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리거울 변종호

 

 

더 내려갈 곳 없는 바닥이었다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던뭔가 해야겠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움직일 수가 없었다머릿속은 온통 ''라는 의문만 가득했고 흔들리는 정체성으로 방황했었다산다는 게 정말 힘겨웠고 입안으로 떠 넣는 밥조차 버거웠다.

혈기 넘치던 시기어디서든 열심히 하면 인정받을 거라던 내 생각이 틀렸다는 걸 느꼈다늘 성실하다는 말은 들었지만 대가는 미흡했다매년 승진대상자로 추천되었지만 몇 해 고배를 마셨다후배조차 앞서자 내게 문제가 있다는 걸 알았다하지만 나를 볼 수 없으니 문제를 알 수도 분석을 할 수도 없었다.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서운함으로 이어졌다속 좁은 마음에 학연도 지연도 없는 곳에서 일만 해서는 안 되는구나 여겼다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한다고 느끼자 넘치던 꿈과 열정은 사위어갔고 직장에 대한 회의懷疑만 늘어갔다.

자신의 겉모습이야 거울로 볼 수 있지만타인에 의한 자신의 평가는 알 수가 없다남들이 다 아는 나쁜 소문조차 정작 본인은 제일 늦게 안다는 사실을 피가 뜨겁던 그때는 전혀 몰랐다.

탈출구를 찾아야 했다지독하게 몸을 혹사하면 뭔가 모일 줄 알았다작심하고 휴가를 냈다위험하다고 말리는 친구의 말을 무시하고 가장 험하고 긴 코스를 선택지리산 종주를 홀로 하며 발에 물집이 잡히고 퍼져 피가 나는 극한 산행을 하면서 나를 찾으려 들었지만몸만 고달팠지 옥생각은 여지없이 도돌이표만 찍고 말았다.

어느 날 '핵심사원 양성을 위한 의식고도화 과정'을 다녀오란다그럴싸한 타이틀을 들먹이며 수군대는 동료의 말을 귓전으로 흘렸다. 120명이 전국에서 입소하고서야 직장 내 눈엣가시를 위한 '지옥훈련''지옥훈련'인 줄 알았다절망의 신음이 흘러나왔다어쩌다 내가치욕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에서 정규 지옥훈련을 이수했다는 교관들의 강렬한 눈빛은 쇠를 녹일 것만 같았다. '좀 봐주겠지시간이 지나면 수료시키겠지.'라는 판단은 심각한 착각이었다월요일에 입소해 12개 과정을 수료하면 되지만퇴소는 개인의 능력과 노력에 따라 토요일 오전부터 그다음 주 수요일까지 이어진다단 1분도 머무르기 싫은 곳에서 며칠은 지금 생각해도 소름 끼친다쉬운 과정은 있을 리 없다굳이 일례로 랜턴과 지도 한 장 주고 각기 다른 코스를 혼자 통과하는 40km 야간 행군이 있다.

살천스러운 교관은 심리전에도 매우 능했다교육생에게 희망을 줬다 연속으로 절망하게 만들어 독이 바짝 오르게 만들어 인간의 한계를 시험하며 정말 최선을 다하는가를 면밀히 체크했다.

도저히 못 견딜 것 같았다어머니는 생전에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 하셨지만 나를 이곳에 추천한 사람도 미웠고 당장 문을 박차고 나가고 싶었다하지만 그랬다간 약자의 마지막 권리인 사직서를 써야 할 운명이었다한 잔의 물을 들이켜고 몇 번의 심호흡을 하자세 살배기 아이와 아내 얼굴이 어른거렸다혼자가 아니었다다시 이를 악물었다.

보란 듯 내보이고 싶어 5박 6일간 4시간 눈을 붙이며 성대결절로 몇 번의 피를 토한 결과 상위 5% 내로 합격했다피땀으로 얼룩진 수료증을 받아 드니 절로 통곡이 나왔다얼마나 지났을까동기 연수생의 부축을 받고 일어선 하얀 벽에 걸린 거울에는 엿새 동안 씻지도 못한 텁수룩한 수염에 두 눈이 푹 꺼진 초췌한 몰골의 이방인이 있었다그게 나였다인생의 바닥에서 눈앞에 어른거리던 죽음을 보고서야 내가 보였다주먹으로 가슴을 쳤다그토록 내가 내뱉었던 모든 원망의 본질이 남과 조건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에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다른 직원보다 먼저 훈련을 보낸 이유인즉 업무 능력은 탁월하지만툭하면 바른말을 하고 온통 불만투성이인 동료들의 가려운 등까지 긁어줘 놔두면 화근이 될 거라는 보고가 발단이었다.

예전의 나를 당장 죽여야 했다불만이 많은 동료와는 적정거리를 두었고 불만을 품어도 변하지 않는 것들에 일절 관심을 뚝 끊었다어쩜 사람이 저렇게 변하냐는 비아냥거림도 흘러 넘기며본 업무에만 몰입하자 오래되지 않아 큰 성과를 올릴 수 있었다이런 모습을 유심히 지켜봤던 실세 임원의 두터운 신임으로 탄탄대로를 걸을 수 있었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게 어디 있을까지옥훈련으로는 다져진 각오를 유지하기 어려웠다흔들리는 마음을 다잡고 나를 오롯이 들여다볼 수 있는 거울 하나를 내 안에 들여놓았다반원형의 손잡이가 달린 질박한 구리거울이다며칠만 닦지 않으면 녹슬어 보이지 않는 구리거울을 매일 닦는 것은 나를 들여다보는 성찰이고 정화이며 재충전인 셈이다끊임없이 이어지는 명상을 통한 자아성찰은 온전히 나를 위한 행위이며 말끔하게 닦여진 거울을 통해 선명하게 보고자 하는 건 자아自我였다.

profi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