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그 속을 걷다 / 조헌

 

 

봄은 옅은 슬픔이다. 하얀 벚꽃이 눈처럼 흩날리는 4월, 포개듯 차오르는 애잔함을 애써 감추며 봄길을 걷는다. 오는 듯 가버리는 안타까운 봄 풍경 속을 걷고 또 걸었다.

감은사지(感恩寺址)석탑에서 시작한 길이 이견대(利見臺)를 지나고부터는 해안선을 따라 이어졌다. 들쑥날쑥 크고 작은 해안마다 한적한 어촌과 소박한 어항이 빠끔히 숨어 있다. 길은 빽빽한 솔숲사이를 주춤대다가도 문득 확 트인 해변과 닿아있었다. 어느 곳을 쳐다봐도 온통 황홀하다. 걸음이 느려지더니 저절로 멈춰진다. 끝없이 펼쳐진 코발트색 바다, 그 위로 흰 구름이 선명한 푸른 하늘. 삽상한 바닷바람에 온몸이 저릿하다. 이 세상 모든 것들을 못 견디게 하는 것이 봄이다. 천지가 죄다 봄기운에 몸살을 앓고 있다. 이제 살아 있는 것들은 봄볕 속에서 견디지 못하고 움틀 것이다. 그래서 봄은 뭉근한 아픔이다.

파도가 밀려왔다 빠져나갈 때, 서로의 몸을 비비며 ‘자갈! 자갈! 자갈!’ 몽돌이 노랠 한다. 드문드문 뭉쳐있는 돌무더기를 밟으며 대본리 해안 길을 지난다. 바다를 딛고 솟구친 바위 꼭대기, 그 위에 어렵사리 생을 의탁한 소나무 하나가 손을 흔든다. 나정해변을 거쳐 전촌항에 도착하면 해안길은 끊어져 감포항까지는 짧지만 호젓한 산길을 넘어야 한다. 동네 뒷산 같은 좁은 풀숲 길을 오르면 청보리밭에 펼쳐지고 탱자나무 울타리를 따라 가느다란 오솔길이 바다를 향해 쭉 뻗어 있다.

그 산길로 막 접어들어서다. 생풀냄새가 풋풋하게 올라왔다. 흐드러진 산벚나무가 봄바람에 우줄대며 하얀 꽃잎을 뿌려댄다. 노랑나비 한 쌍이 팔랑거린다. 두 눈이 어질어질하다. 함박눈처럼 내리는 꽃잎은 개울에 떨어져 흰 물길을 이루고, 두렁에 쌓여 꽃길을 만든다. 꽃잎을 밟으며 한 오십 미터쯤 오르니 오른쪽으로 작은 폐가(廢家)가 모습을 드러낸다. 주인을 잃은 지가 꽤 됐는가보다. 다 삭은 양철지붕엔 칡넝쿨이 엉겨 있고 방 하나, 부엌 하나, 두 칸짜리 작은집은 뒷담이 무너지고 지붕도 반쯤 내려 앉아있었다.

두어 평 마당엔 잡풀 사이로 노란 민들레가 지천이다. 야트막한 담장너머로 살구나무에 귀퉁이가 가려진 포구가 한눈에 들어온다. 문짝이 떨어져 나간 부엌, 먼지가 뽀얀 부뚜막위에 양은그릇 너덧 개가 나뒹굴고 쪽마루가 붙어 있는 작은 방안엔 살만 남은 문틈 사이로 새카만 이불 한 채와 아무렇게나 던져진 옷가지 몇 벌이 어지러웠다. 마당 구석 수돗가엔 한 움큼 각시붓꽃이 소담하고 그 뒤로 다 삭은 남자 고무신과 여자의 작은 꽃무늬 슬리퍼가 애잔하다.

사연 없는 집이 어디 있을까마는 자꾸 신발에 눈길이 갔다. 애애한 봄기운에 마루 끝에 걸터앉은 내 머릿속엔 쓸데없는 상념이 꼬리를 문다. 남산만한 덩치의 옹근 사내와 체구가 작아 안쓰러운 젊은 아내가 살았었을까? 아니면 아버지와 어린 딸? 부부가 살았든 부녀가 살았든 남자는 필시 고깃배를 탔을 것이고, 시난고난한 삶의 무게가 만만치 않았으리라. 먹고 산다는 건 언제나 질기고 팍팍한 일이다. 건너 산보다 무거운 삶의 고통에 얼마나 이를 악물고 두 손을 부르쥐었을까? 이고 진 채 여길 떠나는 두 사람의 뒷모습이 낡은 집을 배경으로 어른거린다. 이때다. 마당 한 구석 뚫어진 구멍 속으로 한 발은 족히 되 보이는 뱀 한 마리가 스르르 몸을 숨긴다. 섬뜩했다. 벌떡 일어서자 한 줄기 해풍에 묻어오는 비릿한 갯내가 코끝을 스쳤다. 비감(悲感)이 한숨으로 새어나왔다.

사람은 누구나 벼랑에 뿌리를 내리고 산다. 그 비탈진 산등성이를 지친 다릴 끌며 아등바등 살다간다. 삶이란 어쩌면 오로지 과정 뿐은 아닌지. 늘 결과와 상관없이 그저 걷고 또 걷는 것은 아닐까.

그리운 것들을 다 불러 모으는 봄, 하지만 누구에게나 모두 눈부신 봄일 수는 없다. 처연한 이 집 풍경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왈칵 밀려오는 슬픔에 목젖이 싸하나. 마음은 먹먹해지고 눈시울이 무거워지는 건 내가 길 위에 나그네이기 때문만은 아니었으리라.

“인생이란 애만 쓰다 한만 남기고 가는 기라. 가는 것 붙잡다가 붙잡지도 못하고 속만 끓이다 가는 기라.” 전촌항을 지나며 잠시 들렀던 막걸리집 아낙, 앞뒤 없이 해대던 푸념이 귀에 쟁쟁하다. 무슨 소리냐는 말에 오늘 아침 사촌동서의 부고(訃告)를 받았다고 했다.

“애고! 말하면 뭐할끼고? 겨우 고거 살다 갈낀데 고생만 죽도록 하다 허망하게 갑디다. 다 부질 없는 일이요. 인생은 원래 허무한 맛에 사는 깁니다. 아이고! 날씨 한 번 염병나게 좋네!”

그녀가 들었던 수건으로 바지를 탁탁 털면서 문을 열어젖히자 느른한 봄바람이 넘실대며 가게 안을 채웠다.

폐가를 나와 산등성일 향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멀리 감포항이 보인다. 다시금 꽃잎이 바람에 쏟아진다. 녹작지근한 봄이 무르녹고 있다. 이제 곧 뒤도 보지 않고 가버릴 봄이 채빌 서둘 것이다. 한껏 벌려 논 꽃무더기 잔칫상을 미처 치우지도 못한 채 초록에 자릴 내주며 홀연 몸을 감출 것이다. 속절없이 봄 한철이 또 이렇게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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