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아풀 / 최장순

 

 

이름이 없는 건 슬프다. 바나나는 그냥 바나나, 포도는 그냥 포도니까. 한 송이 두 송이로 불러주면 끝이다. 혹자는 말할 테지. 과일이라고만 명명하지 않는 것도 어디냐고.

이름이 곧 존재다. 그만의 이름이 없다는 건 특별한 관심이 없어서다. 아니 이름을 불러줄 만큼 아는 게 없어서다. 호젓한 둘레길에서 만나는 많은 식물은 시시각각 그 모습을 달리한다. 그러나 여전히 내게는 풀이라는 명칭 하나로 끝난다. 익숙한 듯해도 지나치는 것이 훨씬 더 많다. 그래도 하늘나리나 엉겅퀴나 구절초를 알고 있으니 다행, 카메라에 담아내는 것은 반가움의 표현이다.

산허리를 따라 생긴 둘레길은 두 시간 거리다. 걸음으로는 만 오천 보쯤 된다. 임도(林道)이기 때문에 차가 다닐 수 있을 만큼 널찍한 길. 아침 햇살이 대지를 따뜻하게 감쌀 때쯤, 워킹화를 졸라매고 호위무사라도 되는 듯 스틱을 챙겨 집을 나선다. 완고한 아파트 벽을 벗어났다는 안도감일까, 코끝에 닿는 바람이 상쾌하다. 둘레길에 접어들면서 펼쳐지는 세계는 언제나 변화무쌍하다. 하루가 다르게 잎은 색깔을 바꾸고 꽃이 피는가 싶더니 어느새 지고 있다. 작은 새들은 발걸음에 맞춰 화들짝 앞장서다가도 눈앞에서 홀연히 사라진다. 마음에 담고 있던 우울한 찌꺼기들은 기억나지 않는 꿈처럼 뇌리에서 사라진다. 걸음은 눈 맞춤할 새로운 것들을 기대하면서 느긋해진다.

온몸의 감각기관을 활짝 열고 눈앞에 펼쳐진 사물들을 바라본다. 조물주라도 되는 양 피조물을 사열하듯 으쓱해진 발걸음. 몇 번의 오름과 내림 끝엔 반환점이 있다. 되돌아가는 길목에선 아차, 놓칠 뻔한 반가운 얼굴을 만나기도 한다. 양지바른 곳의 무더기로 피어 있는 작은 풀, 포아풀이다. 언제나 담담한 모습으로 나를 맞는다. 민들레만큼이나 흔해서 전국 어디서나 볼 수 있다. 볏과식물로 무릎 정도만큼 자라고 꽃대를 길게 뻗어 연녹색 이삭을 피워 올린다. 잎은 벼에 비해 억세지 않고 부드럽다. 왕포아풀, 실포아풀, 섬포아풀, 좀포아풀 등 그 종류도 많다. 씨앗은 논의 훼방꾼 피보다 작아 작은 산새들의 먹잇감으로나 적당할 정도다.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는 것은 억척같은 뿌리의 뻗음에 있다. 대부분 식물처럼 성장점을 줄기나 가지 끝에 두는 허장성세(虛張聲勢)와는 거리가 멀다. 뿌리 가까운 밑동에 성장점을 둔 포아풀은 존재 의미의 성실한 탐구자이자 실존주의자다.

입술을 동그랗게 오므려야 나오는 이름, ‘포아풀’. 예쁜 이름은 발음하는 입도 예쁘다. 그러나 여전히 하찮은 풀이다. 다만, 풀에서 조금 더 들어간, 생색내어 불러주는 이름 같다. 마치 사람의 이름을 부르기 전, 생김새라든지 어디에 사는 기준 정도로 불러주는 호칭 같다. 두드러지게 돋보이거나 알리고 싶은 욕심이 없어서일까. 이름값에 비하면 억울할 만큼 겸손한 처신이다. “이게 포아풀이야.” 일행에게 일러주면 좋아할까. 눈에 띄는 꽃도 없고 탐스런 열매도 없는 딱히 특징지을 것 없는 풀. 한 포기 두 포기 세어주면 그만인 무명이다. 그러나 내게는 여전히 예쁜 이름이다. 시골에서는 누렁이가 좋아해 꼴을 베면 어디에나 있어 따라오는 풀이지만.

안 보이던 꽃이라도 발견하면 핸드폰으로 검색을 하고 이름을 알게 되면 신대륙이라도 발견한 듯 신기해하고 좋아한다. 한 포기의 잡초도 그 이름을 알고 불러주면 살갑게 다가오게 마련이다. 때로는 위계질서에 따른 직책보다 이름을 불러주던 상관들이 얼마나 친근하게 다가왔던가. 관심이 부르는 이름이다.

남과 비교하는 생존경쟁은 안중에 없어 보이는 풀. 튼실한 뿌리로 어디에서나 생육할 수 있는 자존감이다. 옆에서 온갖 것들이 다투어 꽃을 피울 때도 침묵하는 그도 사실은 꽃이다. 다만, 내가 그냥 풀이라 불러줄 뿐이어서 관심에서 멀어질 뿐. 분주한 걸음이 무심히 지나칠 때도 그저 빙그레 웃으며 여린 이삭을 흔들어 인사를 건넬 뿐이다.

‘포아풀, 안녕?’ 그냥 풀이 아니라 특별한 풀이야, 나의 명명은 그에게 준 거대한 자부심 같아 ‘잘 지냈어?’ 물으면, ‘오늘도 안녕하시지요?’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며 반긴다. 소박한 물음 속에 감추어진 따뜻한 애정이다. 내가 때마다 유심히 그에게 머무는 이유다. 자기만의 키 높이로 살아가는, 자존심 하나로 지켜가는 삶의 표본이지 싶다. 좋으면 좋은 대로, 싫으면 싫은 대로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자세는 어디서 비롯되는 것일까. 바람 불어도 시류에는 흔들리지 않겠다는 그 자존이 그냥 좋다.

<에세이문학 2021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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