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창 / 정은아

 

 

내 방에 누우면 봉창이 보였다. 손이 닿지 않는 천장 가까이에, 스케치북 크기의 불투명 유리창. 여러 겹의 비 닐이 덧대어져 바람도 빛도 거의 들어올 수 없었다. 봉창은 통할 수 없는 창이었다. 그 아래는 어둠에 먹히고, 불안으로 채워진 자리다. 가만히 누워있으면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와 말소리가 들려왔고, 그림자가 어른거리다 사라졌다. 때론 봉창 앞에서 잠시 서성이다가 가는 사람도 있었다. 봉창에 대한 단순한 호기심이었을까. 실체를 볼 수 없기에, 내겐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멀리서 들려오던 뜀박질 소리가 가까워지다 봉창 앞에서 멈추면, 뭔가가 봉창을 뚫고 달려들 것만 같았다. 그럴 때는 언니를 쳐다봤다. 붙박이처럼 책상에 붙어서 무언가를 적고 있는, 언니의 뒷모습은 의연(依然)했다. 스탠드 불빛 아래에 펼쳐진 언니의 세계를 깨고 싶지 않아, 조용히 다른 방으로 갔다.

 

오빠 방에도 창이 있었다. 창문을 열면 계단과 옆집 담벼락이 보였다. 담벼락 아래쪽과 계단 사이에는 자그마한 잡초들이 자랐다. 언제나 거기에서 어떻게든 틈을 비집고 커갔다. 풍족하지 않아도, 자기가 발붙인 곳에서 서서히 몸뚱이를 키우고 꽃을 피웠다. 빛을 향해 고개를 들고 바람이 부는 대로 일렁거렸다. 가끔 방향을 알 수 없는 위쪽 어딘가에서 쓰레기가 날아와도, 잡초는 군말 없이 제 삶을 살았다. 난 그리 크지 않은 작은 창이 좋았다. 내가 볼 수 있는 세상은 작아도, 바깥과 통할 수 있는 곳이었으니까.

 

오빠 방은 다른 세계로 통하는 창이기도 했다. ‘HAM’이라는 아마추어 무선통신기기와 컴퓨터는 별세상이었다. 오빠가 무선기기를 켜면 ‘치직치직’ 소리가 났고, 암호를 대듯이 영어와 숫자가 섞인 닉네임을 서로 주고받으며 대화를 이어갔다. 야밤에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할머니는 간첩이 사는 줄 알겠다며 오빠를 야단치곤 했다. 나는 ‘치직’ 대며 누군가를 찾아가는 신호음이 좋았다. 컴퓨터도 오빠의 애장품 중 하나였는데, 오빠는 컴퓨터 본체의 배를 갈라 들여다보곤 했다. 땜질한 판들과 편편한 줄들이 어수선하게 꽂혀 있었다. 오빠는 틈만 나면 부속품을 빼고 꽂으며 컴퓨터 뱃속을 탐험하고, 모니터의 까만 화면에 글자를 부지런히 입력하기도 했다. 모뎀의 연결 소리는 외계 세상과의 교신 같았다. 타닥타닥 키보드 자판을 두드리며, 통신으로 연결된 상대와 대화를 주고받았다. 오빠가 없을 때, 나도 슬쩍 검은 창을 두드렸지만, 나에겐 열리지 않았다. 나는 미숙했다. 아직 창을 어떻게 열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커갈수록 창이 조금씩 열렸고, 나의 꿈도 조금씩 세상을 향해 뻗어나가고 있었다.

 

새로운 창이 생겼다. 오빠가 공사판에서 땀 흘려 일해 마련했다. 나는 오빠 방에 몰래 들어가 새로 생긴 창을 열곤 했다. 빳빳한 종이 케이스에서 까만 원반 하나를 꺼내, 블록을 끼우듯 은색 기둥에 원반 구멍을 맞춰 끼웠다. 나이테처럼 새겨진 동심원들이 빙글빙글 돌았다. 숨을 죽이고 기다란 막대를 들어 올린 후, 원하는 포인트에 살짝 내려놓았다. 음악이 물결치는 호수에 낚싯대를 드리우면, ‘지직’ 신호가 왔다.

 

Hey Jude, don't make it bad.

Take a sad song and make it better.

- The Beatles <Hey Jude> 중에서

 

바늘이 원반 위의 홈을 따라 돌았다. 내 마음도 서서히 블랙홀로 빠져들 듯이, 음악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케니지의 <Going home>을 들을 때면, 햇살이 눈부시게 스며들던 고향집 대청마루에서 엄마가 나를 반겼다. 이글스의 <Hotel California>를 들으면 야자수로 둘러싸인 이국적인 호텔 창을 활짝 열었다. 사이먼&가펑클의 <The sound of silence>를 들으면, 내게 속삭이듯 다가오는 목소리로 마음을 다독여줬고, 아바의 <Dancing Queen>을 들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때 나는, 꿈꿀 내가 필요했다.

 

스마트폰으로 조지 윈스턴의 <December> 음반을 찾았다. 재생창이 열리고, 미로처럼 꼬인 기억이 음악에 맞춰 풀어진다. 피아노 선율 사이 사이에, 내가 못처럼 군데군데 박혀 있다. 15살의 내가, 중년이 되어버린 나를 바라본다. 자잘한 주름, 살면서 겪은 생채기 몇 군데, 점점 느슨해지는 생각, 갈비뼈 사이를 파고드는 공허. 나는 생이 흐르는 대로 차곡차곡 쌓여 만들어지고 있다. 그동안 어떤 일은 꿈처럼 이루어졌고, 어떤 일은 시도조차 하지 않고 포기했다. 한 사람을 만나 미련하게 사랑했고 쓰라리게 이별했다. 이제 난 무슨 꿈을 꿔야 하는 걸까. 여전히 불안을 곁에 둔 채로, 가끔 작은 창을 연다. 항상 열 수 있어도, 마음은 열기 힘든 창 앞에서 머뭇거린다. 어렵사리 게워낸 글이 적힌 창에, 다음 걸음을 재촉하는 커서가 쉴새 없이 깜빡인다. ‘머무르지 말고 한 걸음씩 걸어가.’ 나는 작은 창 안에서 호흡을 가다듬으며, 오늘과 내일과 어제를 천천히 밀고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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