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장간을 엿보다 / 허정진

 

단원 김홍도의 <대장간> 그림을 보신 적이 있나요. 18세기 말, 조선 후기 시대에 제작된 채색 민화랍니다. 설마 시골 장터에서 대장간 구경 한번 안 해본 사람이 있으려고요. 대장간은 쇠를 녹여 각종 연장을 만드는 곳으로 야방이나 야장간이라고도 한답니다.

그림에는 풀무나 화덕, 소탕(燒湯) 외에 세세한 배경은 없지만 일하는 사람들의 표정과 동작이 사실적으로 잘 묘사되어 있더군요. 앳돼 보이는 젊은이가 긴장된 눈길로 화덕에다 풀무질하고, 나이 든 집게잡이는 벌겋게 달구어진 쇳덩어리를 집어서 모룻돌 위에 올려놓고, 힘 좋은 메잡이 두 명이 긴 나무 자루의 쇠메로 번갈아 내리치는 그림입니다. 손님인 듯한 사내가 지게를 벗어놓고 큼직한 무쇠 낫을 숫돌에 쓱싹거리며 벼리고 있는 모습도 보이고요.

“쩡 쩌엉 따앙 땅” “쉬이이익 피지지직”하며 쇳덩어리를 두드리는 망치질과 물속에 넣어 담금질하는 소리가 번갈아 들려오는 것 같아요. 일하는 사람들의 움직임과 호흡이 기차 바퀴 구르는 소리처럼 잘 맞아떨어지는 음률에 치열한 삶의 숨결이 느껴집니다. 그림에는 없지만 동네 애들이나 수선을 맡긴 사람들이 주변에 모여들어 있겠지요. 대장간 안의 시큼한 쇳내와 근육질의 일하는 모습이 볼만했을 겁니다.

못 만드는 게 있을까 쉽네요. 칼이나 창, 화살 같은 무기류는 나라에서 관장했겠지만 생활 도구나 일하는 연장 같은 것은 모두 동네 대장간에서 취급했겠지요. 부엌칼, 도끼, 쇠가위, 쇠바퀴, 자물쇠, 대후비개, 마름쇠, 물미, 문고리, 호미, 삽, 괭이, 낫, 보습, 가래, 대패, 자귀, 톱, 쇠스랑, 갈고리, 장도리, 작두, 망치 등등. 호미만 해도 어디 종류가 한두 가지인가요. 왼손잡이용 호미, 큰 호미 작은 호미, 풀만 콕콕 찍어내는 끝이 뾰쪽한 호미.

그 당시에는 새것만 만든 게 아니었다네요. 장날이면 집집이 무디어진 농기구나 연장들을 들고나와 벼리기도 하고, 낡은 곳 수선도 하고, 이참에 아예 성냥해서 새로운 것을 만들기도 하였답니다. 대장간의 묘미는 내가 원하는 대로 즉석에서 주문생산이 가능하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아마 사람의 마음 빼고는 다 만들었을 겁니다. 그리스 대장장이 신 ‘헤파이스토스’도 워낙 손재간이 좋아서 눈에 보이지 않는 그물까지 만들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세상일에 대충 대충이 어디 있었겠습니까. 쇠를 선택하는 일, 풀무를 조절해 불의 온도를 맞추는 일, 메질과 망치질, 쇠의 강도를 결정하는 담금질이 모두 제대로 되어야 제대로 된 물건이 나오는 법이었겠지요. 낫 한 자루를 만들자면 천 번의 망치질이 있어야 한다고 하네요. 쇳덩어리가 일곱 번 이상 불구덩이에 들어가고, 한번 들어갔다 나오면 백번 넘게 망치질해야 탄생하는 것이었으니까요. 그렇기에 무쇠 낫은 요즘의 스테인리스 낫과는 비할 바가 못 되겠지요. 알묘조장(揠苗助長). 적당히, 빨리 만드는 것이 더 쉬운 세상에 시간이 걸려도 제대로 만들어야 하는 장인정신을 오늘날 인생살이에도 배우고 싶네요.

쓸데없고 공연한 행동을 가리키는 ‘부질없다’라는 말도 대장간에서 나왔다고 하죠. 강하고 단단한 쇠를 얻기 위해서 쇠를 불에 달구었다 물에 담갔다 하기를 여러 번 해야 하는데 제대로 불질하지 않은 쇠는 물렁물렁하고 금세 휘어지기 때문에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기 때문이랍니다. 인생이란 것도 역경과 시련을 견뎌내는 과정을 겪으면서 더욱 강해지고 당당해지는 것인가 봐요.

옛날 대장간은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겠네요. 최소한 풀무잡이와 집게잡이, 메잡이 등 3명 이상의 대장장이들이 팀을 이루어야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신참은 아무래도 풀무질부터 배워야 했을 겁니다. 대장간의 불은 절대 꺼뜨리면 안 되니까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겠지요. 숯불이 괄아야 제구실을 할 텐데 불땀이 약해지면 선배들에게 혼나면서 눈물깨나 흘렸을 겁니다. 예전에는 다 그랬듯이 어깨너머 눈썰미로 배우는 도제식 훈련이잖아요. 저 그림의 집게잡이를 보세요. 연륜이 있어 보이는 얼굴에서 많은 경험과 기술을 쌓은 장인의 기품이 느껴집니다. 혼자 허리춤에 염낭을 차고 있는 걸로 봐서는 주인 노릇도 겸하나 봅니다.

숨이 차 헐떡이는 저 메잡이의 표정이 안타깝네요. 입에서 허기진 단내가 나는 것 같아요. 그래도 여름은 아닌 것 같아 다행입니다. 힘쓰느라 앞가슴 드러난 메잡이 외에는 복장이 단정한 것을 보니 계절이 아마도 해토머리 초봄쯤 된 모양이에요. 겨우내 잠들었던 만물이 살아 움직이고 이제는 논밭 갈이에 나서야 할 시기겠지요. 들녘에는 쑥이며 고사리며 새싹들 빼꼼히 고개를 내밀었을 테고요. 그때쯤 대장간은 농사 연장들 준비로 더욱 바빴을 겁니다. 일을 마치면 주막에 가서 탁주 한 사발씩 하며 하루를 털어냈겠지요. 어쨌든 예나 지금이나, 네 일이든 내 일이든 각자의 삶이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일하는 사람 모두 묵묵한 표정들입니다. 한석봉 어머니가 말없이 떡가래를 썰어 보이는 불립문자처럼 제 할 일들 알아서 하느라 눈짓 몸짓으로 침묵의 언어를 대신하고 있네요. 누군가 내뱉는 대장간의 목소리는 판소리의 수리성처럼 껄껄한 쉰 목소리일 것 같아요. 그렇지만 그 소리에는 따뜻한 포용과 배려를 품고 있겠죠. 용광로처럼, 세상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이는 통섭과 융합의 소리가 울려올 것 같습니다.

무쇠를 진흙보다 쉽게 다루는 대장장이들. 뜨거운 불과 강한 쇠를 다루려면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요. 아마도 무쇠보다 더 단단한 팔뚝과 뚝심을 가졌을 거예요. 그래도 자긍심은 있었을 겁니다. 대장간이 있어야 농사든 건축이든 생산과 경제 활동이 가능하고, 무기가 있어야 마을과 나라를 지켰을 테니까요. 그 대장간을 모태로 오늘날 거대한 용광로나 제철소가 만들어지고 자동차 공장이나 조선소가 되어 우리의 삶을 더 부강하고 풍요롭게 만드는 모태가 되지 않았겠습니까.

대장간은 어쩌면 삶의 에너지가 만들어지던 곳이 아니었을까요. 이글이글 타오르는 불등걸이 시뻘건 불길이 치솟는 분화구 같지 않나요. 옛날 기마민족의 말발굽 소리처럼 지축을 흔들며 울려오는 망치질은 또 어떻고요. 그곳은 뭔가 멈춰서는 안 되는 곳, 힘과 동력을 생성하는 심장부 같은 곳, 그래서 불굴과 불멸을 상징하는 정신적 메타포를 가끔 느끼지 않았던가요. 베르디의 오페라 <일 트로바토레> 중에서 희망차고 역동적으로 울려 퍼지는 ‘대장간의 합창’처럼.

살다 보면 사는 게 힘이 들 때가 종종 있지요. 한적한 곳에서 슬픔을 위로받는 것도 좋지만 오히려 대장간으로 달려가서 힘들고 지친 삶을 용기로 극복하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싶어요. “훅훅” 달아오르는 열기와 쉬척지근한 땀내만 느껴도 당장 심장이 “쿵쿵쿵”, 두 주먹에 힘이 불끈 솟아날 것 같지 않나요. 살면서 가끔은 텅 빈 마음에 대장간을 들여놓곤 한답니다.

<선수필 2021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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