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으로 글을 씁니다만 / 김인선 - 제5회 좋은수필 베스트에세이10 최우수상

 

 

미리 고백하자면 나는 오랫동안 현실에 눈이 어두운 사람이었다. 많은 일에서 늦되었고 욕심이 없었으며 두문불출 혼자 지내는 일도 달게 받아들이는 체질이었다. 그해 늦은 가을 숲으로 드는 입구에 덩그러니 서 있던 이 공간을 마련한 것이 내 생애 유일한 현실감각이라할 것이다. 엄연히 카페라는 정체성을 가진 건물을 공개입찰을 통해 임대한 것이지만 내 두뇌사전은 입찰이나 임대 같은 단어와 친숙하지가 못하다. 그 '입찰' 결과 머릿속은 당장 외딴 성의 성주로 포맷되었고 한 리어카 분의 책을 부렸을 때는 소로우(H.D.Thoreau)의 문장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나의 거처는 사색을 위한 곳으로뿐만 아니라 진지한 독서를 하기 위한 곳으로서도 그 어느 대학보다 나았다."   *소로우의 《월든》 속 구절

 

책만큼 꽉 채울 어떤 것도 갖지 못했던 나는 늦되고 외롭던 습성 그대로 여기까지 온 것을 자축하고 싶었다. 비록 진지한 독서는 단 하루도 할 수 없었지만 그날 이후 내 모든 외로움은 짝을 찾아 날아오르게 되었다. 그것은 끼리끼리 만나면 외롭지 않다는 말 같았고 외로움도 즐기다보면 이로움이 된다는 말처럼 들렸다.

 

'외로움은 이로움'

 

산자락 아래 365일 문을 여는 '낭만북카페'를 구상하고 처음 머릿속을 맴돌던 이름은 '소로우'였다. 문명을 등지고 원시적인 삶으로 스스로를 유배시킨 소로우가 산책과 독서와 글쓰기로 라이프스타일을 구축했단 것이 내가 추구하는 삶인 것도 같았다. 거기다 눈앞에는 '월든' 호수를 연상시키는 하천이 호수처럼 펼쳐져 있다. 사람과 사람 사이 시냇물 하나 사이에 둔 거리는 얼마나 운치 있는가. 이곳이라면 기꺼이 유배되어 산책하고 독서하고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끊임없이 솟던 기묘한 예감과 소로우, 하고 부를 때 마찰음이 빚어내는 소슬한 바람소리들, 어떤 것은 이름만으로도 음유시인이라 하였다.

 

'소로우:소슬바람, 이슬露, 비雨'

 

내가 사랑한 소슬바람이 이슬로 비처럼 오신다는 말간 말놀이는 가벼운 홀로의 즐거움이다. 세상은 그런 류의 가벼움에 대해 잎겨드랑이가 가려운 낙엽처럼 웃었다. 자주 주인이 바뀌었거나 오랫동안 불이 꺼져 있었다는 과거의 수식어는 이상하게 더 매력적으로 와닿았다. 그래야만 가능한 세계관이 있다. 아무도 가라 하지 않은 곳을 굳이 찾아가는 바보, 생애 처음으로 사치스런 건물 하나를 얻은 날 나는 홀로 울었던가. 적막 속에서 희미하게 서리가 내려앉는 기적처럼 가늘게 기뻐했다.

 

'책 읽는 눈 운동을 좋아하는 게으른 여행주의자'

 

소로우가 콩코드 숲속에서 산책하고 독서하고 글을 쓴 시간은 2년 남짓이었다. 사람들은 내게서 글 쓰는 사람을 상기시키려 했지만 정작 내 몸은 글 쓰지 못하는 사람으로 담금질되고 있었다. 쉬는 날을 정하지 않았지만 산책과 독서와 글을 쓰는 일이 쉼이 되었다. 암울한 코로나의 지배가 세상의 문을 닫아걸기 이전에 또 다른 세계로 들어서버린 자폐의 시간이었다. 어디론가 떠나가는 차량 행렬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멍의 시간이자 어디로도 갈 수 없는 위리안치 상태에서 세상은 자주 격리되었다.

사람들 사이에 유배지가 생겨날 때마다 몸을 움직여 흙을 더듬는 일에 몰두하였다. 꽃과 화분이 따로 놀지 않도록 섬세하게 관리하는 것이 내 소꿉살림의 비결이라 여겼다. 내게는 그것이 가을 한철 뛰어 논 이 공원의 소슬바람 같아서 여행은 글렀고 책은 성글어진 시력 탓에 보다말다 하여도 마음만은 글밭이라 여겼다.

 

"매일 행복하진 않지만 행복한 일은 매일 있었다." *애니메이션 '곰돌이 푸'의 대사 인용.

 

스스로를 정직한 육체노동자로 규정한 사람은 안다. 세상에 쓸모없는 재능은 없으며 이 세상 자체가 이미 매력적인 '글터'라는 것을. 이 얼마나 탐미적인 활동인지 사람들은 아직 모르는 눈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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