늘이 만들어진다. 나도 살면서 내가 만들어낸 수많은 가지들이 만들어낸 그늘에서 말 걸기에 열중한다. 고독은 슬픈 것보다 황홀한 것이다. 스스로에게 말 걸기에 더욱 열중해야 할 것 같다.

나는 그처럼 아직 뼈에 저리도록 아프지도 않았고 생명에 위기를 느끼지도 않았다. 역시 그처럼 절절한 고독을 느끼지도 않았다. 이제 그가 떠나면 진짜 말할 친구 한 명이 또 떠나는 것이다. 나는 더 나와 친해져야 한다. 내가 더 절실하고 나에게 말을 걸어야 할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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