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편지 / 권남희

 

 

‘환불 가능합니다.’

인터넷에, 원앙베개를 사면 부부는 금슬이 좋아지고 나사못 헐거워진 것처럼 헛도는 연인도 뜨거워진다는 광고 문구가 떴다. 그렇게 안 되면 환불해준다니 원앙침이 그리 대단하단 말인가.

 

문득 결혼 때 어머니가 해준 원앙침을 생각해내고 장롱을 열었다. 베개는 구석진 자리에 삼십년이 넘도록 그대로 있었다. 부부가 머리 맞대고 나란히 누우라는, 혼례용 베개는 높기만 하고 푹신한 맛이 없었다. 신혼 때 하룻밤 자고 났더니 목이 뻣뻣해지고 머리도 띵해져 쓰지 않은 채 방치하였다.

 

보통 것보다 길고 네모난 모양에 양쪽으로 원앙과 수복壽福 한문 자수가 있다. 메밀껍질로 채운 속은 오랜 세월을 견뎌낸 만큼 날캉거릴 법도 한데 꼬글꼬들한 촉이 여전하다.

 

거실소파에 장식으로 두고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에 베개에 씌운 하얀 보를 뜯었다. 버리고 버려 돌아가신 어머니가 나에게 준 유일한 물건이 되었다고 생각하며 보를 터는 순간 종이를 접은 것이 떨어진다. 꾸리를 풀어보니 부적으로 노란 색 바탕의 한지에 붉은 상형문자가 그려져 있다. 壽福같기도 하고 부귀다남 내용인 듯 애매한 그림체의 글씨다. 역시 꾀가 많은 나의 어머니는, 가까이서 어리숙한 딸을 담금질할 방법이 없으니 결혼생활 잘 유지하라는 기도가 담긴 부적을 베갯잇에 살짝 감춰놓았다. 펼쳐진 부적 위로 자식 때문에 늘 전전긍긍하던 어머니의 모습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친다.

첫 아이를 낳았을 때도 액막이 부적을 태워서 아이 머리에 발라주라고 보내주었는데 내 아이만은 토속 신앙에 묶어지는 것이 부담스러워 그냥 버리기도 했다.

 

어머니가 언제부터 나에게 부적을 만들어주었는지 기억은 희미하다. 사춘기가 되면서 나는 암호문같은 붉은 글씨의 종이쪽지들을 어머니 몰래 버리곤 했다. 부적에 대한 어머니의 믿음은 나의 대학교 입학시험 때 절정이었다. 시험장에 지니고 들어가야 한다 한다며 배냇저고리와 한께 강제로 내 가슴에 찔러 넣었다. 너무 터무니없는 어머니의 강요에 부끄럽기도 했던 나는 시험장으로 들어가는 즉시 빼서 가방에 숨기고 가슴을 두근거리며 얼굴을 붉혔다.

 

어머니는 일가붙이 없는 서울에서 하숙하는 나에게 때때로 부적을 주었다. 눈치도 빠르지 않고 늘 어물거리는 딸을 위해 그렇게 해야 안심이 되는지 부모님 곁을 떠난 후로는 보호자인양 척척 들이댔다. 몸에 지니고 다니는 것, 방문에 붙여두는 것, 태워서 물에 타 마시는 것... 어머니의 걱정만큼 종류도 늘어나고 있었다.

 

꿈이 뒤숭숭하다든가 , 마음이 불안하다싶으면 아버지가 보내는 편지에 같이 넣어서 부쳤다. 아버지처럼 자상한 내용을 담은 편지는 쓰지 않았지만 어머니 마음을 넣은 부적이 대신 배달되곤 했다. 나 역시도 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로 어머니까지 전달되려니 믿는 구석이 있어 친구들과 아버지, 동생들에게는 거의 날마다 편지를 보내곤 했지만 아주 당연한 듯 나의 어머니 김귀순 여사 앞으로는 편지를 쓴 적이 없다.

 

어머니가 편지지에 모양새를 갖추어서 글을 쓸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은 비밀장부를 보고나서였다. 겨우 한글을 깨친 어머니의 외상장부기록은 부적을 닮은 상형문자였다. 어머니의 유일한 기록물은 살아가는데 필요한 가장 간소한 것들이었다.

동생들이 쓰다 남은 노트를 집어다가 몽톡 체로 적어둔 내용은 맹자네 쌀 한 말, 갱자네 콩나물 등등 외상값이나 빌려준 돈 등으로 어찌어찌 그려둔 게 역력한 흔적들이었다.

 

아버지가 내준 작은 가게를 또순이 기질과 총기 하나로 운영하는 어머니가 외상장부에 적어야 할 일이 있으면 성격은 급한데 얼마나 답답했을지. 딸에게 편지 한 장 쓰고 싶을 때면 아버지나 동생들 불러서 대필이라도 시키면 될 일을, 자존심이 센 어머니는 결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집전화도 귀한 당시 그저 어머니 방식대로 멀리 떨어져있는 자식이 궁금하고 마음 갑갑할 적마다 점술가에게 걱정을 쏟아놓고 기도문으로 받아오는 부적이면 그만이었나보다.

 

서울은 정신 후리고 알겨내고 옭아내는 사람 많으니까 아무나 만나지 마라, 잘 먹고 건강해라, 해동갑하도록 늦게 다니지 마라, 남자의 말에 넘어가지 마라.... 하지 말았으면 하는 규칙들이 많아질수록 믿을 거라고는 부적이었다.

자식에게 사랑의 주문을 보내는 일이 우선인 것처럼 열심이었던 어머니는 정작 자신을 위해서는 그 어떤 부적도 주문하지 않았으리라.

 

남편도 환불이 될까? 얄팍한 에고 트립을 꿈꿀 때 30년 넘도록 원앙침 속에서 기척을 않다가 ‘마지막까지 잘살아야한다’ 고 부적을 내밀며 저승에서도 뒤통수 때린 어머니. 누비이불을 간직했더라면 바느질자리마다 어머니의 경고가 꿈틀거리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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