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 / 김이랑

 

 

하루 쟁기질 마치고 돌아와 거울 앞에 앉는다. 반백 머리칼에 눈가에 주름 몇 줄, 사내 하나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너는 누구냐. 왜 여기 있는가. 외롭지 않느냐고 넌지시 물으면 사내도 되물어온다. 둘은 같은 질문에 같은 대답만 되풀이하다 피식 웃음 짓고 만다.

 

아침이면 햇살 받아 입고 세상으로 나간다. 한데 모여서 일하고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춘다. 다시 흩어져 걷다가 문득 하늘을 보면 망망 암흑 바다에 떠있는 별들, 별을 등지고 집으로 돌아와 거울 앞에 앉으면 또 섬, 섬이기 싫어 바깥으로 나가지만 되돌아오면 섬이 되는 일상을 되풀이한다.

 

서로 외롭지 말자고 섬과 섬이 만난다. 섬과 섬은 섬을 낳고 섬은 섬이 되기 위한 걸음마를 연습한다. 섬을 떠난 섬은 삶의 바다를 항해하다가 섬을 만난다. 섬과 섬은 모여서 무리를 지었다가 뿔뿔이 흩어진다. 하나의 해역에 모여 다도해는 되어도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는 섬, 삶의 바다에는 파도에 떠밀려 표류하다가도 언젠가 섬에 닿는다.

 

많은 사람과 만나고 헤어졌다. 아랫목에 옹기종기 모여 몸을 부대끼던 섬들은 제 갈 길로 떠났고 지금은 가끔 모여 그 시절을 이야기한다. 어떤 이들은 꽃이 피는 시절 벌 나비처럼 왔다가 꽃이 이울자 미련 없이 떠났다. 또 어떤 이는 벗이라 인연을 맺었으나 머릿속만 헝클어놓고 떠났다. 한 섬을 만나 부부라는 이름으로 하나가 되었으나 그 또한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갈라섰다.

 

외로움에는 반경半徑이 있다. 외로움은 가끔 반경을 재다가 고독에 빠지고, 문득 깊이를 재다가 제 키보다 깊은 절망에 빠진다. 왜 외로워야 하는가. 질문을 수평선 너머로 던져보지만 돌아오는 것은 파도뿐이다. 파도는 잔뜩 성이 나서 달려와 철썩 옆구리를 후려치고 고요한 달밤이면 그 상처가 안쓰러운지 잔잔히 쓰다듬는다.

 

외로움의 영역에도 외로움이 찾아온다. 무리를 따라가지 못한 새가 내려앉아 고단한 날개를 잠시 접고, 뭍을 떠나 떠도는 씨앗들이 활착한다. 먼 항해에서 사나운 바람에게 멱살 잡혀 난파된 배 그 조각들이 밀려와 갯바위에 머리를 부딪치며 서러운 기억을 부순다. 이것들이 없다면 섬은 절대 고독에 빠지고, 풀 한 포기 살지 않는 바위가 되어 누군가의 항해를 노리는 암초가 된다.

 

산하를 떠돌며 표류하다가 외딴 섬으로 들어간 적이 있다. 인연의 끈과 거미줄 같은 통신망을 벗어나 섬으로 떠나는 물길은 내가 섬이 되는 길이었다. 포구에 정박한 배에 올라 거친 물살을 헤치며 한참 달리자 멀리 보이는 점 하나, 점은 점점 커지면서 섬으로 다가왔다. 섬에 올라 주위를 둘러보니 수평선은 나를 중심으로 동그라미를 그렸다. 섬이 되니 내가 세상의 중심이었다.

 

섬은 드러난 것보다 숨은 것이 더 많다. 내가 알 수 없는 무언가는 바람이 부는 날이면 떠올라 마음의 바다를 온통 흔들어놓고 다시 가라앉는다. 그것은 심연을 휘저으면 부유하는데, 수평선을 넘어가는 그리움이기도 수평선을 넘어올 누군가를 향한 설렘이기도, 그마저 없을 때는 저녁노을을 보다가 울컥 솟구치는 설움이기도 하다.

 

내 안에서 사는 것들이 있다. 그것들의 습성은 다양하다. 부드러운 그것은 연체동물처럼 흐느적거리고 발랄한 그것은 간질이면 깔깔깔 웃음보를 터트린다. 겁 많은 그것은 갑각류처럼 단단한 방어막 속에서 숨을 쉬며, 까칠한 그것은 건들면 몸을 움츠리며 가시를 세운다. 꼿꼿한 그것은 밟히면 몸을 부르르 떨고, 숫기가 많은 그것은 자극을 받으면 맥박이 빨라진다. 섬뜩한 그것은 먹이를 보면 눈을 부라린다.

 

한때는 대륙의 멱살을 흔든 광개토廣開土의 호령을 꿈꾸었다. 나태의 뺨을 때린 콜럼버스의 모험도 동경했다. 그마저 자신이 없으면 붓다가 깨달음을 얻은 오체투지의 길로 귀의를 기웃거렸다. 광대한 속세를 지배하는 호걸이든 신세계를 발견하는 모험가든 홀연히 깨달음으로 떠난 수행자든, 혼자 자신과 마주하면 누구나 삶의 바다에 떠있는 외딴섬.

 

섬에, 외딴섬에 가고 싶다. 그 작은 영토에 가서 밤새 알 품은 새에게 넌지시 말 걸어보고, 벼랑 움켜쥔 풍란의 어깨를 토닥거리고, 파도에 살 비비는 몽돌과 조개의 몸짓에 귀 기울이고, 심연에서 몸 뒤척이는 학명미상學名未詳 생물체, 그 맥박을 가만 짚어보고 싶어서.

 

<수필 오디세이 2022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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