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차산 박완서

 

 

 

가을에는홀로 있게 하소서나의 영혼굽이치는 바다와백합의 골짜기를 지나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

 

홀로 산길을 걷는데 문득 김현승의 <가을의 기도중의 마지막 연이 내게로 왔다위로받을 수 없는 섬뜩한 느낌으로산의 나무들이 마른 나뭇가지를 준비하는 바스락 소리가 아무런 무게도 없이 어깨를 쳤다봄은 봄대로 여름은 여름대로 가을은 가을대로 그토록 찬란했던 잎의 영화를 어찌 저리 무심히 떨굴 수가 있을까내가 있는 힘을 다해 세파世波와 문득문득 이 세상에 때어나길 참 잘했다고 믿게 해 준 향기로운 도취의 시간들이 아무것도 아니란 걸 받아들여야 할 나이는 종교도 위안이 되지 않을 만큼 초라하다그러나 지금까지 애면글면 이룩했다고 믿어온 약간의 소유와 알량한 명예를 마른잎처럼 떨구지 못하는 한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보다 더 초라해지리라는 걸 안다.

가을이 깊어갈수록 산길은 푹신푹신해진다늙을수록 예민해지는 건 뼈의 마디이다아무리 걷는 게 건강에 좋다고 해도 아스팔트나 보도블럭 위를 걸으면 무릎이나 발목이 거기 관절이 있다는 걸 즉시 알려오기 때문에 오래 걷는 걸 피하게 된다몸속의 장기나 관절이 그 존재를 알려오는 건 위험신호와 같은 거기 때문에 무심할 수 있을수록 좋다명치께에 위가 있다는 걸 의식하는 건 과식했을 때나 소화가 안 될 때문인 것처럼요즈음 산길은 등산화 없이 걸어도 전혀 관절에 부담이 안 될 정도로 흙길 위에 쌓인 낙엽의 탄력이 쾌적하다간밤에 가랑비라도 한차례 뿌린 날 아침의 산길은 탄력뿐 아니라 그 향기 또한 깊고 그윽하다낙엽은 가랑잎이 주지만 솔잎도 꽤 섞였다젖은 솔잎과 가랑잎에서 은은하게 풍겨오는 향기를 폐부 깊숙이 들이마시면 마치 고고하고 탈속한 인격에서 말없는 감회라도 받은 것처럼 정신의 정화 같은 걸 경험하게 된다설사 그게 순간적인 환상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세속의 잡스러운 일상에는 이게 웬 떡이냐 싶게 귀한 선물이다바로 그런 게 산의 좋은 기가 아닌가 싶다아차산은 야트막하고 골짜기마다 아치울 마을처럼 작은 마을들을 두 팔로 포근히 안고 있는 것 같은 형상을 한 모성적인 산이지만 정상에 올라 능선을 따라 걷다보면 의외로 매우 남성적인 산이라는 걸 알 수 있다능선의 중요한 지점마다 고구려의 보루성堡壘城 터가 남아 있어 이미 발굴이 완료된 상태인데 거기서 출토된 무기와 농기구생활용품을 서울대 박물관에서 전시를 한 일이 있다.

고구려는 무덤 속에 많은 벽화를 남겨서 그 시대 사람들의 생사관우주관뿐 아니라 생활상을 생생하게 전해주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우리가 관람할 수 있는 고구려 벽화는 중국 지린吉林성의 남쪽고구려 국내성이 있던 자리인 지안集安에 몰려 있는 고분군에서인데금년에 가본 바에 의하면 심한 훼손과 도굴 등으로 대부분의 고분이 관람불가였다.

몇 년 전만 해도 5.6기의 고분을 볼 수 있었는데 이제는 한 기밖에 개방을 하고 있지 않아 여간 실망스럽지 않았다직접 고분 벽화를 못 본 이들도 사진이나 텔레비전 화면을 통해 고구려문화가 얼마나 호방하고 화려찬란했는지 정도는 다 알 수 있는 것은 훼손되기 전의 벽화 덕이었다무장을 한 무사나 말을 타고 짐승을 쫓는 남성상도 그 역동적인 모습이 인상적이지만 무용총 무희들의 물방울무늬 옷은 그 색채의 화려함에 있어서나 디자인의 세련됨에 있어서나 천오륙백 년 전의 복식이라는 게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부엌에서 음식을 만드는 광경도 벽화로 남겼는데 그 중에도 인상적인 것은 시루를 이용해서 음식을 익히는 모습이었다최근에는 가정집에서 시루를 별로 안 쓰지만 내가 시집가서 살림할 때만 해도 집안의 필수품이었다질그릇으로 밑에는 예닐곱 개의 구멍이 뚫려 있어서 그 위에다가 가는 새끼줄로 엮은 시루밑을 깔고 솥에다 얹어 김을 올려서 떡이나 약밥을 쪄냈다시루가 집집마다 있어야 하는 까닭은 매년 이맘때 즉 추수가 끝난 시월 상달에 고사를 지내 복을 빌고 이웃과 나눠먹기 위한 고사떡은 꼭 시루에다 붉은팥을 켜켜이 깔고 쪄내는 시루떡이어야 하기 때문이다그런 시루의 역사가 천오백 년이 넘는 줄은 몰랐다아차산 보루성터에서는 바로 내가 쓰던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시루가 출토되어 서울대 박물관에 진열되어 있었다그 밖에도 한강유역을 차지하려고 고구려와 백제가 얼마나 치열하게 싸웠나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무기도 많이 출토되었지만 유난히 시루가 신기했던 것은 천오륙백 년을 무화하는 그 현재성 때문이다그러나 정작 지안에 있는 고구려박물관에서는 시루를 볼 수 없다아차산 보루성터 출토물이 훨씬 더 다양하고 풍부하다.

삼국시대뿐 아니라 최근세사가 살아 숨 쉬는 곳 또한 아차산이다아차산 능선을 남쪽으로 따라 내려오면 아차산성이 나오고 워커힐이 되지만 북쪽으로 올라가면 반대쪽으로 망우리 묘지가 나온다망우리얼마나 좋은 이름인가그러나 구리에 속한 동쪽 묘역 중에는 죽어서도 빛을 발하는 정신혹은 죽어서도 시름을 못 놓았을 것 같은 분들의 묘지가 있었다만해 한용운소파 방정환호함 문일평처음으로 우두를 배워 시행한 지석영박인환조봉암 등의 묘소가 같은 묘역에 적당한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다그분들 말고도 그 묘역으로 가는 안내도에 이름을 남긴 유명인사는 여러 분 더 있다그중에서 그분들만 기억하는 건 아마 내가 그분들을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그러나 안다고 생각할 뿐 만난 적이 있는 건 아니다내 가족이나 친지 중 먼저 간 사람은 많지만 망우리 묘지에 묻힌 사람은 없다망우리의 그많은 무덤 중 내가 만나보고 기억하는 얼굴은 없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망우리 묘지를 좋아하는 것은 그런 분들의 묘역이 있기 때문이고아차산을 사랑하는 까닭도 그분들의 기가 서려 있는 산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이 가을이 아주 가기 전에 어느 비 갠 아침 홀로 아차산에 오르고 싶다올라 그분들의 묘지 앞에서 내 청춘의 감수성을 건드린 아름다운 혹은 힘찬 문장을 떠올리고 싶다내 팔뚝에 아직도 크게 남아있는 네 개나 되는 우두자국과 산골마을에서 그것을 맞으러 면소재지까지 가던 어린날의 공포를 떠올리며 미소를 짓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또한 제 명에 못 죽은 무덤 앞에서 잔인했던 한 시대를 떠올리며 소름이 돋은들 어떠하리마지막으로 한용운의 묘소 앞에서 편안한 휴식을 취하고 싶다젖은 솔잎 냄새를 맡으며그분의 죽음은 혹시 그런 향기를 뿜으며 백골이 되지 않았을까 몽상하며이 묘역이 나에게 특별한 것은 나에게 결핍된아니 처음부터 부재했던 부성적인 것에 대한 갈망이나 동경 때문인지도 모르겠다며칠 전에는 후배 문인의 시골집이 있는 양양엘 다녀왔다골짜기 골짜기마다 자지러지게 물든 단풍이 대청봉에서 흘러내린 맑은 계곡물에 비치니 선경이 따로 없었다나는 최고의 찬사로 아차산 단풍은 여기 대면 아무것도 아니란 소리를 연발했다그러나 집으로 돌아와서는 뭐니뭐니 해도 아차산의 수수한 단풍이 제일이라고 말했다맹세코 둘 다 거짓말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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