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프 IF / 지연희

 

 

아침부터 내리기 시작한 겨울비가 저녁이 지나고 밤의 커튼이 세상을 휘감기 시작한 이후에도 추적이며 흩날리고 있다. 유리창에 장열하게 부딪는 빗줄기를 보면서 제 존재의 가혹한 부정否定이 얼마나 아플까를 생각했다. 오죽하면 견고한 유리면에 거침없이 날아와 산산이 제 몸의 크기를 지워버리는지. 한줄기 겨울 대기를 뚫고 지상에 내리는 빗방울은 화가가 되고 싶은 욕망을 간직한 영혼은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때로는 한 그루 나무를 그렸다가, 한 포기 풀꽃을 그려내는 화가이어서 유리창 가득 꿈의 기상을 펼쳐냈는지 모르겠다. 어둠이 내린 창, 가로등 불빛에 젖어드는 빗줄기의 몸짓이 사뭇 측은스럽다.

만약, 애초에 내가 세상과의 연緣이 있어 지구촌 생물 중에서도 하늘을 자유롭게 비상하는 한 마리 새가 되었었다면 하는 상상을 할 때가 있다. 하늘 멀리 어디론가 유유히 날아 날개를 펼 수 있는 날짐승의 세상을 관망하는 시선, 오직 날아오르는 순간의 때묻지 않은 자유를 사랑한다. 가물가물 멀어지는 날갯짓의 고독한 평화, 높은 하늘을 향해 까마득히 날아오르는 한 마리 새의 침묵은 가없는 고요의 늪이다. 불뚝거리던 일상의 불협화음과 엉클어진 실타래처럼 풀지 못할 고뇌도 녹여 내릴 묵언 수행의 날갯짓이 아닌가. 아무도 없는 신성한 성전, 제대 앞에서 예수님과 눈감고 독대하는 평화 같은 안위가 새의 날갯짓이다. 만약 내가 한 마리 새였다면 두 날개를 펴 저 먼 꿈의 세상을 여는 고요 속으로 날고 있을 것이라는 상상을 한다.

살아 있는 생물의 핵심이기도한 생명의 고귀한 가치를 꽃송이로 보여주는 꽃나무들, 그들은 모두 자신이 추구하던 소기의 목표를 달성한 자랑스런 존재들이다. 온갖 아름다운 자태로, 온갖 아름다운 색감으로, 온갖 매혹적인 향기로 미혹되어지는 대상이다. 그 천태만상의 꽃 중에서 만약, 내가 꽃이 될 수 있다면 한 촉의 동양란 소심이었으면 했었다. 쭉 뻗은 잎의 곡선미는 특별히 크거나 작은 목소리가 아닌 적당한 음성으로 자신의 의사를 조근 조근 전하는 사람 같아서 은근히 빠져들곤 했다. 다양한 색깔의 꽃송이를 피워 올리는 소심란 중에서 주금소심이나 두화소심처럼 수수한 꽃의 생김새와 은은한 향기는 매혹적인 품격을 지니고 있다. 적당한 햇빛과 온도 바람의 세기까지 넘치지 않게 받아들이는 동양란 한 촉이어도 좋겠다.

바람, 한줄기 미풍이 되어 하루 내 그대의 어깨에 내려앉은 피로를 풀어줄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만약에 내가 어떤 장벽에도 굽히지 않는 힘센 바람이 될 수 있다면 혹독한 겨울 언덕에 쓰러진 갈대의 등을 도닥여 일으켜 세워주고 싶다. 온갖 폐지를 모아 산더미처럼 끌고 가는 할아버지의 겨울 땀으로 얼룩진 등에 스며 따뜻한 한 줄기의 위로가 되었으면 한다. 쓸쓸한 겨울 나목처럼 힘없이 서있는 길가 꿈을 잃은 헐벗은 사람의 가슴을 열어 “용기를 내 보세요” 손을 잡고 파릇 파릇 새싹이 돋아나는 봄날의 푸른 벌판을 달려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한 그루 사과나무의 꽃을 피우는 훈풍이 되어 실한 열매를 주렁주렁 매어달 수 있었으면 한다.

내가 만약, 제 몸통에 비해 긴 다리로 땅을 기어 다니는 5~15mm길이의 작은 곤충인 개미였다면 어떻게 살고 있을까? 어둠 짙은 땅속 미로의 방을 지키거나 자신에게 주어진 책무를 다하기 위해 땀을 흘리며 하루 종일 먹이를 모으러 다니고 유충에게 먹이를 먹이는 일을 하는 일개미일 게 분명하다. 어쩌다 거실 나무 바닥 틈 사이를 기어가는 개미를 발견할 때가 있다. 순간, 쌀알보다 작은 몸집의 개미를 손가락 끝으로 누르는 폭력을 자행하고 만다. 집안으로 침입한 개미의 존재는 해충임에 분명하다는 무의식적 ‘침입불가’의 소치이다. 먹이를 사냥하러 일터에 나온 한 마리 개미의 최후를 아무 거슬림 없이 휴지에 싸 버리고 말았다. 내가 만약 한 마리 일개미였다면- 무기력한 생명의 소멸이 아프다.

아직도 나는 꿈을 꾼다. 얼굴 가득 주름진 모습이지만 곱다는 말을 듣고 싶고, 도심의 외곽 어느 카페 넓은 유리창 밖으로 구름 몇 점 세월처럼 흘러가고, 바이올린 선율이 아름다운 비발디의 사계를 듣고 싶다. 헤이즐넛 커피향이 난의 은은한 향기만큼 달콤한 그곳 창가에 앉아 누군가를 기다리고 싶다. 만약에- 내가 젊음의 어느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사랑하면서도 손을 잡지 못한 어설픈 사랑은 하지 않을 것이다. 쉬이 피었다 지는 꽃잎처럼 순간의 사랑보다 쉬이 지지 않는 영혼의 사랑을 위해 나를 가꿀 것이다. 만약에 돌아갈 수 없는 시간 속으로 나를 되돌릴 수 있다면 기억 속에 묻힌 사람들을 만나 삶은 순간에 스쳐지나간 바람 같은 것이라고 이야기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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