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풍기丹楓記 / 김삼복

 

 

받아놓은 날은 언제나 빨리 왔다. 가을걷이 끝내고 해를 넘기기 전에 식을 올려야 했다. 음력 시월 끝자락에 날을 잡은 것이 화근이었을까. 남자가 장가들던 날은 날씨가 궂었다. 아침부터 하늘이 을씨년스러운 잿빛이었다. 점심나절부터는 바람과 진눈깨비가 둘둘 뭉쳐져 마당을 휩쓸었다. 기어이 행랑채에 걸어둔 바람막이 천막이 펄럭거리다 뚝 끊어졌다. 그 바람에 쌓아둔 접시들이 와르르 무너졌다. 빨간 꽃사탕으로 울긋불긋 장식한 잔칫상 위로 진눈깨비들이 갈지자로 흩날렸다. 과방지기 대수 아재가 삶은 돼지고기를 썰던 손을 놓고 난장판이 되어가는 혼인잔치 마당을 심란스럽게 쳐다보았다.

부엌에서 고기전을 부치던 명순이 엄마가 등이 시린지 아궁이로 들어갈 기세로 앉아 “오메오메! 이 좋은 날 뭔 일이래요? ” 설거지를 하던 마을 어멈들은 시린 손을 겨드랑이에 옹그리고 부엌 밖을 나서지 않았다. 하루 종일 불목으로 절절 끓는 안채 아랫목에 얌전히 앉아있는 신부도 화려한 첫상 음식이 차려져 있지만 숟가락을 들지는 못했다. 일가친척 아주머니들과 할머니들의 곁말과 눙치는 입담에 신부는 숨도 못 쉬는 듯했다.

지난봄에 읍내 옆 마을 ‘범실’ 처녀와 맞선을 본 남자는 자그마하고 통통한 그녀의 쌍꺼풀 진 눈에 마음을 빼앗겼다. 매초롬한 눈매와 흰 피부가 아름다웠다. 농사일 하며 그을린 동네 처녀들과는 다른 도회적인 분위기가 물씬 나는 여자였다. 남자의 어머니는 그녀의 쌍꺼풀진 눈매가 어딘지 모르게 맹랑해 보여 마음이 편치 않았다. 오히려 작년에 며칠 묵었던 수더분한 친정 동네 처녀가 형제 많은 집 맏며느리로 맞을 듯싶어 아들을 구슬려보았다. 그러나 남자는 크고 시원한 그녀의 눈매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해 겨울 부랴부랴 치른 혼인날은 그렇게 눈 폭풍이 몰아쳐 마당에서도 부엌에서도 과방에서도 사람들을 안절부절못하게 했다.

아버지를 도와 농사를 짓다가 큰아들을 낳고 서울로 올라간 남자는 개인택시를 몰게 되었다. 그때만 해도 개인택시자격증은 안정적인 수입이 보장되었다. 그러나 일정하지 않은 벌이로 아끼지 않으면 서울바닥에서 내 집 한 칸 마련하기란 힘든 일이었다. 가난한 농사꾼의 맏이인 남자와 사고 싶은 것은 꼭 사야 직성이 풀리는 그녀와의 서울생활은 금이 가기 시작했다. 기분이 우울하면 비싼 모피를 사들고 왔고 남편 모르게 동네 가게마다 외상을 걸었다.

그들의 집에서는 기르는 짐승조차 속 편하게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녀의 입에서는 씀바귀뿌리보다 더 쓴 힐난들이 뛰쳐나왔고 그 남자의 눈에서는 쇠도 녹일 불꽃이 일었다. 어쩌다 부부가 가족행사에 오는 날에는 식구들 모두가 초긴장을 했고 조심성 없는 감정의 칼날들은 무방비인 여러 사람을 찔렀다. 그들의 집은 오래도록 햇볕 한 점 들지 않았다.

어느 날 그녀는 자신이 믿는 신에게 영혼을 주어버리고 비틀린 모습을 내보였다. 부끄러움은 보이지 않았고 아이들의 장래도 자신이 신이라고 우기는 자에게 다 바치려 했다. 그토록 수십 년을 지키고자 했던 남자의 울타리를 그녀는 부숴버렸고 꽃밭의 꽃들도 파내 버렸다. 살림살이며 옷가지며 쓸 만한 것은 다 싸가지고 집을 나갔고 우격다짐으로 거액의 위자료를 청구하였다. 전 재산이었던 집을 팔고 서류를 정리한 남자에게는 다행히 두 아들과 두 며느리가 남아 곁을 지켜주었다.

혼자 산 지 십 년이 넘었다. 몇 해 전에 임대아파트로 남자는 이사를 했다. 둘째 아들 집과 가까워 며느리는 들며 나며 밑반찬과 건강을 살뜰히 챙겼다. 늦은 밤, 일을 끝내고 집에 오면 반겨주는 이 없어 쓸쓸하기도 하지만 잔잔한 평안을 되찾은 노후다. 두 해 전부터 여동생이 소개해준 여자와 가끔 만나 식사도 나누고 차도 마신다.

마흔에 남편과 사별한 여자는 세 아이들을 잘 키웠다. 수십 년 엄마의 자리를 지키며 살아왔고 재산도 일구었다. 이제는 자식들 다 여의고 말이 통하고 마음결이 비슷한 남자를 만났으니 오래도록 가까이하고 싶었다. 어쩌면 사람과 사람의 마음은 상처와 상처로, 나약함과 나약함으로 더 쉽게 이어지나 보다. 상실과 결핍을 통과한 가슴만이 수용할 수 있는 무엇이 세상에는 분명 있다 .

올봄에 남자는 지방에 있는 동생들을 찾아다니며 인사를 시켰다. 평생 마음 붙일 데 없이 힘들게 살았던 남자가 외롭지 않기를 바랐던 동생들은 진심을 담아 축하해 주었다. 지난가을에는 가족모임에도 합석해 나란히 노래도 한 곡 불렀다. 어릴 때 부모를 여의고 남편도 일찍 잃었던 여자의 주름진 뺨에 새각시 같은 발그레한 물이 들었다. 남자와 주고받는 눈빛 속에 스무 살 큰애기의 수줍음과 똑 닮은 모습이 깃들어 있었다.

외로움에 대해서, 사랑에 대해서, 그리움에 대해서, 늙은 단풍나무의 미추에 대해서 나는 아무 말도 못하겠다.

노을빛이 스며든 오후, 남자의 고향집 마당에는 손 맞잡은 단풍나무 두 그루가 곱게 물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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