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꾸는 아지트 / 허정열

 

 

머리가 복잡할 때 구석방에 오래 머문다. 넋 놓고 멍하니 지친 몸을 놓으면 품속에 꼬옥 안긴 듯 편안하다. 몇 날 며칠 게으름을 부려도 잔소리 없이 지켜봐 주는 곳.

새로운 것을 시도할 때, 나만의 색깔이 필요할 때 구석방의 힘을 빌린다. 가끔 그곳에 널브러진 자신과 마주할 때가 있다. 구석구석 물건으로 가득차 있지만 아늑하고 편안한 모습으로 그윽하게 눈을 맞춰 준다. 많은 말을 쏟아내도 무릎을 낮추고 온몸으로 경청해 준다. 삶에 지쳐 돌아누울 때 새로운 온기를 채워주고, 혼돈으로 방황하고 고독이나 우울감에 빠져 있을 때 새로운 의지를 안겨준다.

뿌리내리지 못한 생각을 발효시키기 좋은 온도를 가지고 있다. 복잡한 생각이 종횡무진 질주해도 행간이 짧아 정리하기 좋은 곳이다. 묵언 수행자처럼 은근한 기다림으로 누군가의 배경이 되어 줄 준비가 되어 있다. 후회나 반성이 넘쳐도 궤도를 이탈하지 않게 막아주는 힘이 있다.

생각을 정리하기에 이보다 좋은 적소가 있을까. 과거에 의존해 있는 나를 해체해 현재로 이끈다. 흔들리는 눈빛과 심장을 안정시켜주고 단단하게 여민 가슴도 이곳에 오면 무장해제 된다. 여유로 넓혀진 공간에서 미래까지 꿈꾸게 한다. 이곳에선 어린아이처럼 엉뚱한 상상을 즐겨도 좋다. 꿈꾸는 방에서는 새로운 도전에 겁먹지 않는다. 기억을 풀무질하고 참담함을 보고도 한숨짓지 않으며 현실과 미래 사이를 저울질하지 않는다. 비바람이 결을 세워도 끄덕하지 않는다.

결별한 시간이 모여 있지만 너른 세상에서 갖지 못한 다른 촉감을 느낄 수 있다. 막막한 대상을 향한 신선한 눈을 선사하는 구석방은 거절을 몰라 계절이 바뀌어도 복잡하지만 차분하다. 기다림을 허락하고 제값을 할 수 있도록 배려와 지지를 아끼지 않는다. 계급이나 신분의 귀천을 따지지 않고 막살다간 사람의 뒤를 캐지 않는다. 무수한 계절 앞에서도 중심을 잃지 않는 원동력은 초심이라고 속삭여 준다.

모시는 것보다 함께하는 것을 좋아해 낮은 자세로 대한다. 각이 선 날카로움보다 부드럽고 유연함이 있어 권위나 체면을 구길 염려가 없다. 언제나 같은 몸짓으로 화려함을 갈구하지 않는다. 늘 한결같이 겸손하고 부드럽다. 잘남보다 부족함을 더 반기는 수더분함은 무모한 도전도 꿈꾸게 한다. 스스로 제 길을 찾아갈 수 있도록 안전과 편안함으로 예를 갖춘다. 기약 없는 기다림이 지루해도 먼저 하품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구석방은 작지만 초라한 이름에도 의연하고 품이 넓다.

커피 한 잔의 향에도 쉽게 취해 화를 삭이는데 안성맞춤이다. 사방에 책이 있어 헐렁한 생각의 뼈대를 단단하게 조이기도 하고 허기진 가슴을 채우기에 좋다. 그래서 그곳에선 친밀감이 형성되고 자신만의 진솔한 화법이 통한다. 지금은 이곳의 단골이다. 뒤틀린 내 삶의 구조 변경도 늘 가능하다. 서릿발 같은 감정의 경계를 허물고 나올 때는 이미 봄이 닿아 있다. 낭비한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뻣뻣한 어깨가 풀리고 봄바람처럼 몸이 가벼워진다. 낯선 풍경을 말없이 품고도 늙을 줄 모르는 아지트. 추억의 창고이며 내 삶의 온도를 조절하는 곳이다.

변덕이 심해도 너그러이 바라봐 주는 곳. 허기진 마음이 기대어 살아가는 이 방은 구조 변경 주문으로 늘 분주하다. 생각을 쉬게 하고 헝클어진 삶을 가지런하게 다듬을 수 있는 곳에는 나만의 비밀이 빼곡하다. 삶의 무게에 눌리지 않게 중심을 잡아주는 아지트. 출입이 자유로워 언제든지 찾아가 머물 수 있는 곳에는 꿈을 꾸는 나만의 수다가 아직도 두런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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