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오는 길목에서 / 김추리

 

 

봄이 오는 길목, 꽃샘잎샘 바람이 분다. 느닷없이 북쪽 하늘이 깜깜하고 찬바람이 몰려오는가 싶더니 후두둑 비까지 달려와 쏟아진다. 사나운 사람 성질부리듯 하는 날씨에 오싹 한기가 든다. 느닷없는 바람에 매화꽃이 사방으로 나부끼며 꽃보라를 친다. 비는 함성처럼 다가와 한참을 머물더니 우우우~ 패거리들 몰려가듯 자리를 떴다. 마치 뒤끝 없는 성깔 사나운 사람을 본 듯 어안이 벙벙하다.

겨우내 꽃눈 키워 우아하게 벙글었던 목련꽃이 속절없이 떨어져 나무 아래가 하얗다. 야박하기도 하지. 아름다이 피운 꽃들을 이렇게나 매몰차게 짓밟고 가다니.

퇴근시간에 비가 몰려갔던 길을 따라 바람만바람만 걷는다. 거리엔 아직 비 온 뒤 서늘한 바람이 남아 옷섶을 여미게 한다. 계절이나 날씨와 관계없이, 참새가 방앗간을 지나칠 수 없듯이 덕진공원으로 발길을 옮긴다. 옆문으로 들어서니 길바닥에 작은 솔방울 같은 열매가 즐비하다. 무슨 열매가 이렇게 앙증맞고 예쁠까 생각하며 대여섯 개 주워들고 올려다보니 메타세쿼이아가 우두커니 서 있다. 순간의 비바람에 열매를 빼앗긴 키다리 나무가 온몸이 젖어 울먹이는 것만 같다.

공원 안으로 들어가니 여기저기 나무 아래 매화나 목련꽃같이 봄을 서둘러 핀 꽃들이 몽땅 떨어져 바닥에 널브러져 있다. 짓궂은 바람 탓이 저절로 나온다. 그러거나 말거나 연못가 실버들은 가닥가닥 봄물을 머금고 늘어져 살랑인다. 저리도 가늘고 여린 실가지가 찬바람에 얼지 않고 겨울을 버티더니 천둥벌거숭이처럼 불어닥친 비바람도 잘 견디었구나.

요즘, 연못이 봄맞이로 바빠 보였다. 지난여름 수만 송이 연꽃들이 촛불처럼 피어올라 장관을 이루더니, 가을 언제부터 몸 색을 갈색으로 바꾸고, 겨울엔 꽃대와 잎줄기를 꺾어 기하학적 모양으로 온 연못에 전시관을 차렸다. 그러더니 봄이 오는 기색을 알아챘는지 제 몸을 물속 땅에 뉘이며 의연하게 봄갈이를 하고 있었다. 바짝 마른 줄기가 어떻게 봄기운을 느낄 수 있는 걸까. 과학처럼 오차 없는 자연의 이치에 놀랍기만 하다.

그렇구나. 봄에 비바람이 치는 것도 다 이유가 있었구나. 문득 자연의 흐름에 헛된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고맙기도 하지. 꽃잎이 수북이 떨어졌지만 금방 핀 꽃들은 바람이 아무리 흔들어도 떨어지지 않았지. 메타세쿼이아가 새 잎이 나와야 할 때까지 차마 열매를 떨어뜨리지 못해서야 되겠는가. 씨앗을 바람에 날린 빈 열매는 이제 그만 떨어져 새싹을 틔우도록 해야 하는데 나무에 죽치고 매달려 있었으니.

어미가 된 큰딸은 모유 수유를 딱 육 개월만 하겠다고 당차게 말했었다. 그러나 돌이 지나고도 반년이 다 되도록 젖을 떼지 못한 채 제 자식과 젖 뗄 날 약속을 한다. 몇 월 며칠까지만 먹기로 약속을 하면 그 즈음에 아기가 열이 나곤 하여 저절로 약속이 서너 번이나 미뤄지고 있는 중이다. 서로 애를 먹는 딸내미와 외손녀를 떠올리니 애처로움이 더한다.

젊은이들이 제때에 일자리를 찾지 못하거나 결혼을 미룬 채 자립하지 못하고 부모에게 의존하는 경우도 있다. 취업이 어렵고 소비성향은 점점 높아져 캥거루족이니 니트족이니 생소한 말이 생겨난다. 그런 자식을 남 보듯 할 수 없으니 헬리콥터 부모라는 말도 생겨 실태를 짐작하게 한다.

그러고 보니 오늘 같은 봄날에 갑자기 몰려오던 깜깜한 구름과 거친 비바람이 불어야 하는 것은 자연의 이치인 것 같다. 봄이 다 오도록 차마 떨어뜨리지 못한 열매들을 세찬 손길로 흔들어 떨어뜨려준 바람에게 오히려 감사할 일이 아닌지 모르겠다. 봄이면 잔정머리 없이 불던 꽃샘잎샘 바람에게도 그만한 소임이 있었구나 생각하니 오후 내내 얄밉게 느껴지던 비바람에 오히려 고마움이 일고, 바람에 두들겨 맞아 짠하게 보이던 것들이 도리어 기특하게 보인다.

찬란한 봄을 맞으려면 찬비 몇 바탕 뿌리고 찬바람 몇 차례 불어야 한다는 걸 새삼스레 떠올린다. 사월에 느닷없는 폭설이 내리기도 한다. 시련의 아픔이 있어야 사랑이 여물듯 올해도 아름찬 봄이 열리겠다. 묵은 열매 떨어졌으니 새 잎이 돋을 것이다. 그 자리에 더불어 꽃이 피고 새 열매가 맺히겠지.

비 그치고 하늘이 떠들자 공원에 사람들이 하나 둘 거닐기 시작하고, 솜사탕 장수도 수레에 갈무리했던 짐을 다시 열고, 접었던 파라솔을 편다. 언제 비가 왔냐는 듯 연못에 석양이 길게 눕고, 늦게 핀 목련들이 더욱 환하게 빛을 낸다. 오리, 물닭, 원앙도 부지런히 노닌다. 일찍 물오른 나무들은 제각각 봄의 색깔로 공원을 꾸민다. 동지가 지나자 점점 길어진 해가 서녘 하늘에 머물러 연못을 비춘다. 봄 물결이 새롭게 반짝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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