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소도 웃음이라 / 강천

 

 

그곳에 가면 소리가 있다. 첫 한 발짝부터 일만 팔천 보 마지막 걸음까지 변함없이 함께하는 소리가 있다. 물소리, 새소리, 바람 소리, 사람 소리.

 

막막한 소리

여로라는 게 무엇인가. 목적지를 향하여 쉼 없이 가야만 하는 것이 아니던가. 한번 시작한 걸음은 그 종착에 이르기까지 결코 멈출 수 없다. 그러니 고단하다고 할 밖에. 새로운 여정으로 첫발을 내디딘다는 것은 언제나 두려운 일이다. 얼마나 멀리,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가다가 방향을 잃어 엉뚱한 곳으로 가지나 않을까. 내가 도착할 곳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그 막연한 길을 갓 나서는 심심산골의 물소리를 제일 먼저 만났다.

계곡물은 앞서가는 동반에 ‘빨리 가라’ 등을 떠밀고, 따르는 일행에는 ‘뒤처지지 말라’며 서로의 족쇄가 되어 버둥거린다. 좁은 길을 만나면 우르르 퉁탕 뒤섞이며 나뒹군다. 돌부리에 걸려 엎어지더니 피멍 든 정강이를 어루만질 틈도 없이 내달린다. 아득한 낭떠러지에 놀라 파랗게 질린 비명을 지르고, 열 길 웅덩이에선 맴돌이하느라 허우적거리다 숨넘어간다. 끊임없이 흘러가야만 하는 이 기약 없는 소리가 어쩌면 막막한 내 삶이 내지르는 아우성 일지도 모르겠다.

 

소리 없는 소리

먹고 사는 일, 먹여 살리는 일, 이보다 더 원초적인 게 어디 있을까. 더 잘 먹고 더 잘 살고 싶다는 욕망 따위는 지나친 사치다. 먹을 수 있을 때, 먹을 수 있을 만큼 먹어 두어야 하는 것이 산새들의 삶이다. 그조차 나날을 장담할 수 없는 노릇이니. 철없는 어린 것들, 밥 달라고 조르는 재재거림이 숲길로 넘어온다. 애써 숨겨놓은 둥지가 무색할 지경이다. 대신 어미 아비는 소리를 잃었다. 한때는, 봄날의 그 한때는 사랑가로 들썩였던 숲이었건만. 자식 건사한다는 게 어디 목청이나 뽑고 있을 만큼 한가로운 일이었던가.

질곡을 건너본 이는 알 것이다. 소리조차 내지 못할 때와 소리조차 나오지 않는 때가 있다는 것을. 내 새끼 배고플세라, 바지런 떨며 퍼덕이는 날갯짓 소리가 숨 가쁘다. 다 보내고 나면 홀가분할까. 벗어나면 후련할까. 숲길, 육추의 고단이 나무 사이로 흐느적거린다. 이 소리 없는 한숨 소리가 답답한 내 삶이 토해내는 하소연일지도 모르겠다.

 

안간힘 소리

다리 위에 섰다. 무얼 하러 왔으며, 무얼 해야 하는지 모르기는 예서도 마찬가지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냄새 맡고, 맛보는 모두가 번뇌라더니 촉각이라고 다를 바 없나 보다. 살갗을 스치는 한 점 바람에 세속의 근심들이 올올이 일어선다. 일 걱정, 노후 걱정, 자식 걱정, 사돈 팔촌의 뜬구름 같은 걱정까지. 그만치에 놓아두고 홀몸으로 왔다고 여겼거늘 어느 결에 전장의 깃발처럼 앞서서 나부낀다. 잊으려 하면 더욱 선연하고, 놓으려 할수록 더더욱 펄럭인다.

누가 말하지 않았던가. ‘버리지 못할 바엔 안고 가라’고. 그게 이래서 나온 말이었던가 보다. 한 소리도 않던 바람이 이제 서야 사락사락 나뭇잎 소리를 낸다. 내려놓아보려고 버둥거리며 안간힘 쓰는 이 소리가 진부한 내 삶에 켜를 더하는 자충일지도 모르겠다.

 

푸석한 소리

다리 아픈 나그네 철퍼덕 주저앉는 소리 한 번 차지다. 큰 숨 한 번 돌리고 나니 들릴 듯 말 듯, 소리에 섞인 또 다른 소리가 있다. 조곤조곤한 사람 소리다. 산사길 아니랄까, 좋은 말만 고르고 골라서 이러쿵저러쿵 이다. 이리하면 좋으니, 그리하면 안 되느니, 미주알고주알 이다. 누가 있어 저리 부처님 같은 말씀을 하시나. 고개 들어 찾아보니 우듬지에 매달린 소리통이 주둥이만 살았다. 기왕지사 엎어진 김에, 들리는 김에 가만가만 듣고 보니 그 또한 그럴듯하다. 말하는 저이는 이 말들을 다 행하며 살까. 뜬금없는 궁금증에 실없는 웃음이 뜬다. 그려, 이래서 웃는구나. 산다는 게 언제나 이랬었다. 뜻하지 않은 가운데 번개처럼 스치는 시답잖은 실소에서 겨자씨만큼의 위안을 얻고는 했었지.

이리 웃으나 저리 웃으나 웃는 게 좋은 게지. 자연의 소리를 찾아 산중으로 들었다가 오히려 사람 소리에서 푸석한 웃음을 얻는다. 이 찰기 없는 헛웃음 소리가 메마른 내 삶에 읊어주는 자조의 게송일지도 모르겠다.

 

그곳에서 홀로 걷노라면 소리가 있다. 첫 한 발짝부터 만 팔천 보 마지막 걸음까지 잠시도 떨어지지 않는 소리가 있다. 막막한 소리, 소리 없는 소리, 안간힘 소리, 푸석한 소리. 소리길에 가면 소리가 있다. 심사에 그리는.

<수필미학 2021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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