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운綠雲 / 김정옥

 

멋진 아호雅號가 생겼다. 내가 글줄깨나 쓰는 사람이라도 된 것 같아 마음이 들썽거렸다. 설다문 입가로 웃음이 연기처럼 솔솔 새어 나온다.

호나 본명이나 많이 불려야 좋은 것이 아닌가. 문학회 대화방에 호 자랑을 한바탕 늘어지게 했다. 몇 군데 SNS 계정에 프로필도 수정했다. 동네방네 마구 퍼뜨리고 싶었지만, 경망스럽게 수선을 피우는 것 같아 이쯤에서 참았다.

‘녹운綠雲’ 희디흰 구름은 옅은 초록빛이 나지요. 설명할 수 없을 만큼 맑고 깨끗하고 고와서 감추어진 사랑 같습니다.’ 호에 의미를 불어넣어 주셨다. 책을 읽다가 만난 녹운이 불현듯 내게 어울릴 것 같았다고 한다. 분에 넘치는 사랑이다.

불감청不敢請이언정 고소원固所願이었다. 예전에는 제자가 성년이 되면 스승이 호를 지어주기도 했단다. 하지만 나는 글을 배운 햇수로 보나 글 지은 품으로 보나 성년이 되려면 아직 한참 멀었는데 스승께 호를 받고 보니 황송하기 짝이 없다.

디지털 세대에 사는 우리는 대부분 이미 호를 사용하고 있었다. 법명이나 세례명을 비롯하여 닉네임 한두 개쯤 없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나도 Ruby, 행복 전사, 수경 맘, 백조, 지노 그랜맘 등 댓 개나 된다. 하지만 이 닉네임은 큰 의미를 두지 않고 아무 생각 없이 지어 온라인상에서 썼다.

예전에 조상들이 호를 지을 때는 짓는 기준이 있었다. 고려 시대 이규보는 그의 백운거사어록에서 “거처하는 바를 따라서 호로 한 사람도 있고, 혹은 얻은 바의 실상을 호로 쓴 사람도 있었다.”라고 했다. 신용호는 소처이호所處以號, 소지이호所志以號, 소우이호所遇以號, 소축이호所蓄以號 네 가지 기준을 두었다고 한다. 나의 호는 소지이호所志以號에 해당하지 않을까.

‘녹운綠雲’ 사전상은 푸른 구름이다. 예전에 어머니께서 옥양목 홑이불에 양잿물을 넣어 삶으면 하얗다 못해 푸른빛이 돌곤 하였다. 희디흰 구름이 그 홑이불처럼 푸른빛이 났나 보다. 또 초록색은 청색으로부터 나왔으니 푸른 구름이라고 해도 무리는 아니다. 벽운碧雲, 취운翠雲, 청운靑雲이 모두 비슷한 구름이다. 초록 구름이든 푸른 구름이든 보통의 눈으로 쉽게 볼 수 없으니 귀함의 은유로 보인다.

내가 구름이 되었으니 그 의미를 곱씹어 천착해 봐야겠다. 구름은 학문을 연마하고 인격을 수양하면서 입신양명을 지향하는 뜻이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청운의 뜻을 품었다는 말도 나왔지 싶다.

구름은 가없이 높고 멀리 있어서 가까이할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다. 하지만 높은 산에 오르면 바람을 타고 성큼성큼 내려와 우리 주변에서 서성인다. 내가 먼저 다가가야 상대방도 다가온다는 인간관계의 진리를 깨닫는다.

구름은 아주 작은 물방울이 유기적으로 연대하여 뭉쳐서 지내다가 그 무게가 힘에 겨우면 지상으로 내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그러다 햇빛에 증발하여 생기는 수증기가 여전히 모여 또 만들어진다. 생성과 소멸이 반복된다. 소인배 같은 내 마음에 번뇌와 욕심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처럼.

구름은 늘 모양이 변하며 언제나 새로운 모습이다. 하늘 위로 뭉게뭉게 피어오르기도 하고, 얇고 보드라운 새털을 펼치기도 한다. 양이 떼로 몰려다니기도 하고, 털실을 꼬아 감아 놓은 두루마리 모양을 만들기도 한다. 내 삶도 구름처럼 늘 새로움을 추구하며 다양하게 변화하면 좋겠다.

‘정옥貞玉’은 부모님께 받은 이름이다. 굳이 한자 뜻으로 풀이하자면 절개가 곧은 구슬이다. 그 시대의 고루한 남존여비 사상이 눈에 보인다. 1950년대 딸자식의 이름은 큰 의미 없이 짓는 집이 많았다. 내 이름도 매한가지다. 어찌 됐건 정옥이로 이날까지 무탈하게 잘살고 있으니 이름이 촌스럽다는 둥 흔하다는 둥 이러쿵저러쿵하지 말아야겠다.

혹자는 이름이 그 사람의 운명을 좌우한다고 한다. 이름 때문에 몸이 많이 아프고 사업이 잘 풀리지 않는다고 하는 사람도 보았다. 급기야 개명하고 관청의 서류와 은행에 명의까지 죄다 바꾸었다. 길흉화복이 어디 이름 때문이랴. 매사 도리에 어긋나지 않으며 과업에 최선을 다하면 바라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을까 싶다.

이젠 외양은 정옥이로 살고 속내는 녹운으로 살아야겠다. 녹운이 ‘감추어진 사랑’ 같다고 하였으니 남모르게 맑고 고운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다. 연후에 변화무쌍한 구름처럼 늘 변하도록 끊임없이 사고하고 궁리하여 내면이 일신하도록 담금질을 할 터이다. 타인에게 내가 먼저 다가가 손을 내미는 도량을 키워가며 온 누리를 덮는 너른 품을 닮아야겠다. 생성과 소멸하는 우주 만물의 순리를 알고 인생의 덧없음을 깨우쳐 바람 따라 흘러가는 구름처럼 유유히 살아가리라. 구름은 한곳에 머물러 있는 듯할 때도 멈춰있지 않았다. 나도 그러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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