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탄것 / 김미원

 

 

 

1.

미르가 다리에 힘이 없어 서지 못하고 네 다리를 바닥에 뻗은 채 삶은 야채와 사료를 갈아준 유동식을 힘겹게 먹고 있다. 혀의 운동 기능이 둔해져 물을 혀로 말아 올리지도 못한다. 먹고 나서는 오줌도 똥도 싸지 않았는데 어디가 불편한지 계속 컹컹대 목이 쉬었다. 무엇을 해주어야 할지 몰라 그저 목과 등을 쓰다듬어줄 뿐이다.

우리 가족은 녀석의 신음소리를 들으며 밥을 먹는다. 음식을 입에 떠 넣는 행위가 바로 옆에 있는 녀석에게 미안하다. 이것은 내가 기분이 좋을 때의 감정이고 피곤하고 바쁘면 신음소리에 예민해지고 급기야 짜증이 난다.

미르는 17년 6개월 된 노령 개이다. 생후 두 달 만에 우리 집에 온 강아지에게 용감한 개가 되라고 용의 뜻을 가진 순우리말 미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이름 탓인지 독일 사냥개 닥스훈트종인 녀석은 소파도 겅중겅중 뛰어올랐고, 밥을 줄라치면 귀를 휘날리며 달려왔다. 이가 날 때는 가죽 가방 손잡이를 물어뜯기도 했고 천둥소리에 대적하겠다든 듯 하늘을 향해 날카롭게 짖기도 했다.

이제 녀석은 눈도 잘 안 보이고 귀도 잘 안 들리고, 왼쪽 잇몸에 생긴 염증이 피부 바깥까지 터져 나오고 치매에 걸려 주인도 몰라봐 목욕시키려고 목을 잡으면 잽싸게 몸을 돌려 주인을 물기도 한다. 모르는 손님이 와도 짖지 않는다. 작년 가을 청소기 호스가 막혀 과열로 불이 나 온 식구가 고함을 지르며 불을 끄느라 난리가 났을 때도 녀석은 태평하게 잠을 잤다. 대변과 소변을 보고 뒷다리에 힘이 없어 그냥 주저앉아 그것들을 깔아뭉개고 끙끙댄다. 밤이면 울음소리인지 신음소리인지 모를 기괴한 소리를 낸다. 생로병사를 가진 생명의 고통이, 저 세상으로 건너가는 단계가 마음 아프다. 녀석이 드디어 숨을 고르고 몸을 공처럼 말고 나른한 잠에 들었다. 우리 집에 평화가 들었다.

일곱 달 전인 작년 10월, 일어나지도 못하고 걷지도 못하는 녀석을 동물병원에 데리고 갔다. 의사는 사람으로 치면 백 살도 넘는다며 이만하면 건강하게 오래 살았다며 안락사 이야기를 꺼냈다.

 

2.

화장을 하고 가루를 뿌리는 장면을 상상하니 안구에 금방 물이 차올랐다. 스테로이드 주사를 맞으니 제법 잘 걸어다녔다.

2, 3주에 한 번씩 스테로이드 주사를 맞히며 사료를 유동식으로 갈아주고 먹을 때는 다리를 지탱해주고 새벽에 두세 번씩 기저귀를 갈아주는 일을 일곱 달째 하고 있다. 졸린 눈을 반쯤 뜨고 기저귀를 갈아줄 때면 화도 나고 안락사 생각이 슬그머니 고개를 쳐든다. 하지만 밥도 잘 먹고 패드에 대소변을 보면 불편해 끙끙대는, 감각이 살아 있는 녀석을 보면 안락사 생각을 한 내가 죄스럽다. 하늘이 생명을 자연스레 거둬가기 전에 한 생명을 거두는 시간을 결정하는 것은 두렵고 무겁다. 아들은 내가 힘든 눈치를 보이면 기저귀도 갈고 똥오줌을 뭉개면 목욕도 시킨다.

오른발과 왼발의 재바름이 일정치 않아 스텝이 꼬여 자빠진다. 그리고 다시 일어나지 못해 허공에 대고 빈 발길질을 한다. 숨 쉴 때마다 드러나는 앙상한 뼈들… 이렇게 사는 것이 생명을 위한 것인지 모르겠다. 생명의 고통을 두고 보며 어느 날 심장이 멎기를 기다리는 것이 더 이기적인 것이 아닌지 생각한다. 간절히 녀석의 언어를 듣고 싶었다. 무얼 원하는지, 이렇게라도 더 살고 싶은지, 지금 죽기를 원하는지. 살기를 원한다고 결론지었다.

장 그르니에의 <고양이 물루>를 읽다 나와 같은 고민을 하고 있는 작가가 가깝게 느껴졌다.

“차라리 그를 위해서라도 죽는 쪽이 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나는 그 고양이 자신을 위해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굳이 믿으려 애를 썼다. 그런데 실제로는 내가 사랑하던 한 존재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더 이상 보고 견디기 어려워서 그렇게 생각을 했던 것이다.”

한 생명체의 고통이 안타까워서가 아니라 내가 그것을 보는 것이 더 고통스럽기 때문에 작가는 이사를 가면서 결국 희생시키는 것으로 방향을 정했다. 그는 곧 죽을, 아니 죽일 고양이를 위해 만찬을 대접하고 수의사에게 간다. 작가는 시체를 물루가 가장 좋아했던 정원에 묻으며 시골 영지에 묻히는 부유한 로마 사람들만큼 행복할 것이라고 위안한다. 참으로 비겁하고 영약하게 자기합리화를 하는 게 인간이다.

 

3.

어쩌면 영원히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순간이 왔다. 허망했지만 정해진 운명의 질서대로 그 순간이 온 것이다. 미르는 숨을 한번 크게 쉬고 다시는 숨을 쉬지 않았다. 나는 그것이 마지막 숨인 줄 몰랐다. 모든 생명 있는 것의 종국은 똑같았다.

장례를 진행하는 분은 하얀 무명천에 녀석을 감싸고 화구에 넣기 전에 우리에게 정중하게 절을 했다. 인간의 화장 절차와 똑같다는 사실이 조금 우스웠지만 생명을 보내는 것에 대한 예의가 고마웠다. 손에 딱 맞춤한 옥수수 껍질로 만든 작은 함에 유골을 넣어 집으로 왔다. 딸과 나는 오는 내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저녁에 퇴근하고 오면 녀석의 임종을 보지 못한 아들과 녀석이 산책하던 아파트 마당에 유골을 뿌리는 절차를 거행하려고 했다. 남편이 의외의 말을 했다. 우리가 갈 가족 공원묘지에 묻어주자고. 녀석이 늘 있던 자리에 유골함을 놓았다.

어머니기일에 공원묘지를 찾아 나무 밑 그늘 진 곳에 남편이 입을 굳게 다물고 땅을 조금 파고 유골함을 밀어 넣었다. 그가 하~ 큰 숨을 쉬었다. 다시는 숨탄것을 거두지 않기로 마음먹는다.

녀석이 떠난 지 두 달이 지난 지금도 가끔 생각난다. 석양이 아름다운 저녁 산책길에 한들거리며 나를 바라보며 보폭을 맞추며 걷던 모습, 양광이 따뜻한 봄날 햇살 들어오는 창가에 누워있던 모습, 외출하고 들어오면 자발스레 깡충거리다 몸을 뒤집고 반가워하던 모습…. 지금도 외출했다가 현관문을 열면 녀석이 달려올 것 같다.

<에세이문학 2021년 가을호

profi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