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엌궁둥이 / 강돈묵

 

겨울바람이 몰아치는 날이면 나도 모르게 빠져나간 유년이 고향 집에 가 있다. 산골짜기의 눈을 끌어안고 내려온 바람이 텃논 가운데의 짚가리에서 한바탕 상모를 돌린다. 머리를 풀어 헤치고 오락가락 몰아치는 눈발. 바람의 궤적이다. 깃털을 헤집고 달려드는 바람을 밀치며, 짚뭇에 앉아 나락을 찾는 산새들이 신이 났다. 그들이 한참 놀다 간 후 차분히 볕이 내려앉는다. 해가 중천을 지났지만 바람이 역시 차다.

태어나면서 잔병치레가 잦았던 나는 여러 형제 중에서 엄마의 속을 가장 썩였던 자식이었다. 자주 골을 부렸고, 쉽게 풀리지 않았다. 물론 한 고집했던 기억도 난다. 한편 부지런하여 가만히 쉬는 적이 없었다. 산에 올라 토끼를 잡아들이고, 장끼를 허리춤에 달고 내려왔다. 심지어 짚가리에 내려온 참새와 처마의 썩은새 밑에 숨어들어 잠을 청하는 박새까지 그냥 두지 않았다.

산골의 겨울이 기울면 처마 밑의 고드름이 눈물짓기 시작한다. 강한 바람에도 흔들림 없이 매달렸던 고드름, 처마를 후려치는 바람과 마주했던 결기가 풀어지면서 떨어지는 낙숫물이 무료한 내게 투정을 부추긴다. 무료함 속에서 저고리 단추마저 엇끼운 나는 엄마에게 이것저것 주문이 많다. 실은 절실하게 원하는 것도 없다. 그냥 투정일 뿐이다.

“그리고, 엿은 언제 과 줄 건데?”

“열흘 후, 형들이 다 오면….”

엄마는 내 말에 심드렁하게 한 마디 던지고 부엌으로 들어간다. 가뜩이나 심통이 나 있던 터라 따라가며 보챈다. 별 반응이 없다. 칭얼대다가 느닷없는 엄마의 지청구를 듣고서야 쫓겨난다. 나뭇간을 돌아 부엌 궁둥이로 갔다. 깨끗하다. 별생각 없이 앉아도 옷에 묻어나는 게 없다. 흙으로 발라 놓았는데 그리 지저분하지 않다. 특별히 자주 손을 보는 편도 아니다. 가을 추수를 마치고 집에 맥질하면서 끄트머리 남은 흙물로 쓱쓱 문대놓은 것뿐인데 늘 온기가 있어 말끔하다.

우리 집에서 가장 길게 볕이 머무는 곳인 부엌 궁둥이. 더구나 아들이 즐기는 국을 엄마는 늘 작은 솥에 안쳤으니 이곳은 언제나 따뜻하게 온기를 끌어안고 있다. 높이마저 걸터앉기에 딱 맞는다. 지청구를 듣고 겸연쩍은 마음을 달래기에 이만한 곳이 없다. 겨울의 찬기를 피하기에 좋고, 부엌문을 통해 엄마의 동태를 살피기에 안성맞춤이다. 더러 엄마의 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꾸지람을 듣고 쫓겨났어도 외롭지 않은 곳이 이곳이다.

그러고 보니, 부엌 궁둥이는 내가 찾아올 때마다 편하게 받아준 것 같다. 항상 너그러웠다. 지청구를 듣고 풀이 죽어 있는 내게 실실 골리거나 꼬치꼬치 묻지 않았다. 누군가 와서 데리고 갈 때까지 따뜻한 온기로 포근히 감싸 주었다. 형제들과 다투고 나와 있어도 억울한 마음이 가라앉을 때까지 조용히 기다려 주었다.

눈보라가 쳐도 방으로 숨어들기 어려운 날은 으레 이곳으로 나왔다. 찬바람이 울어 귀가 심하게 떨어도 엉덩이는 언제나 따뜻했다. 문틈으로 콧노래 소리가 흘러 나와 들여다보면 엄마는 내가 앉아 있는 아궁이에 장작개비를 밀어 넣고 계셨다. 따스한 궁둥이의 열로 잠이 들기도 했다. 매번 잠을 깨우는 것은 엄마의 목소리였다. 엄마는 언제나 그렇듯 내가 있는 부엌 궁둥이와는 정반대 쪽 굴뚝을 향해 소리치고 계셨다.

음침하게 하늘이 내려앉은 매섭게 추운 날이었다. 엄마의 목소리가 크게 갈라진다. 전에 듣지 못한 격양된 목소리다. 여간하여서는화를 내지 않으시던 엄마인데, 오늘은 내가 많이 지나쳤나 보다. 부엌 궁둥이로 나와 걱정이 태산이다. 오늘은 쉽게 수습되려니 기대도 하지 않으면서 고심한다. 느닷없이 굴뚝에서 연기가 미어터지듯 밀려 나왔다. 작은 솥이 걸려 있어 마른 장작이나 숯만을 넣던 아궁인데 오늘따라 연기가 심하다. 나뭇간에서 청솔가지를 옮기는 엄마의 모습이 문틈으로 잡힌다. 굴뚝에서 쫓겨나온 매캐한 연기가 바닥으로 가라앉는다. 검은 연기가 내 주위를 감돌아 마당으로 짝 깔렸다. 그 속을 굴뚝새가 ‘찍찍’ 울며 낮게 지나갔다. 기침이 치민다. 더는 이곳에 머물 수 없어 방으로 쫓겨오고 말았다. 두레상을 들고 들어온 엄마는 방에 있는 나를 발견하자 빙긋이 웃으셨다.

고향 집에 온 내 유년은 을씨년스럽다. 지붕의 이엉은 없어지고 흙벽은 시멘트로 바뀌었다. 그리고 그 따뜻하고 정겹던 부엌 궁둥이도 사라졌다. 가마솥에서 방금 긁어낸 누룽지를 받아들고, 추위만큼 따뜻했던 그 겨울날과 매캐한 연기가 깔리던 날을 추억하고 싶은데 아무것도 없다. 허전한 가슴으로 엄마의 숨결이 따뜻하게 지나간다.

고개를 들어 뒷산을 바라보니 온통 눈이 덮인 산중에 엄마의 산소가 보인다. 양달에 있는 엄마의 유택만이 눈이 녹았다. 주변의 하얀 숲정이와는 다르게 엄마가 계신 곳이 따사롭고 정겹게 눈에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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