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 좀 줬어요 / 최장순

 

 

“자네는 눈이 커서 군인으로는 어울리지 않는 인상이야.”

 

가뜩이나 큰 눈이 더욱 커졌다. 3성 장군인 부사령관을 감히 쏘아보지 못하고 이게 무슨 얼토당토않은 소린가 싶어 부릅뜬 눈이 정면을 응시했다. 그러나 속으로만 되뇔 내가 아니었다. 빠른 두뇌 회전이 순식간 아이젠하워를 모셔왔다.

 

“2차 세계대전을 종식시킨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기억하십니까? 아이젠하워 장군은 눈이 작아서 연합군 총사령관이 되었습니까?

 

선입견을 불식시켰다는 후련함이 후회보다 먼저 올라왔다. 졸지에 이승으로 불려온 아이젠하워가 큰 눈을 껌벅거리며 나를 응원하는 듯 했다.

 

이목구비가 인상을 좌우한다. 눈이 크면 순하다는 느낌, 작으면 성깔이 있어 보인다. 콧대가 높으면 줏대 있어 보이고, 펑퍼짐한 코는 친근해서 가까이 다가가고 싶다. 손바닥보다 조금 큰 얼굴에 배치된 눈·코·입·귀가 잘생김과 평범함을 가르고 강함과 순함을 나눈다.

 

외모의 콤플렉스로 인한 이면의 고민도 만만치 않다. 얼굴을 내면의 거울이라고도 하고, 얼굴 자체가 곧 그 사람이라고도 하는 것은 생김새보다 그 이면의 성질을 비춤이라는 것쯤은 안다. 그러나 일단은 생김새부터 말하고 인상을 따지니 아이러니일 수밖에.

 

“범생 스타일이야”

 

정치판에 입문한 그는 거친 세태를 이겨나갈 인상은 아니었다. 저 순한 인상이 과연 견뎌낼 수 있을까, 우려를 보낸 것도 사실이다. 모호한 언사는 학자 스타일과 겹쳐 약한 인상을 넓혔다. 목소리를 높여도, 이마를 구기며 말을 강조해도 좀처럼 바뀌지 않는 선입견. 그런 그가 달라졌다. 예전과는 다른 인상. 또렷해진 얼굴이다. 왜일까.

 

오호라, 바로 눈썹이었군. 타투로 힘을 준 검정 눈썹은 강렬함을 더했고 거기에 맞춘 검정 머리가 한층 강하게 다가왔다. 결기였을까? 그의 달라진 외모는 새롭게 태어난다는 결기, 강해진다는 결기가 밖으로 비친 것. 가히 노력이 가상했다. 희미해진 눈썹에 검은 칠을 하고 싶은 잠깐의 욕망이 나를 스쳤다. 그러나 정치할 일도 없고, 특별히 강한 인상을 남겨야 할 필요도 느끼지 않는 나는 마음을 접을 수밖에.

 

내가 가졌던 그에 대한 강한 인상은 다른 곳에 있었다. 눈썹도, 머리 색깔도 아닌 그것은 그의 진정한 카리스마. 코로나19 의료봉사에서 보여준 푸른 수술복에 고글 안경 자국 선명한 땀 흘린 얼굴 모습이었다. 믿음직한 구원투수 같은 모습이 대중에게 더 각인되지 않았을까 싶다. 정치인의 주 무기는 말이지만, 그것만으로는 경쟁력을 높이기엔 부족하다. 외모나 패션의 과감한 변화로도 메시지를 전달한다. 대중과의 소통방식이 그만큼 다양해졌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패션 정치학, 대중의 인기를 얻기 위해서는 ‘변신’도 중요한 정치 전략이다. 차가운 도시 여성의 이미지를 탈출하기 위해 머리를 질끈 묶어 소탈한 모성을 연출하는가 하면, 지지층에 각인시키기 위해 소속 정당의 상징색을 입고, 신고 나서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줄기차게 한 가지 머리 스타일만 고집하는 변화에 무딘 정치인도 있다. 어떤 이는 눈썹 문신을 하였지만 본인의 얼굴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혹평을 받기도 했다. 아무튼 문신은 좋은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이미지 전략의 한 방법임은 분명해 보인다. 그들의 변신이 얼마만큼의 성공을 거둘지는 알 수 없다. 대중의 관심은 선거 결과부터 주목하게 될 것 같다.

 

신체와 머리카락과 피부는 모두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니 이를 손상하지 않는 것이 효의 시작이라는 옛말도 이제 달리 해석해야 할 즈음에 이르렀다. 외모도 중요한 소통방식이다. 자신을 잘 드러내 원하는 것을 이루게 하도록 도움을 준다면 긍정의 효과일 것이다. 자기만의 트레이드마크가 있다. 의도했든 아니든 얼굴 모습에서, 패션에서, 헤어스타일에서 자신은 표현된다. 야무지거나 흐리멍덩하거나 나약하거나 강렬하거나 멋스럽거나 소탈하거나, 느낌을 좌우할 것이다. 일상에서 만나는 타인의 인상은 얼굴이 우선이다. 이럴 때 얼굴은 체면이라 부르는 사회적 얼굴이 된다.

 

우리는 일생의 많은 부분을 타인의 시선아래서 살아간다. 그래서 뭔가 특정한 방식으로 나를 내보이며 특정한 얼굴로 타인을 대하려한다. 가면이라는 가식적인 정체성은 체면이라는 사회적 얼굴에서 비롯된다. 체면을 잃어버린다는 것을 굴욕과 연결 지어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밀접한 인간적 관계망 속에서 타자를 의식하지 않는 얼굴이 과연 있기나 할까?

 

<에세이포레 2022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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