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탄화 속으로 / 이상수

 

가로등이 하나둘 목련처럼 피어난다. 어스름이 발묵하는 시간, 먼 산이 먹빛에 잠기고 들녘은 천천히 지워진다. 사각의 창문마다 둥근 불빛이 내걸리면 저녁의 품속으로 사람들이 귀가한다.

해가 넘어가는 이맘때쯤이면 영문을 알 수 없는 고독이 밀려온다. 초콜릿처럼 달콤하고 계피처럼 아릿하여 멀미하듯 거리를 표류한다. 무심히 지나가는 사람과 낯익은 상점이며 형형색색의 간판들. 타인 틈에 섞이면 마술처럼 슬몃 내가 사라짐을 느낀다. 그 가만한 스러짐이 좋아 어둠의 발치에 혼자 서 있을 때가 많다.

프랑스에서는 해질녘을 개와 늑대의 시간이라 한다. 사물의 윤곽이 희미해져 언덕 너머로 다가오는 실루엣이 내가 기르는 개인지 해치러 오는 늑대인지 분간할 수 없는 시간이란 뜻이다. 이쪽도 아니고 저쪽도 아닌 모호함, 동료인지 적인지 모르는 일말의 불안, 그런 경계의 허물어짐을 아우르는 것이리라. 우리나라에서는 박모薄暮 또는 땅거미라 부르는 이때, 빛이 사라진 자리에 푸르스름한 이내가 번지면 근원을 알 수 없는 아득함에 젖는다.

낮이 생산의 시간이라면 저녁은 휴식의 시간이다. 해가 떠 있는 동안은 경쟁과 속도와 다툼이 끊임없이 반복된다. 누군가에게 창을 겨누어야 하고 앞만 보고 질주해야 한다. 약육강식의 정글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필사적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저녁이 되면 속도는 느려지고 창은 무뎌진다. 그러면서 슬쩍 서로의 지친 어깨를 연민으로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가끔 고흐의‘밤의 카페테라스’에 앉아본다. 노란 불빛은 처마 끝에서 명멸하고 목화솜 같은 별은 송이송이 시린 무릎 위로 흩어진다.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앉아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눈다. 쓸쓸함을 눈처럼 털어내며 나도 그 나른함 속에 섞인다. 어디선가 쇼팽의 야상곡이 흘러나오고 마음을 파고드는 부드러운 피아노 선율에 하루의 무게를 벗어던지게 된다. 맞은편엔 으레 세계에 대한 우울로 제 귀를 잘라버린 한 사내가 시가를 문 채 물끄러미 허공을 바라보고 있다.

저녁이 유난히 기다려지는 것은 내가 보낸 낮이 너무나 버겁기 때문일 것이다. 매일 그래프가 그려지고 숫자로 평가받는 일은 긴장의 연속이다. 동료의 실적은 순수한 마음으로 축하해주기 어렵다. 상대방과 나를 비교하며 스스로 주눅들 때도 많다. 뒤처지지 않기 위해 나는 얼마나 나를 채찍질했던가? 그것은 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생각해보면 낮 동안 대립각이 컸거나 다른 사람보다 목소리를 높였을 때 더 허전해짐을 느낀다.

아버지는 언제나 땅거미를 지게에 얹고 돌아왔다. 종일 일한 몸에선 아련하게 흙냄새가 피어올랐다. 고요하던 집안이 분주해지는 순간도 그때부터였다. 외양간에 여물이 넣어지고 부엌에선 밥 짓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우물물로 목물하는 아버지 곁에서 엄마는 행복한 표정을 짓곤 했다.

백야는 고위도 지방에서 한여름 태양이 지평선 아래로 내려가지 않는 현상을 말한다. 북극에서는 하지 무렵, 남극에서는 동지 무렵 일어나는데 가장 긴 곳은 육 개월 이상 지속된다. 저녁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편두통을 앓거나 우울증이 생기기도 한다. 아마도 제대로 된 휴식의 시간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누구든 저녁이 있는 삶을 꿈꾼다. 저녁이 없었다면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와 모차르트의 세레나데가 탄생할 수 있었을까. 뭉크는 또 어떻게 푸른 밤을 그릴 수 있었겠는가. 석모도가 그토록 아름다운 노을을 품을 수 있는 것도 저녁 덕분이다. 하루 어느 때고 의미 없는 시간은 없겠지만 내게 있어 이 순간이 더욱 소중한 이유는 욕망을 향해 달리던 낮의 긴장을 멈추어 주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자신을 되돌아보게 하는 고요한 침잠, 만약 낮이 계속된다면 언제까지나 헛됨만 뒤쫓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저녁은 뫼비우스의 띠다. 소멸인 듯 생성이고, 끝인 듯 시작이며, 어둠인 듯 밝음이다. 저마다의 존재들이 스스로 울타리를 지워버리는 자기반성의 시간이다. 한 경계가 다른 경계 속으로 스며드는 지점이기도 하다. 달맞이꽃은 덤불 속으로, 해오라기는 강기슭에, 나무는 숲으로 스며든다. 기쁨은 슬픔을, 따뜻함은 외로움을, 내일은 오늘을 품는다. 멀리 보이는 다리와 가로등과 자동차 불빛과 사람들의 목소리가 서로에게 녹아들어 하나가 된다.

대문간에 기대어 남편을 기다린 적이 있었다. 해는 어슴어슴 넘어가고 등에 업은 아이는 자꾸 보채기만 했다. 회사에 다니던 남편이 느닷없이 실직하고 평생 해보지 않던 일용직을 전전하던 때였다. 어떤 날은 일감이 있었고 어떤 날은 빈손으로 돌아왔다. 언덕 아래서 길게 그림자를 끌며 터벅터벅 걸어오는 그를 바라보면 괜스레 눈가가 촉촉해져 왔다. 그때의 저녁은 벼랑처럼 아득하고 절망적이었다.

강가에 앉아 천천히 저물어가는 하루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풍경 속으로 번지는 어스름은 모든 것을 다 껴안는다. 사랑과 이별, 행복과 불행, 웃음과 눈물까지. 품어서 혼연일체가 된다. 모든 사물이 원래 하나에서 비롯되었다는 듯. 아득하던 시간도 지나고 보니 다 옛일이 되어버렸다.

어스름은 스스로 깊어지는 법을 안다. 높이와 넓이만을 추구했던 욕망이 부질없음을 깨닫는 순간, 먼 것들은 조금씩 곁을 내어준다. 움켜쥐려 했던 손은 늘 비어있고 밖을 향했던 걸음은 어느새 내 안으로 돌아와 있다.‘나는 나를 떠나서 너무 먼 곳을 배회했구나.’하루의 고단함을 발아래 내려놓자 그제야 마음이 고요해진다.

어두워져 가는 강가에서 나를 들여다본다. 강물에 비친 얼굴 하나가 천천히 지워진다. 산 그림자가 스러지고, 조약돌이 사라지고, 가로등 불빛마저도 흐릿해진다. 자신의 경계를 미련 없이 버리는 저 모습이야말로 아름다운 망언사忘言師가 아닐까.

누군가 내 어깨 위에 손을 얹는다. 돌아보지 않는다. 어쩌면 내가 기르는 개일 수도 있고 야성의 늑대일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어느 쪽이든 그 농담濃淡을 받아들이리라. 익숙한 것들은 익숙한 대로, 낯선 것들은 또 낯선 대로. 지금은 그런 이분법들까지 다 허용하는 시간이니.

멀리, 수묵화 걸린 풍경 너머로 저녁이 소실점으로 눕는다.

 

<에세이문학 2022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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