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처럼 말해요 / 김용삼

 

오랜만에 만난 사람 사이에는 반가움의 깊이가 서로 다를 때가 있다. 단절의 간극이 십 년 단위를 넘어서면 재회의 끝에는 공연히 만났다는 씁쓸한 후회가 밀려오기도 한다. 한 동네에 탯줄을 묻은 동무이거나 중ㆍ고등 사춘기를 공유했던 친구를 수십 년 만에 만나게 될 때는, 오랜 시간 각자가 살아온 삶을 알지 못하니 공감보다 난감할 때가 더 많다.

천둥벌거숭이로 여름갯가를 활보하던 불알친구라면 긴 공백의 서먹함이 덜할지도 모른다. 나와 그들의 유년은 수식어를 덜어낸 동화 같은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춘기 시절의 친구와 재회할 때면 기억의 밑바닥에 놓인 모난 돌부리 하나가 되살아나 언제나 곤혹스러움이 앞섰다.

H를 만났을 때가 그랬다. 중ㆍ고등학교 동창인 그는, 대학을 달리하면서 자연스럽게 잊힌 인연이었다. 졸업 후 어느 통신사에 입사하여 국제부 기자로 잘 지낸다는 소문이 내가 알던 그의 전부였다. H가 정년퇴직을 했다며 동창회 커뮤니티를 통해 소식을 전했을 때 첫사랑을 재회한 듯 잠시 설레기도 했다. 하지만 다시 만난 우리에게 반가움과 설렘은 그야말로 잠깐에 불과했다.

“우리가 얼굴 마주한 지 사십 년이 넘었지? 자네는 나잇살만 빼면 그때 그대롤세.”

H 역시 세월의 흔적만 소거하면 변한 건 없었기에 우리는 의례적인 안부를 묻고 흔한 덕담을 나누었다. 하지만 그 자리가 한순간에 얼어붙은 건 H의 말 때문이었다.

“근데 자네, 이제 말을 더듬지 않구먼, 그려?”

열다섯 그때 나는 심한 말더듬이였다. ‘벙어리 삼룡이’가 중학 시절의 내 별명일 정도였으니…. 입은 낱말들로 가득했지만 말이 되어 나오지 않아 침묵하던 나에겐 꽤 적합한 호칭이었다. H의 기억에 남아있는 나는, 선생님께 호명되었지만 국어책의 ‘소나기’를 한 줄도 읽지 못하고 고개만 숙인 ‘벙어리 삼룡이’일 뿐이었다. 수십 년 만의 만남이 난감함으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뒷산 너머 해가 뜨고 온 동네가 하루의 시작으로 벅적거릴 때면 늘 바라던 소원이 하나 있었다. ‘오늘은 말을 할 일이 없도록 해주세요.’ 하지만 수업 종이 울리고 선생님의 지휘봉이 교실을 몇 번 휘젓고 나면 그 소원은 어김없이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선생님의 눈을 애써 피하며 고개 돌린 나에게 지휘봉은 정확히 꽂혔고 내 이름은 천둥소리처럼 크게 들렸다.

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 속엔 반짝이는 먼지들이 이리저리 부유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내 눈에만 보이는 것 같았다. 모든 아이들의 관심은 말없이 책을 들고 선 나를 향해 있었다. 그들의 얼굴은 호기심으로 가득했다. 이후에 일어날 흥미진진한 상황을 숨죽인 채 기다리고 있었다. 열리지 않는 입 때문에 내가 얼마나 겁을 먹었고 선생님은 또 그런 나를 어떻게 처리할까, 그게 전부였다. 뭔가 말하려 해도 입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내 입속에는 출구를 찾지 못한 소나기의 단어들이 홍수가 되어 휘돌고 있었지만 그런 건 아무도 관심이 없었다.

최근에 『강물처럼 말해요』라는 책을 읽었다. 캐나다 시인 조던 스콧이 쓴 그림책으로 어린이를 위한, 시詩처럼 꾸민 책이다. 스콧은 말이 나오지 않아 울고 싶을 때, 아버지가 일깨워준 방식으로 ‘강물처럼 말을 한다’고 했다. 그도 나처럼 심한 말더듬이라 학교를 가는 게 싫었고 아이들의 시선이 늘 힘들었을 것이다.

 

소나무의 스-가 입안에 뿌리를

내리며 혀와 뒤엉켜 버려요.

까마귀의 끄-는 목구멍 안쪽에

딱 달라붙어요.

달의 드-는 마법처럼

내 입술을 지워 버려요.

나는 그저 웅얼거릴 수밖에 없어요. (中略)

 

스콧의 아버지는 그를 강으로 데려가서, 물거품을 일으키고, 굽이치고, 소용돌이치며 부딪혀 흐르는 강물을 보게 했다. 그러면 스콧은 빠른 물살 너머의 잔잔한 강물을 떠올리고 물결이 부드럽게 일렁이며 반짝거리는 모습도 그려 보았다. 아버지는 그게 강물이 더듬거리는 것이라고 했다. 스콧은 매끄럽고 유창하게 말하는 게 꿈이었지만 강물과 대화하면서 유창하다는 것에 대해 달리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오히려 이렇게 되묻기도 했다.

“여러분이 말하는 방식에 잠시 귀 기울여 보세요. 어떻게 들리나요? 말하는 느낌에 집중해 보세요. 어떤가요? 단어가 몸속 어디에서 느껴지나요? 멈추거나 머뭇거리지 않고 말하나요? 얼마나 자주 실수하고 단어를 잊어버리나요? 아니면 단어를 고르는 데 어려움을 느끼나요? 가끔 말하기 꺼려질 때가 있나요? 가끔 그 어떤 말도 하고 싶지 않을 때가 있나요? 그래서 나는 강물처럼 말하기로 했어요.”

스콧은 다른 방식으로 말하는 자신을 그렇게 설명했지만 열다섯 무렵의 나는 그리 철학적이지 못하였기에 나만의 방식과 노력으로 극복해야 했다. 나도 책을 읽거나 말을 할 때면 단어가 입천장에 달라붙은 듯 첫 단어부터 나오질 않았다.

학교에서 발표를 망쳐 하루가 우울해지면 집에서 멀리 떨어진 갯가 바위를 찾아 바다에 화풀이를 하곤 했다. 그러면서 파도소리에 위로를 받았고 결국 그곳에서 몇 가지 방도를 찾을 수 있었다. 바다를 향해 혼자 말하는 게 머쓱해지면 아무 노래나 흥얼거리기도 했는데, 노래를 부르면 스콧이 힘들어 했던 스-, 끄-, 드-의 단어가 주저 없이 입 밖으로 나오는 것이었다. 노래처럼 운율을 실어 말한다면 그럭저럭 말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때부터 내게는 뜻도 없는 가사의 노래를 혼자 흥얼거리는 버릇이 생겼다.

책을 읽을 때도 소리에 고저高低를 실어보았다. 물론 H를 비롯한 아이들 앞에서 낭독 아닌 낭송처럼 책을 읽을 수는 없었지만, 스콧이 강물처럼 말하듯 나는 노래하듯 말하는 법을 조금씩 알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겁 없이 나간 교내 웅변대회에서 입상을 한 것은 반전의 시작이었다.

아직도 나는 말을 더듬곤 한다. 입천장에 붙어 떨어지지 않는 특정 단어에 음音과 약간의 몸동작을 얹으면 무난히 말은 시작된다. 유창한 편은 아니지만 사람들은 나를 더 이상 말더듬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듯하다. 나는 노래하듯 말한다. 하지만 이상할 것도 없다. 따지고 보면 살아가는 방법도 다들 제각각이지 않은가. 그리고 살아온 궤적 깊숙한 곳에 저마다 이런 비밀 하나쯤은 간직하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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