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마다 감정 상태에 따라 표현법도 다른가 보다. 서로 얼굴을 마주 볼 수 없는 곳에서 메시지 전달은 더 말할 나위 없는 듯하다. 몇 해를 친숙하게 지내던 지인과 하루아침에 불통이 생기니 말이다.

남편과 미국을 다녀오니 전국이 불볕이라 미 서부의 뜨거운 공기와 별반 차이가 없었다. 여독을 풀기도 전에 할 일이 많았다. 자동으로 꺼지기를 반복하던 손전화기를 새것으로 바꾸고 나니 열흘 넘게 물 구경 한 번 못한 텃밭도 돌봐야 한다며 남편은 발길을 재촉했다.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버린 밭을 남편 혼자 해결하기에는 턱없는 일인지라 다른 이의 힘이 필요했다. 예초기 두 대에 시동이 걸리니 곁에서 누가 말을 걸어도 들리지 않을 만큼 소음이 대단했다. 감자를 심어둔 곳에 잡초를 헤집고 보니 말라버린 감자 줄기와 잎이 축 늘어져 벌러덩 누워있었다. 바라보고만 있을 수 없기에 힘을 보태려고 장화로 바꿔 신고 호미와 가위를 집어 들었다. 잡초를 자르고, 뽑아내기도 하면서 고랑을 헤쳤다.

해거름 녘에서야 잡초로 우거졌던 밭이 제 모습을 드러냈다. 얼굴은 벌겋게 달아오르고 땀으로 젖은 옷은 온몸을 눌렀다. 집에서 멀리 있는 밭에는 수도는 있어도 목욕 시설이 없으니 세수만 하고 농기구를 창고 안에 넣고 차에 올랐다.

아파트 주차장에 도착했을 때, 가방에 든 전화기에서 신호음이 짧게 울렸다. 엘리베이터를 타면서 확인해보니 S가 보낸 메시지였다. ‘전화 안 받네요. 그 전화기에는 부재중 전화번호도 안 뜹니까.’라는 글이었다. 밭에서 전화를 받지 못했나 해서 들고 있던 전화기를 살펴보아도 부재중 전화는 뜨지 않았다. 그런데 부재중이라니 의아해하던 순간, 혹시 우리가 미국을 여행하던 중에 S가 전화를 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먼 나라에서 여행하는 동안 하필 전화기에 이상이 생겼다. 그러던 것이 귀국하던 날은 켜지도 않았는데 전화기 겉면이 뜨거워지더니 아예 먹통이 되고 말았다. 저장된 내용 중 일부는 잃을 수도 있다는 서비스센터 직원의 말에 오래 쓰던 전화기는 반납하고 결국 새것으로 사야 했다. 만일 S가 전화했다면 여행 중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S의 메시지에서 약간의 짜증스러운 기미를 알아차리고 일단 S에게 답장을 보냈다. 그간의 내 처지가 그러했다는 것과 지금은 밀린 밭일을 마치고 집에 막 도착했으니 전화는 나중에 하겠다고. 그런데 S가 다시 보낸 메시지를 보아하니 내 생각이 전달되지 않았나 보았다.

‘어디에 있든 중요한 전화야 받겠지요. 전화 씹히는 내 기분은 어떨 것 같습니까. 나 같으면 이런 경우 전화를 하지 문자로 안 합니다. 나는 전화하는데 누구는 문자 보내고, 이 무슨 경우입니까.’

메시지에서 보이지 않는 불통의 기류가 내 머릿속에 찰거머리처럼 달라붙었다. 오해가 깊어진다싶어 섭섭하고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내가 통화를 하지 못하고 메시지를 보낸 이유를 알렸건만 그것이 그렇게 잘못된 것인가. S는 통 나를 믿으려고도, 내 뜻을 수긍하려고도 하지 않으니 답답할 뿐이었다. 샤워부터 해서 땀이라도 좀 식히고 나면 전화하려고 했는데 내 마음을 S는 받아 주지 않았다.

땀을 씻으면서도 곰곰 생각해보았다. 그나마 기다릴지도 모르니 내게 보낸 메시지에 답을 보내어 내 상황을 알린 것인데 너무 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만 차올랐다. 처지를 바꾸어 생각도 해보았다. 만일 내가 누군가에게 전화했다고 가정하자. 그가 전화를 받지 못하고 자신의 상황을 메시지로 답한다고 해서 내가 화를 낼 문제는 아니지 않은가. 과연 S가 화를 낼 일이 당연한 이치인지 처지를 바꿔놓고 생각해도 내 잘못은 없는 터였다.

불통으로 생긴 오해는 참으로 잔망스럽기도 했다. 일단 발동이 걸리면 상대방이 뭐라던 간에 융통성은 찾아보려 해도 찾을 길이 없다. 환한 길로 나오지 못하고 어두컴컴한 우물 속에서 일방적인 생각을 전달하느라 불통의 길을 걸었다. S와 나는 각자 놓인 처지에서 깊은 우물을 파기 시작했다.

S가 메시지를 먼저 보냈을 때, 내가 통화를 했더라면 둘은 불통의 길을 걷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S는 내가 일부러 그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묘한 뉘앙스를 보인 메시지를 먼저 보내지 않았던가. 이미 자신의 잣대로 오해하는 이에게 통화보다는 내 상황을 상세히 알려주기에 메시지만 한 것이 없다는 생각이 앞서서였다. 게다가 S의 성격상 통화로 구구절절 해명하는 것을 듣는 성격은 아니었다. 최대한 상황 설명이라도 해놓는 것이 오해를 없애는 방법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나와는 달랐는지 나의 성의는 물거품 되고 말았다. 위험한 시한폭탄 같은 불통의 메시지가 또 도착했다.

‘모든 건 자기중심 안에서 움직이나 보네요. 곧 있을 행사에 축하할 꽃다발을 전해주려고 날짜 확인 좀 확인하려 했는데 방금 다른 이가 알려주네요’라면서 ‘이쯤에서 접자’라는 S의 일방적인 메시지를 끝으로 받았다.

전화를 받지 못하면 메시지로 안부나 용건을 보내는 것이 요즘 시대에 어색한 일이 아니다. 통화가 어려우면 메시지로 용건을 주고받고, 상황이 되면 직접 목소리를 들으면서 연락하는 일은 자연스레 받아들여야 할 일이다. 내가 메시지를 보내는 것은 옳고, 상대가 메시지를 보내는 일은 그름이라는 편견은 마음에 상처를 줄 일이다. 모두에게 나름의 상황은 있기 마련이다.

불통도 직접 대면하면 웃고 지나칠 수 있는 여유가 생기려나. 그러나 생각은 빗나갔다. 행사장에서 S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S와 내가 속해 있는 모임의 이름표를 달고 있는 꽃바구니가 행사장 한쪽에서 덩그러니 앉아 주인이 데려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생채기는 오래도록 내 마음을 할퀴었다.

불통의 원인이 되었던 것도 둘의 성격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상처받는 말을 유독 싫어해서 오해든 뭐든 그 자리에서 풀어야 직성이 풀리는 나에 비해, S는 본인의 생각대로 말하고 털어내는 단순하고 직설적인 성격이 둘을 갈라놓았다. 진심을 몰라주는 매몰찬 메시지에 상처받고 서운해하는 나와 그래도 통화가 먼저라는 S와의 논쟁은 풀리지 않는 불통의 기류를 타고 주변을 맴돌았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의사소통이 불통일 때가 있다. 마음속의 타협점을 신속히 찾으려면 나를 누를 줄 알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불통의 시간은 깊어질 것이다. 가까울수록 적절한 거리 조정이 필요한 세상이다. 진심이 통하지 않는다면 가던 길을 잠시 멈추는 것도 지혜로운 방법이리라.

전달 수단이 눈부시게 발달한 시대에서 내가 들고 다니는 전화기는 아직도 불통의 연락처 하나를 달고 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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