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창 류영택

 

 

집을 잘못 찾아온 것 같은 기분이 든다퇴근시간에 맞춰 된장찌개를 끓이던 아내의 모습도현관문을 들어서기 바쁘게 쪼르르 달려 나와 내 품에 안기던 딸아이의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어둠이 내린 집안은 썰렁하기만 하다다들 어디 간 걸까불안한 마음에 서둘러 불을 켠다불빛에 비친 거실 안은 아침에 봤던 그대로다.. 충전기에 꽂힌 무선 전화기도 반듯하게 서 있고노트북도 제자리에 놓여있다어험나는 헛기침을 하며 안방으로 향한다방문을 열려다 말고 자리에 가만히 멈춰 선다문틈 새로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아내 목소리 같기도 하고딸아이의 코 고는 소리 같기도 하다또렷이 들리지 않지만 실로 오랜만에 들어보는 소리다유년시절 토담집 봉창너머에서 들려오던 그 소곤거림 같다.

토담집은 동산기슭에 있었다그 집에는 다른 동네에서 이사를 온 젊은 부부가 살고 있었다나는 친구들과 술래잡기를 할 때마다 토담집 처마 밑으로 몸을 숨겼다토담집은 내 이마에 닿을 정도로 처마가 낮았다산비탈에 지은 집이라 그런 것 같았다흙과 돌을 반반 어개 쌓은 뒷벽은 땅속에 반은 묻혀있었다나는 처마 밑으로 몸을 숨길 때마다 허리를 잔뜩 구부려야만 했다새카맣게 그을린 벽에 껌정을 묻히긴 해도 몸을 숨기기엔 그만이었다.

술래잡기는 꼭꼭 숨는 게 능사가 아니다들켜야 재미가 있다들키는 순간 술래와 달리기 경쟁을 벌인다누가 먼저 술래자리에 터치를 하느냐죽기 살기로 뛰는 게 재미다.

그런데도 굳이 그곳에 몸을 숨긴 것은 술래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그랬던 것보다는 또 다른 이유가 있어서였다그것은 뒷벽에 난 봉창 때문이었다.

봉창(封窓)은 문이 아니다봉창은 창틀도·뼈대도 없다벽을 뚫어서 구멍만 내고 안으로 창호지를 발라서 봉한 창이다.

나는 뒷벽에 난 봉창에 쪼그려 앉아 있는 게 좋았다손을 뻗어도 닿지 않는요강단지 만한 봉창에서 새 나온 불그스름한 불빛을 보고 있으면 마치 대보름날 동산을 비추는 보름달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보름달에는 토끼가 살까계수나무는 있을까정말 떡을 찧고 있을까턱을 고운 채 상상에 빠져있다 보면 어느새 봉창 너머에서 소곤거림이 들려왔다이야기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으면 모종을 부어놓은 듯 촘촘히 솟아난 땀띠가 등을 콕콕 찌르는 것도모기가 무는 줄도 몰랐다.

그날도 저녁밥을 먹기 바쁘게 동산으로 향했다친구들은 어제 어디 숨었었더냐며 나를 나무랬다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머리만 끌쩍였다.. 한번 숨어버리면 놀이가 끝나도록 코빼기도 보이지 않으니 그럴 만도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친구들에게 다짐을 하고 술래놀이를 할 수가 있었다.

술래가 수를 세고 있는 사이 나는 또 토담집 담벼락 아래로 숨었다나는 친구들과 약속한 것도 있었고나 스스로도 미안한 마음이 들어 오늘은 봉창 아래까지 다가가지 않기로 마음을 다져먹었다.

하지만 쉽지가 않았다그날따라 호롱불에 쌍심지를 켰는지 봉창이 유난히 붉어있었다나는 불빛을 쫒는 불나방처럼 잦은 발을 할 수밖에 없었다어느새 나는 봉창에 턱을 고운 채 이야기에 빠져있었다.

"옛날 옛날에 호랑이가 담배피던 시절……."

"호랑이가 아빠야담배피우 게?"

"그냥 넘어가면 안 되겠니!"

나는 봉창너머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킥킥 웃음이 났다아이가 따지고 들 때마다 말을 둘러대느라 진땀을 빼는 아이 어머니의 모습도말끝마다 따지고 드는 이제 세 살밖에 안 된 여자아이의 얼굴이 눈에 선했다벌써 저런 생각을 할 수 있다니초등학교에 들어 갈 때까지도 할머니가 이야기를 해주면 그런가 보다 그냥 듣고 넘겼던 나보다 똑똑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발잠 좀 자거라." 아이의 배를 다독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엄마달님과 해님이야기 해줘"

"어제 해줬잖아." 입맛을 쩝쩝 다시는 아이 어머니의 모습이 봉창에 어른거렸다낭패도 그런 낭패가 없었다아이어머니의 구수한 이야기가 재미는 있었지만동화책에서 읽은 이야기와 달랐다같은 이야기를 해도 어제 다르고 오늘 달랐다아마도 이야기를 지어서 하는 것 같았다그래도 재미는 있었다달님이야기를 듣고 있다 보면 봉창이 밝았다 흐렸다 내가 정말 달님이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져들곤 했다오늘은 어떻게 이야기를 할까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이야기에 얼이 빠져 있던 나는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토담집을 빠져나와 동산에 이러자 친구들도마을 어른들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동산에 떠오른 둥근달이 내 머리와 한줄기 가는 연기를 내놓으며 꺼져가는 모깃불을 비추고 있었다.

"언제 왔어요?" 아내는 문 앞에 서 있는 나를 보고는 놀란 표정을 짓는다.

"조금 전에"

아내는 미안한지 희멀건 웃음을 내놓으며 주방으로 간다바가지를 들고 쌀독 쪽으로 서둘러 가는 것을 보니 아직 밥을 지어놓지 않은 것 같다나는 시간도 늦었는데 라면을 끓여먹자고 했다아내는 들고 있던 바가지를 도로 내려놓으며 쑥스러운 표정을 짓는다내심 반갑기도 하고 미안했던 모양이다딸아이가 안하던 잠투정을 하는 바람에묻지도 않은 대답을 하는 아내의 볼이 홍옥처럼 발갛게 물든다.

라면을 먹다말고 아내가 나를 바라본다아무래도 변명이 부족했다는 표정이다.

"여보무슨 떼가 그래 많이 나오는지." 딸아이를 목욕시키느라 지쳐서 잠이 들었다그 말을 하고 싶은 모양이다. '하필이면 이럴 때 그런 이야기를 할게 뭐람.' 아차싶었던지 아내는 내 눈치를 살핀다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씽긋 웃음을 내놓는다아내는 웃는 내 모습에 오히려 이상한 눈빛으로 바라본다아내가 그러는 것도 무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평소대로라면 '앞뒤도 안 가리고!' 그 말이 나와야 하는데 오히려 웃음을 내놓으니 뭘 잘못 먹었냐는 표정이다나는 또 웃음을 짓는다지난 날 봉창 너머의 그 모습을 흉내라도 내보고 싶어 진다..

"요 녀석이 물을 엎지르는 바람에."

밥상을 내려놓으며 미안해하는 아내에게 웃음을 내놓는 아이아버지의 목소리가 발갛게 물던 창을 더욱 붉게 물들였다.

"안 그래도 물에 말아먹을라 했었는데,, 우리 딸이 미리 말아놓았구먼." 와작와작 풋고추 씹는 소리가 그렇게 정겹게 들릴 수가 없었다.

본의 아니게 훔쳐봤던 봉창유년시절 봉창 너머의 그 모습은후제 나도 장가를 들면 저렇게 살아야지입가에 미소를 짓게 했었다봉창은 막혀 있는 것이 아니라 남편으로아버지로서 평범한 삶을 살아오는 동안 내 삶의 밑그림이 돼준 소통의 창이었다.

그날 그 아이처럼 딸아이는 잠에 빠져있다잠투정을 하며 아마도 제 엄마에게 이야기를 해달라며 보채지는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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