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속의 아이들 - 하나의 환상 / 찰스 램

 

 

아이들은 어른들의 어린 시절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고, 상상력을 펼쳐서 자기들이 한 번도 본 일이 없는 전설 같은 증조부라거나 할머니라는 분이 어떤 분인가 알고 싶어한다.

요전 날 저녁 내 어린 것들이 내 곁으로 기어 와서 그들의 증조모가 되는 필드 할머니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려 했던 것도 이런 마음에서였을 거다. 필드 할머니는 노퍽에 있는 큰 – 그들과 아빠가 살고 있는 집보다 백 배나 더 큰 – 저택에 사셨다. 그 집은 그들의 ‘숲속의 아이들’이란 민요를 통해서 최근에 알게 된 비극적인 사건의 현장 – 적어도 그 고장에서는 대체로 그렇게들 믿고 있다 – 이기도 하다. 사실 그 어린아이들과 그들의 잔인한 삼촌에 대한 이야기 전부가 처음부터 방울새가 나오는 대목까지 그 커다란 홀의 벽난로 장신 나무판에 곱게 새겨져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돈 많은 어느 어리석은 집주인이 그것을 헐어내고 그 자리에 현대식 대리석 장식을 세웠던 것인데 거기에는 아무런 이야기도 새겨져 있지 않았다.

말이 여기에 이르자 앨리스는 사랑스러운 엄마가 짓던 표정 하나를 귀엽게 지어 보였다. 그 표정이 어찌나 부드러워 보이는지 결코 나무라는 표정이랄 수 없었다. 그러자 나는 말을 계속했다. 나는 아이들에게 필드 증조모께서 얼마나 믿음이 깊으셨고 얼마나 선량하셨으며, 또 많은 사람이 그분을 얼마나 좋아하고 존경했던가를 말했다. 그러나 할머니는 사실 그 큰 저택의 마나님이 아니라(어떤 면에서는 그 저택의 마나님이라 할 수도 있었다). 이웃 고을 어딘가에 사둔 보다 새롭고 유행에 맞는 저택에서 살고자 했던 주인이 위탁해서 그 저택의 관리를 맡으셨을 뿐이다.

하지만 할머니는 어느 정도는 자기 집이나 다름없이 그곳에서 기거하셨고, 살아 계시는 동안에 그 집이 갖추어야 하는 위엄을 어느 정도는 유지하셨던 거다. 그 집은 후에 퇴락하여 거의 무너지게 되었고, 그 집의 옛 장식품들은 모두 떼어 주인의 다른 저택으로 옮겨갔다. 하지만 그곳에 맞춰 놓은 그 장식품들의 모습은 어색하기가 마치 근래에 아이들이 웨스트 민스터 사원에서 본 옛 무덤을 누군가가 번지르르하게 금박이 되어있는 C 부인의 응접실에 옮겨 놓은 것 같았다.

이 말에 존은 ‘거, 참 바보 같은 짓이구먼’하고 말하려는 듯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나는 말을 이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장례식에는 수 마일에 걸친 주변의 가난한 이웃 사람들은 물론 좋은 가문의 사람들도 상당수 찾아와서 그분에 대한 추모의 경배를 올렸었는데, 그건 할머니께서 그만큼 훌륭하고 믿음이 두터운 부인이셨기 때문이었다. 할머니는 시편을 모두 외우시고 – 아니 성경의 대부분을 다 외우실 정도로 정말 훌륭하셨다.

이 말에 어린 앨리스는 양팔을 크게 펼쳐 보였다. 그래서 나는 아이들의 필드 증조모께서 한때는 얼마나 키가 훤칠하시고 강직하고 고결 우아한 부인이셨던가, 그리고 젊으셨을 때는 가장 훌륭한 무용가라는 평판을 받으셨던 일도 말했다. 이 순간 앨리스의 작고 귀여운 오른발이 무의식적으로 장단을 맞추듯 움직이더니 나의 근엄한 표정을 보자 뚝 그쳤다. 그 고을에서 가장 훌륭한 무용가셨는데, - 나는 말을 잇고 있었다. – 그만 암이라는 고약한 병에 걸려서 고통 때문에 꺾이고야 말았다. 하지만 그 고약한 병마에도 그분의 훌륭한 기품은 결코 꺾이거나 굽혀지지 않고 줄곧 꿋꿋하셨다. 그만큼 선량하고 신앙이 깊었기 때문이었다.

이어 나는 말했다. 그 크고 호젓한 저택의 외롭고 큰 방에서 할머니 홀로 주무셨는데, 밤중에는 두 아기 유령이 나와 자고 있는 방 근처 층계를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라 믿으면서도 “그 철부지 어린것들이 해를 끼치지 않을 거다” 하고 말씀하셨다. 나는 당시에 함께 자는 하녀가 있었는데도 그 유령 이야기에 몹시도 겁을 먹곤 했었다. 할머니에 비해서 채 절반도 착하거나 믿음이 두텁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아기 유령들을 내가 보지는 못했던 것이다.

이 말을 듣고 존은 온통 눈썹을 펴 보이며 용감한 척해 보이려고 애를 쓰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분께서 손자들을 휴일이면 그 저택에 오게 하여 친절히 대해 주었던 일들을 이야기했다. 그 저택에서 특히 나는 혼자서 많은 시간을 보내곤 했었다. 로마 황제들이었던 12명의 시저들의 흉상을 혼자서 몇 시간이고 응시하고 있노라면, 그 오래된 대리석 머리들이 다시 살아나는 것 같기도 하고, 내가 그들과 함께 대리석이 되어 버리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그 커다란 저택을 아무리 돌아다녀도 지칠 줄 몰랐던 일들을 들려주었다. 그 크고 텅 빈 방들이며 낡은 벽걸이 장식들, 바람에 펄럭이는 그림 무늬 융단들이며, 금박이 거의 닳아 없어진 목각 참나무 판화들을 구경하며 돌아다니다가 때로는 그 넓고 고풍스러운 정원을 거닐었는데, 이따금 외로운 정원사가 스쳐 지나가는 일 이외에는 그 정원을 거의 혼자서 독차지했었다.

담장 위에는 유도며 복숭아들이 매달려 있었는데, 그것들은 금단의 과실이어서 나는 한두 번을 제외하고는 그 과실들을 따려 하지 않았다. 내게는 그보다 즐거운 것들 것 있었기 때문이었다. 침울해 보이는 늙은 주목 나무나 전나무 사이를 거닐거나, 쳐다보는 용도 이외에는 아무데도 쓸모가 없는 빨간 열매나 전나무 방울을 따기도 하고, 사방 둘레에 온통 산뜻한 정원의 향기 가득한 신선한 풀밭 위에서 이리저리 뒹굴기도 하고, 아니면 오렌지를 재배하는 온실에 들어가 햇빛을 쬐고 있노라면, 그 포근한 온기 속에서 오렌지와 라임 열매들이 익어가듯 나 자신도 따라 익어가는 환상이 들기까지 했다. 혹은 정원 아래 구석진 곳에 있는 양어장에서 물속을 이리저리 쏜살같이 내닫는 황어들이며, 물속 중간쯤에 드문드문 꼼짝 않고 매달려 황어들이 자발없이 나댄다고 비웃기라도 하는 듯 시무룩한 표정을 짓고 있는 큼직한 곤들매기들을 지켜보는 것이 더 재미있었다. 이와 같은 망중한의 기분 전환 속에서 나는 복숭아며, 유도와 오렌지며, 흔히 아이들의 미끼가 되는 따위의 것들에서 맛볼 수 있는 달콤한 모든 맛보다 더 많은 기쁨을 누렸던 것이다.

이야기가 여기에 이르자 존은 들었던 포도송이를 접시에 슬그머니 다시 놓았다. 앨리스의 눈에 띄지 않은 바 아니어서 그녀와 나누어 먹을까 했지만 당장에는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했음인지 두 오누이는 그것을 포기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한결 목청을 돋우어 이야기했다. 필드 증조모께서 손자들을 모두 사랑하셨지만 그중에서도 큰아버지 존 L을 각별히 사랑하셨을 게다. 큰아버지는 용모도 아주 잘 생겼거니와 기개가 대단한 청년이어서 다른 손자들에게는 왕과 같은 존재였다. 그는 우리 몇몇 손자들처럼 구석진 곳에서 어슬렁거리는 짓을 하는 대신에 너희들보다 어린 개구쟁이 시절부터 주위에서 얻어 탈 수 있는 말 중에서도 가장 억센 말을 잡아타고 아침이면 고을을 반쯤이나 돌아다니며 사냥꾼들이 나와 있으면 그들과 어울리곤 했다. 그러나 그분도 그 오래된 저택을 사랑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열기가 워낙 왕성하여 울타리 안에 줄곧 갇혀 있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큰아버지는 용모도 용모려니와 그에 못지않게 용감한 어른으로 성장해서 모든 사람의 칭찬의 대상이 되었고, 그중에서도 증조모의 칭찬은 더욱 각별하였다.

내가 다리를 쓰지 못하던 절름발이 소년이었을 때, 그는 나를 등에 업고 다니곤 했었다. 나보다 나이가 위였기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내가 아파서 걷지 못할 때, 그것도 수 마일씩이나 그는 나를 업고 다녔었다. 그런데 몇 년 후에 그가 또한 다리를 쓰지 못하게 되었는데, 나는 그가 참지 못하고 고통스러워할 때 그에게 늘 충분한 배려를 해드리지 못했거니와(생각하면 두렵기만 하다), 내가 다리를 쓰지 못했을 때 얼마나 그가 나를 생각해 주었던가를 기억조차 하지 못했었다.

그리고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에는 숨을 거둔 지 채 한 시간도 되지 않았는데 아주 오래전에 죽은 것만 같았으니, 삶과 죽음 사이에는 바로 그와 같은 거리가 있는 것이었다. 처음에 나는 그의 죽음을 썩 잘 견디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자꾸만 내 마음속에 떠올랐다. 형제 중에 누군가 죽으면 사람들은 울며 애통해하고, 내가 만일 죽었다면 나의 형은 내게 대해 그랬을 것인데, 나는 그의 죽음을 울며 애통해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온종일 그가 그리웠고, 그제서야 내가 그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었는가를 알았다. 나는 그의 친절이 그리웠고, 그가 내게 화를 내던 일이 그리웠고, 그가 내 곁에 없기보다는, 그 가엾은 큰아버지가 의사에게 자기 다리를 절단당했을 때 마음 아파할 수밖에 없었듯이 그가 없어 마음 아파하기보다는 그가 다시 살아나서 그와 싸움질이라도(우리는 가끔 말다툼을 했었으니) 했으면 싶었다. 이 말을 듣자 아이들은 그만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며 자기들이 달고 있는 작은 상장이 큰아버지 존 때문이냐고 물었다. 그리고 나를 쳐다보며 제발 큰아버지 이야기는 그만하고 자기들의 돌아가신 어여쁜 어머니에 관한 이야기나 해달라고 애원했다.

그래서 나는 7년이란 긴 세월에 걸쳐서 때로는 희망에 차서, 때로는 절망 속에서 그 아름다운 앨리스 W-n에게 구애하던 일이며, 아이들이 이해할 수 있는 범위에서 수줍음과 냉담과 거절이 처녀에게 있어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말해 주었다. 그때 앨리스를 보니 홀연히 그녀의 눈에서 엄마인 앨리스의 혼령이 밖으로 나타나는 것이었다. 그 현현이 어찌나 실제와 같던지 거기 내 앞에 서 있는 것이 어머니인지 딸인지, 그 빛나는 머리칼이 누구의 것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그리고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사이에 두 아이들은 차츰 뒤로 물러나 점점 내 눈에서 희미해지더니, 이윽고 멀리멀리 아득히 먼 곳에 슬픔에 싸인 두 얼굴만이 보일 뿐이었고, 그들은 말은 하지 않는데 이상스럽게도 내게 언어의 효과를 주는 것이었다.

“우리는 앨리스의 아이가 아니요, 당신의 아이도 아니오. 도대체 우리는 아이들의 아니라오. 앨리스의 아이들은 바트럼을 아버지라 부른다오.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오. 아무것도 아닌 정도도 못 되오. 그저 꿈이라오. 우리는 단지 존재할 수 있었던 것에 불과할 뿐이오. 세상에 나와서 이름이란 것을 지니려면 수백만 년을 지루한 레테의 강가에서 기다려야만 한다오.”

이 말에 곧장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총각 신세로 안락의자에 앉아 있었고, 거기에서 나는 잠이 들었던 것이다. 충실한 브리지트는 예나 다름없이 내 옆에 있었는데, 그런데 존 L(제임스 엘리아)은 영원히 볼 수가 없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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