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눈빛 / 안춘윤

 

 

 

직업의 특성상 내밀한 대화나 상담을 하다 보면 모든 삶은 긴 서사와 같다는 생각이 든다. 누구의 삶도 평이하지 않았고 특별했으며, 귀하지 않은 인생은 없었다. 어떤 삶도 완벽하지 않았고 누구도 풍랑 없이 바다를 건널 수 없었다. 지극히 평범한 생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타인의 인생에 내 삶을 반추하면서 안달하며 집착하던 것들을 슬며시 내려놓았다.

하지만 말기 암처럼 병이나 사고로 생의 막다른 곳으로 내몰린 사람을 만나면 말길을 찾기가 힘들었다. 살고 싶다는 강렬한 본능으로 더 선명해지는 의식은 오히려 고통스럽다고 했다. 예상하지 못했던 절망 앞에서 의연한 모습으로 버티는 것은 나이와 상관이 없는 것 같았다. 그럴 때마다 아주 오랜 기억 속에서 나에게 당신의 마지막 결정을 의뢰했던 어르신을 떠올렸다.

약국을 개업했다. 삼십 대 중반, 경험이 없는 나는 약국 입지로 어디가 좋은지 몰랐다. 그저 조용하고 깨끗한 곳만 찾았다. 사람들 발길이 드문드문한 고즈넉한 골목길, 조용하고 한가한 약국이었다. 오랜 주택가 길은 낡고 가로등도 별로 없이 어두웠다. 조금 나가면 번화한 시장이었지만 그곳은 묘하게 외떨어진 섬이었다. 그 안에 스물다섯 평 되는 적막한 공간이 또 하나의 섬이었다.

병원에 근무한 경험을 살려 골목 주민에게 무료 상담을 해주기로 했다. 시간은 많고 손님도 없으니 적절한 조건이었다. 의료체계가 미흡했던 시기에 보건 상담과 진료 안내 등을 했다. 소문이 나면서 오지랖 넓은 동네아줌마는 다른 동네사람까지 데리고 왔다.

어느 날 팔십 대로 보이는 할아버지가 자전거를 타고 오셨다. 깡마른 체격에 안경을 쓴 얼굴은 완고해 보였다. 얼굴빛은 검고 입은 고집스럽게 닫혀 있었다. 이후 일주일에 한 번씩 들러서 약을 사가셨다. 자전거를 타고 오실 때도 꼿꼿한 자세로 흐트러진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 항상 퉁명스럽게 할 말만 하셨다. 그분 앞에 서면 나는 늘 시험 보는 학생이었다. 몇 가지 증상만 툭 던지듯 말씀하고 내 대답을 기다렸다. 그러면 나는 언제나 고심하며 설명했다. 할아버지는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거릴 뿐이었다. 그러나 오실 때마다 안색은 점점 더 나빠졌다. 병원 방문을 권고했지만 소용없었다. 그렇게 한 해가 갈 때 즈음 할아버지의 발길이 끊어졌다. 가끔 아들이라는 분이 약을 가져가곤 했지만 할아버지를 꼭 닮아서 말이 없었다. 궁금했지만 한편으로 마음이 편했다. 병원에 다니신다는 말에 숙제를 끝낸 기분이었다. 그렇게 그 어르신은 잊혀졌다.

어느 날 아침 할아버지의 아들이 찾아왔다. 할아버지가 나를 꼭 모셔오라고 했다는 것이다. 갑자기 겁이 났다. 무엇이 잘못되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짚이는 것이 없었다. 아들은 무뚝뚝하게 말했다.

“임파암 말기라 작년에 3개월밖에 못 사신다고 했는데 오래 버티셨으니 고맙죠.”

나는 깜짝 놀랐다. 약사로서 전혀 몰랐다는 자책감과 충격으로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고집이 세서 병원 모시려 해도 듣지도 않고 선생님께 할 말이 있다고 하시네요.”

난감했다. 내가 그분에게 무슨 말을 할 수가 있을까. 마음이 복잡해졌다. 그러나 혼자는 못 간다고 막무가내인 할아버지의 아들 때문에 결국 따라나섰다.

그 집은 주택가 깊은 골목 막다른 곳에 있었다. 방 안에 들어서자 가슴이 쿵하고 내려앉았다. 괜히 왔다는 후회가 들면서 온몸이 떨려왔다. 아랫목 자리에 할아버지가 앉아 계셨고 자식들과 친지들이 빙 둘러앉아 있었다. 무겁게 내려앉은 침묵이 숨을 조여왔다. 임종을 지키려고 모인 분위기였다. 할아버지는 한눈에도 위중하게 보였다. 부러질 듯 뼈가 튕겨 나온 팔다리에 피부는 검게 타버려 바싹 마른 지푸라기 같았다. 목 주변에는 임파선을 따라 크고 작은 혹들이 보였다. 나는 얼떨결에 가운데 앉게 되었다. 무릎을 꿇고 인사를 드렸다. 할아버지는 숨을 몰아쉬며 손짓으로 인사를 대신하였다.

“그동안 선생 덕분에 잘 지냈지. 나는 그냥 집에 있고 싶어.”

할아버지는 마지막 힘을 모아 또박또박 말하셨다. 가족들이 병원으로 모시려 했지만 완강하게 거부하고 계셨던 것이다. 방 안의 모든 눈이 내 입으로 쏠렸다.

나는 순간 입술에 경련이 일었다. 방바닥을 짚고 계신 할아버지의 팔은 뼈만 남아 몸을 더 이상 지탱하기도 힘들었다. 온몸이 금방 부서져 내릴 것만 같았고 퀭한 할아버지의 눈빛은 간절했다. 나는 차마 보기 힘들어 고개를 푹 숙였다. 적막한 방 안에 할아버지의 거친 숨소리만 들렸다. 가슴이 먹먹했다. 나는 입이 바싹 말랐다. 너무 손이 떨려 주먹을 꽉 쥐었다. 소리가 나오지 않아 쥐어짜듯 간신히 말을 했다.

“할아버지 이젠 병원 가세요. 혼자 견디시기엔 너무 힘들어요.”

죽음 앞 마지막 한 걸음을 준비하는 그분을 차마 쳐다볼 수 없었다. 연민이 통증처럼 가슴을 저미며 밀려왔다. 한참 어린 나에게 마지막 거취를 묻고 싶은 그 마음을 헤아리기 힘들었지만 그 눈빛이 애달팠다. 나는 울먹거리며 겨우 말을 이었다.

“꼭 가세요. 더 이상 제가 할아버지를 도와드릴 수가 없어요. 죄송해요.”

나는 목이 메어 마지막 말은 혼자 삼켰다.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저 혼자 겪고 있을 그 고통을 덜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할아버지는 고개를 떨구며 무너지듯 누우셨다. 그리고 숨을 고르신 후 나를 애잔한 눈빛으로 바라보셨다.

“괜찮아요, 고마워. 선생 말대로 하겠소!”

한 달 정도 지났을까. 상복을 입은 할아버지 댁 맏상제가 와서 인사를 했다. 할아버지가 고맙다고 전해달라고 하셨다고. 그리고 고통 없이 편안히 가셨다고 했다.

이후 나는 가끔씩 혼자 물어보곤 했다. ‘왜 할아버지는 당신의 마지막을 내게 물어보셨을까? 연륜 있는 의사도 노련한 약사도 아니고 누가 봐도 어설픈 골목 약국 약사에게….’

아마도 그분은 자식들과 함께 집에서 마지막까지 지내고 싶다는 마음을 나라면 헤아려주리라 믿으셨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때는 차마 약사로서 그렇게 말씀드릴 수는 없었다. 그것은 할아버지에게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때 젊었던 나는 가슴보다는 머리로 그분 고통을 덜어주는 것만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무너지듯 흔들리던 할아버지 눈빛은 두고두고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러면서도 나를 다독이듯 고개를 끄덕이며 바라보시던 그 눈빛도 잊을 수가 없었다. 실은 육신의 고통보다 지독하게 엄습하는 외로움이 더 두려우셨던 것은 아니었을까. 아니 사랑하는 이들을 의식이 남아 있는 순간까지 보고 또 보고 싶으셨던 것은 아니었을까. 지금이었다면 나는 할아버지에게 이런 대답을 해드렸을 것이다.

“할아버지! 원하시는 대로 집에서 가족들과 함께 지내세요. 아드님 곁에서 행복했던 기억들 모두 모아 가슴에 담아가세요.”

살아온 길과 남겨진 흔적들이 서서히 페이드아웃되면서 원점으로 돌아가는 길, 그 고단한 길에서 바라보던 눈빛은 나를 언제나 막막하게 했다. 생과 사의 경계선에서 한 발자국씩 물러서면 우리는 서로가 이방인이었다. 경계선은 가깝고도 멀고 깊었다. 때로는 그 고독이 내게도 전이되어 깊이 묻어둔 상처가 욱신거렸다.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의 외로움과 나의 무기력함에 시달리면서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약국에서 한순간을 함께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눈빛에 나의 간절함을 담아 대답하는 것이었다. 혼자가 아니라고.

<에세이문학 2021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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