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을 기다리는 거미 / 공순해

 

늙은 거미를 본 적이 있나 당신, 늙은 거문개똥거미가 마른 항문으로 거미줄을 뽑아내는 것을 본 적이 있나 당신, 늙은 암컷 거문개똥거미가 제 마지막 거미줄 위에 맺힌 이슬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나 당신, 죽은 할머니가 그러셨지. 아가, 거미는 제 뱃속의 내장을 뽑아서 거미줄을 만드는 거란다. 그 거미줄로 새끼들 집도 짓고 새끼들 먹이도 잡는 거란다. 그렇게 새끼들 다 키우면 내장이란 내장은 다 빠져나가고 거죽만 남는 것이지. 새끼들 다 떠나보낸 늙은 거미가 마지막 한 올 내장을 꺼내 거미줄을 치고 있다면 아가, 그건 늙은 거미가 제 수의를 짓고 있는 거란다. ~ (늙은 거미/ 박제영)

화자(話者)가 내 어깨에 손을 얹고 등을 툭툭 치며 말하는 것만 같다. 그리고 그 손은 힘이 들어가 있으며 두툼할 것 같다. 이토록 예리하게 사물(?)의 삶을 통찰할 수 있다니. 감동한 나머지 심지어 주인공 거미와도 삶에 대해 논해 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런 느낌을 더해 준 건 다음의 글 때문이기도 했다.

“ ~거미줄은 잉글랜드 서식스주의 백악기 초기에서 발견된 것을 토대로 적어도 1억 4,100만 년 동안 존재해 온 것으로 유추됩니다. 이렇게 오래 살아오면서 기다림에 익숙한 듯합니다. 거미는 높은 곳에 올라가 바람을 기다립니다. 뱃속에서 뽑은 첫 줄을 바람에 날립니다. 줄 끝자락이 어딘가에 붙으면 거미는 본격적으로 집을 짓기 시작합니다. 강아지풀에 위태롭게 지어진 사진 속 거미집이 안쓰럽게 보입니다. 첫 줄 끝자락을 바람이 데려간 곳이 연약하기만 한 강아지풀이었습니다. 하지만 거미는 바람이 정해준 터가 궂어도 불평하지 않습니다. 반나절 걸려 만든 터전이 한순간에 뭉그러지면 거미는 또 다른 바람을 기다릴 뿐.” (장혁진 <거미의 내 집 마련>)

1억 4,100만 년을 이어온 기다림이란 어떤 걸까? 인간의 삶이나 거미의 삶이나 생명을 영위한다는 점에선 동가(同價)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 관념의 희롱이 아닐까?

오늘 아침이었다. 아침의 산뜻한 기분. 이 느낌은 나이 들어감에 따라 그리 흔하게 가질 수 없는 감정이다. 이유는 여러 가지 복합적 요인이 작용하기에, 쉽게 또는 단선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 어쨌거나 오늘은 모처럼 가벼운 기분이었고, 드문 감정이었다.

하루에 대한 기대감조차 일어 사뿐한 마음으로 계단을 내려섰다. 그리고 계단 모퉁이를 돌아 아래층으로 내려서던 순간, 뭔가 얼굴에 와 척 감기는 감촉이 그 좋은 느낌을 훅 날려 버렸다. 뭐지? 무너지는 기대랄지, 그런 반응으로 머리를 흔들며 손으로 얼굴을 훑어내렸다. 순간, 미친놈! 아무 데나 집 짓냐? 울컥하는 심사가 솟구쳤다. 거미줄이었다.

순식간에 머릿속은 거미줄 가득 찬 폐가가 되고 말았다. 그러지 않아도 쓸쓸하고 황폐한 심정에 허덕이는 나날인데... 청소에 게을렀다는 자책과 함께 사람 사는 집에 거미줄이라니, 하는 노기도 일었다. 예전 사람들은 심지어 집에 망조가 들려는 징조라고 개탄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요즘은 세상이 바뀐 탓인지 벌레들도 인간과 함께 동거한다. 바퀴벌레는 물론, 눈에 띄지 않을 뿐이지 쥐도 집구석 어딘가에 함께 살고, 새가 날아들어 둥지를 틀기도 한다. 잠자리에 들려고 침대의 이불을 젖혔더니, 거미께서 먼저 침상에 오르셔 곤히 주무시고(?) 계신 적도 있었다.

며칠 전엔 창문 방충망에 거뭇한 것이 묻어 있었다. 아이들이 흙 뿌렸냐? 그러나 정원이는 그게 거미가 알을 슬은 것이라고 웃었다. 듣다가 나도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미친 것! 아무 데나 새끼를 흘려. 인간 손타는 곳에 출산(?)하다니. 세월이 미치니까 벌레들까지 미치네. 말은 농담처럼 했지만, 정말 어이없었다. 제 새끼 간수도 못 하니 제 생명인들 제대로 건사하겠어. 그러니 아무 데나 거미줄을 치지. 어디선가 숨어서 내려다보고 있을 그놈을 한껏 힐난하고 싶었다.

그러자 망친 기분 탓이었을까, 생각이 줄 이어 앞질러 나갔다. 이젠 숨결이 식어 그놈이 날 제 먹이로 오해했나. 아님 무생물처럼 느껴져 내 위에 집을 지으려 했나. 이젠 볼 장 다 봤네. 산송장 취급이잖아. 배가되는 불쾌함과 함께 헛 새어 나오는 허망한 웃음을 누르며, 창가 탁자에 앉아 밖을 내다봤다. 짧게 깎인 잔디 사이로 웃자란 잔디풀이 씨를 달고 쏘옥 올라와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그러자 거미의 삶과 인내와 적응의 지혜에 감동하던 기억이 떠올랐다. 내가 거미에게 강아지풀 대신이었던가? 그렇다면 날 세우지 말고 얌전히 그냥 지나가 줄 걸 그랬나? 하지만 우리 집은 거미가 터를 잡을 수 없는 집이다. 세 아이 등쌀에 바람이 거미줄을 어디로든 데려가 주길 기다리기는커녕 아차 하는 순간에 거처가 박살 나 버릴 테니까. 그러니 더욱 미련한 놈 아닌가. 칠칠치 못하게 아이 셋이 뛰는 집에 집을 지으려 하고, 아무 곳에나 출산하고. 푼수기 가득한 아줌마 같은 녀석. 문학 속에 거주하며 관찰의 대상이 되는 거미와 실제 삶에 들어온 현실의 거미는 이토록 사뭇 다르다. 배반의 현실이 어디 이뿐이랴. 역시 관념의 희롱이었어.

하지만 돌려 생각해 보니, 거미는 제집 하나는 똘똘하게 챙기고 산다. 인간 중엔 그만도 못한 인간도 많다. 제집을 못 짓고 얹혀사는 인간. 못 짓기는커녕 남의 몫마저 빼앗아 사는 인간. 자신의 생존을 남에게 책임지라 들이대는 인간... 그러나 거미는 여러 채의 주택을 만들지도, 전월세도 놓지 않는다. 욕망의 수단으로 주택을 보유하지도, 과시를 위해 터를 늘리지도 않는다. 타고난 분복에 겸손하며 기다림에 익숙할 뿐이다. 1억 4100만 년의 기다림. 그러고 보니 유독 거미에게만 화낼 일이 아닐 듯하다. 이제 나도 포도즙에 향기를 더하는 바람의 손길에 의지해, 내장을 꺼내 마지막 줄을 짜야 할 일만 남았으니, 사물에 좀 더 통찰의 눈을 들이대고 눈 맞춤이나 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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