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속을 거닐며 / 원종린

 

 

  '검은 비'라는 작품이 전후 일본의 베스트셀러의 으뜸으로 꼽히고 그다음은 '들불(野火)'이라고 한다. 이렇게 적어 놓고 보니 마치 일본 서적의 선전문 같아서 겸연쩍은 생각이 없지도 않은데, 실은 일본에 파견교사로 가 있는 제자가 앞에서 말한 두 권의 책을 보내주어서 읽을 기회가 있었던 것이다.

 

  이 두 권이 다 값이 싼 문고판이기는 하지만 그 호의가 고맙기 이를 데 없다. 지난날에는 이와나미 문고[岩波文庫]가 일본의 독서계를 풍미했었는데 이번 문고판은 처음 들어 보는 이름들이다.

 

  전후에 저들의 나라에서 출판된 도서도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을 터인데, 그중에서 인기의 서열이 1. 2위라고 하니 적지 않게 호기심이 일었다.

 

  '검은 비'는 일본 히로시마 시의 원폭피해(原爆被害)를 다룬 내용이고, ‘들불’은 2차대전 말기에 비율빈 전선에서 일본의 패잔병이 겪은 참담한 상황을 묘사한 글이다. 두 작품이 다 인간의 극한 상황을 다룬 내용들이지만 문장은 흐르는 물처럼 유려하다. 명작은 역시 내용 못지않게 문장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 같다.

 

  비율빈 전선은 내가 소속되었던 부대의 동료 학도병이 끌려간 곳이기는 하지만 직접 나와는 관계가 없는 곳이다. 그러나 원자탄 폭격은 우리나라 사람들을 포함해서 인명피해가 큰 반면 우리나라의 해방을 앞당겼고, 또 나 개인적으로는 육형(陸刑)에서의 석방과 직접 관계가 있는 일이어서 '검은 비'는 더 많은 관심이 쏠렸다.

 

  내가 원자폭탄에 대해서 처음 들은 것은 폭격이 있은 지 거의 20일이나 지난 뒤였다.

 

  1945년 8월 6일 아침에 일본 히로시마 시(市)에 이 세상에서 최초로 원자폭탄이 떨어졌을 때 폭발에 의해서 생긴 버섯구름에서는 검은 비와 죽음의 재가 무더기로 쏟아졌다고 한다. 작품의 제목도 거기에서 연유한 것이다.

 

  '검은 비'는 원폭피해(原爆被害)를 입은 어떤 미혼의 여공(女工)이 쓴 일기를 해설하는 형식으로 적어 내려간 글이다. 직접 체험한 일을 적은 때문인지 이 글을 읽으면 아비규환의 현장을 직접 체험하는 느낌이 든다. 어쩌면 사람의 일생이 '검은 비'라고까지는 말할 수 없지만, 수시로 모진 비바람 속을 헤졌고 살아가는 체험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하여간 박진감이란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일까. 어느 날 밤에는 이 책을 읽는 도중에 공교롭게 정전(停電)이 되었었는데 잠시 글 속의 상황을 현실로 착각하고 허둥거릴 정도였다.

 

  핵무기의 위력에 대해서는 그동안 자주 들어 왔지만 무적 황군(皇軍)을 자랑하던 일본이 두 손을 들 수밖에 없었던 정황이 그 작품 속에는 잘 묘사가 되어 있다. 어떤 기록에는 원폭으로 히로시마 시민 중 6만 명이 목숨을 잃었고, 10만 명이 상해를 입었으며, 20만 명이 집을 잃었다고 적혀 있다. 물론 어림한 수일 터이지만 며칠 전 일간신문에서 어떤 일본 사람이 원폭으로 희생된 우리나라 사람들의 위령제를 지내기 위해서 내한한다는 기사를 읽은 일이 있다. 우리나라 사람 가운데도 원폭피해자가 적지 않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나의 고향에서도 노무자로 징집되었던 사람이 피해를 입고 돌아오는데 오래도록 원자병에 시달린다는 말을 들은 일이 있다.

 

  제대를 하고 부대를 나온 것은 8월 25일 오후 5시경으로 기억된다. 왕익권(王益權)을 필두로 그대 부대에 집결되었던 800명이 함께 소집 해제 명령을 받고 부대를 나왔는데 영문 (營門) 앞 큰길에는 징병출신((徵兵出身)후배들이 한 패에 모여 있었다. 우리가 풀려 나오는 것을 미리 알고서 기다리고 있었다고 한다. 우리는 모두 봉두난발에다 창백한 얼굴들이어서 쉽게 그들의 눈에 띄었던 것 같다. 우리들에게 달려들자마자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흐느끼는 후배들도 있었다.

 

  우리가 입대할 때는 보이지 않는 목사리에 매여서 끌려 간 거나 다름이 없는데 이제는 동포의 뜨거운 포옹을 받으며 떳떳하게 새 세상의 땅을 밟은 것이다.

 

  사람이 한평생 동안에 이렇게 감격스러운 일을 경험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닐 터인데, 우리의 경우는 후배들이 더 감정이 격해 있었던 것 같다. 우리는 모두 벅찬 감격을 주체하지 못해서 덤덤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석방된 것이 한동안 꿈만 같았다. 가는 곳마다 파죽지세(破竹之勢)로 적을 무찌른다던 무적 황군의 패망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의 이러한 의문을 후배들도 속시원하게 풀어 주지 못해서 안타까웠다. 그 당시는 그렇게 밖에는 생각되지 않았었다. '성냥갑만 한 작은 폭탄' 한 방이 일본을 손들게 했다니 말이다.

 

  오전까지만 해도 감방 속에 갇혀서 암담한 심정을 가눌 길이 없었는데 이렇게 쉽게(?) 자유의 몸이 되고 보니 세상 돌아가는 장단이 속된 말로 꼭 요지경 속같은 느낌이 들었었다.

 

  후배들은 우리의 석방이 몽양 여운형(呂運亨) 씨와 아베총독(阿部) 사이의 담판에서 이루어졌다는 정보도 제공해 주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 길로 몽양 댁을 찾기로 했다. 얼마 뒤에 우리는 원서동(苑西洞) 휘문학교(徽文學校) 뒤의 조촐한 한옥의 사랑채에서 몽양과 첫 대면을 하고 그분 특유의 웅변조의 위로의 말을 듣게 된다.

 

  “여러분의 옥고(獄苦)는 우리나라 독립의 값진 밑거름이 되었으며, 실로 10만의 병력에 견줄 만하다”고 우리를 추켜세웠던 것이다. 그때 몽양은 초로를 지난 나이였을 터인데 패기는 시들지 않은 것 같았다. 우리는 다들 그의 과분한 찬사를 열적은 마음으로 경청했던 기억이 난다.

 

  몇 시간 전에는 일본인 육군 형무소장의 고별사를 들었는데 이제는 회전무대처럼 장소와 연사가 완전히 바뀐 것이다.

 

  낮에는 정오가 좀 지난 시각에 우리는 소장의 고별사를 듣기 위해서 이태원 육군 형무소의 앞뜰에 모였었다. 그때는 이미 재소자들 사이에 일본의 패망이 널리 알려진 뒤였는데도 그는 패배니 패전이니 하는 부정적인 말은 한마디도 쓰지 않고 그저 암시적으로만 비쳤을 뿐이었다. 그의 어조에는 패전 국민으로서의 위축감은 찾아볼 수 없었고 도리어 어떤 오기 같은 것이 번득였다.

 

“대동아전쟁도 종결을 고했다. 그대들을 석방해서 원대로 복귀시킨다. 조선이 독립이 된다고는 하지만 미소가 함께 개입한 상황에서 그 정세를 낙관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지난날의 묵은 감정을 씻고 우리 두 나라가 앞으로 굳게 손잡고 도와나갈 때 서로 국가를 보전할 수 있을 것이다…….”

 

  대개 이러한 요지의 고별사였다. 석방의 벅찬 감격에 들떠서 그의 말소리는 그대로 귓전만 스치고 지나갔다. 몽양은 이름까지 거명하면서 “민족 반역자들이 애국자를 가장하고 정당을 만들 차비를 하고 있다”고 신랄하게 매도했었다. 그런데 소장은 두 나라가 다시 손을 잡자고 말했다. 가사는 말할 나위도 없지만 가락이 완전히 다른 두 사람의 노래를 듣는 느낌이었다.

 

  해방되고 한동안 좌·우로 갈라져서 정국이 난마처럼 어수선했다. 우리는 모두 미·소 양 대국이 주도하는 공동위원회의 결과에 큰 관심을 기울였었다. 38선을 가리켜서 ‘깨지면 하나, 안 깨지면 둘‘이라는 수수께끼가 등장한 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

 

  이때는 아직 대한민국이 건국되기 전이어서 남, 북한이 다같이 ‘조선’이라는 호칭을 쓰고 있었다.

  그때 항간에는 누가 꾸며낸 말인지는 모르지만 ‘미국놈 믿지 마라, 소련 놈에 속지 마라. 일본 놈 일어난다. 조선사람 조심하자 ‘라는 캐치프레이즈가 나돌았었다. 이 말은 쉽게 퍼져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어조가 그럴듯했던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되었겠지만 그보다는 통일을 갈망하던 민심을 잘 표현한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나는 이 말을 들을 때면 자주 육형소장(陸形所長)의 고별사가 머리에 떠올랐다. 그가 우리나라의 정세를 낙관할 수 없다고 예언한 것을 보면 그는 이미 몇 해 앞으로 다가올 남·북 분단을 예견했던 것일까. 그리고 뒷날의 한, 일 양국의 국교정상화까지도.

 

  책이야기가 옆길로 많이 빗나갔는데 일본의 히로시마 시에 ‘검은 비‘가 내렸다는 날은 나는 아직도 이태원의 육군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고 있던 때다. 암담한 운명에 굴복하듯 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시간이 많았다. 이럴 때면 나는 자주 두 손을 모아 쥐고 기도의 자세를 취했었다. 나는 우리의 석방은 기도의 효험이 있었던 것으로 굳게 믿었다. 이 믿음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가끔 지나온 발자취를 되돌아본다. ‘검은 비’라고까지는 말할 수 없지만, 어쩌면 우리의 일생은 수시로 비바람 속을 헤졌고 살아가는 체험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주저 앉지 않으리라 그리고 흐트러지지 않은 자세를 다시 한번 다짐해 본다. 그 빗속을 거닐며.

                                                                                                    (19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