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한 아름다움에 대하여 / 유혜자

-부흐빈더의 베토벤 피아노소나타10번(G장조.OP.14)No.2연주

“새롭게 발견한 베토벤의 음악과 해석을 들려주겠습니다.”

베토벤 스페셜리스트 루돌프 부흐빈더(Rudolf Buchbinder 73세)가 내한 공연을 앞두고 인터뷰에서 밝힌 내용이다. 지난 5월 12일(서울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 베토벤 리사이틀) 연주현장에서 들여다본 안내책자의 첫 레퍼토리가 베토벤의 피아노소나타 10번이어서 좀 실망스러웠다. 이 음악은 사랑스러운 곡이긴 하나 단순해서 초심자들의 연습곡으로 많이 쓰이기 때문이다.

무대에 선이 굵은 외모의 부흐빈더가 나타나 웅장한 멜로디에 어울릴 것 같은 선입견을 가졌던 나는 연주가 시작되자 깜짝 놀랐다. 첫 곡의 유연하고 맑은 소리 몇 소절이 지나면서 나도 모르게 옆에 앉은 친구에게

“새싹처럼 연하고 아름다워.”하고 소리 내어 말할 뻔했다.

단순하고 명료한데 너무 아름답고 우아하다. 아니 달콤하기도 하다. 주변에 피아노 연습생들에게서 많이 들어온 그 멜로디가 아닌 것 같다. 철鐵로 된 피아노 줄을 울려서 내는 소리 같지 않고 찰랑찰랑 맑게 흐르는 물소리 같다. 이슬 내린 초원에서 예쁜 발로 깡충깡충 춤추던 요정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선계仙界로 향하는 광경이 연상된다.

어둔 객석에서 안내책자의 해설을 들여다보니 이 곡이 브라운 남작 부인 요제피네에게 헌정되었다고 한다. 요제피네 폰 다임 백작 부인이라면 최근(1949년)에 발견된 베토벤이 보낸 열렬한 연애편지 13통의 주인공이 아닌가. 정말 그 생각을 하고 보니 1악장은 가사 없는 달콤한 사랑노래이다. 그런데 이어진 해설은 내가 ‘깡충깡충 요정의 춤을 연상한 오른손과 왼손의 대화’가 부부의 말다툼 같아서 빈에서는 ‘부부싸움’이라는 별칭으로 부른다고 한다. 주제의 두 성부(오른손과 왼손의 선율)의 대립이 마치 연인이나 부부가 싸우는 것 같아서 그렇다는데, 내가 듣기엔 싸움이 아니라 너무 부드럽고 다정한 대화이다. 빈에서 음악대학을 다닌 부흐벤더는 그런 별칭에 관계없이 아름다움에만 치중해서 연주를 하고 있는 듯했다.

그날의 레퍼토리는 일반에게도 익숙한 피아노소나타 8번(비창)과 ‘열정’으로 알려진 소나타 23번 등과 유명 소나타였다. 앙코르곡으로 요한 슈트라우스의「빈 숲속의 이야기」등 세곡 연주로 부흐벤더는 팬들의 열화 같은 환호에 답해주었다.

빛나는 명곡들의 심오하고 고도의 예술적인 연주도 좋았지만 나는 첫 곡 소나타10번을 새롭게 알게 된 것만으로도 “새롭게 발견한 베토벤의 음악과 해석을 들려주겠습니다.”고 인터뷰에서 밝힌 것에 대한 해답 같아 흐뭇했다.

몇십 년 동안 의도하지 않았어도 연습생들의 연주로 흘려 들어왔던 베토벤소나타 10번의 진가를 모르고 지내왔던 것이다. 베토벤하면 대개는 진지하거나 투쟁 끝에 얻어낸 웅대한 작품을 연상하기 쉬운데 어쩌면 모차르트의 초기 선율처럼 달콤한 것도 있음을 확인시켜주었다. 유명 피아니스트들의 베토벤 피아노소나타 음반 중에도 소나타10번이 있는 곡은 드물다. 모차르트의 경우도, 그 선율이 단순해서 모차르트 전문가나 고도의 실력을 갖춘 이가 아니라면 음반을 내지 않는다고 한다. 베토벤의 피아노소나타10번 경우도 마찬가지인가 보다.

부흐빈더는 50여 년간 세계의 저명한 지휘자 및 오케스트라와 연주활동을 해왔는데 뛰어난 베토벤 연주자이자 열렬한 연구가라고 한다. 50회 이상의 베토벤 피아노소나타 공연을 했고, ‘베토벤의 화신’이자 스페셜리스트라 불린다.

‘살아 있는 한 베토벤의 음악에서 무엇인가를 계속 발견하게 될 것’이라는 그의 말처럼 소나타10번의 새로운 가치를 발견한 것만으로도 이번 연주회의 감상은 성공이라는 생각으로 뿌듯했다.

‘단순만큼 사람으로 하여금 친근하게 하는 것은 없다’는 말도 있지만 단순 속에 내포된 그 예술성을 찾아내어 표현하는 것이 연주자의 사명일 것이다. 단순하지만 무한한 아름다움을 품은 곡을 작곡자의 의도를 놓치지 않고 표현하는 부흐빈더의 손을 멀거니 바라보면서 생각했다. 작곡자가 사랑하는 이에게 바치려는 동기로 썼기에 그 마음을 자신의 것처럼 진정으로 표현한 것이 아닌가.

젊은 시절엔 단순하게 사는 것이 나태한 것 같아서 바쁜 스케줄을 만들어 여유 없이 살았다. 그림을 볼 때도 화폭에 공백이 없이 채워진 그림을 택했다. 최근 명성이 높은 화가의 전시회에 갔을 때 단순하게 보이는 것들이 많았다. 정물을 몇 개 늘어놓거나 색색의 점을 찍어 놓는 등 단순한 것들이 모인 작품으로 우리에게 무한한 상상력을 발휘하게 하는 것이었다.

단순한 아름다움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 나는 지금도 이렇게 한가하게 지내도 되나 하면서 마음이 편안치 않을 때가 많다. 수필을 써온 지도 오래지만 단순한 아름다운 글을 아직도 못쓰고 수다를 늘어놓기 일쑤이다. 고도의 예술성을 못 갖추었기에 베토벤의 피아노소나타10번 같은 음악이나 모차르트의 피아노 곡을 음반으로 못 내는 처지와 같다고나 할까.

단순한 멜로디에 아름다운 상상력을 더하게 하는 부흐빈더의 CD를 들으며 H .D. 소로우의 말을 생각한다.

 

“단순이여, 단순이여 내 말하노니, 그대의 사건을 하나나 둘로 하라. 백이나 천으로 하지는 말라. 단순화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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