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달한 커피 홍미자

 

어느 날 문득 생생하게 떠오르는 맛이 있다고단한 퇴근길에 마신 소주의 쌉쌀함이나오랜 몸살 끝에 먹었던 칼국수의 칼칼함누군가에게 상처받아서 눈물이 핑 돌 때 한 알 머금은 사탕의 새큼달큼한 맛처럼.

남편이 출근한 뒤 거실에 혼자 남으니 불현듯 커피믹스가 마시고 싶어진다스틱 커피를 뜯어 머그잔에 털어 넣고 끓는 물을 붓는다쌉쌀하고도 달착지근한 향이 훅 올라온다식기 전에 한 모금 꿀꺽 삼킨다작동 스위치를 꺼버린 것처럼 머릿속이 멍해진다몸은 이미 호졸근한데 명치끝에 외로움이 매달려 있는 듯 싸하다허전할 때 커피믹스를 마시는 습관은 자식들이 집을 떠난 후에 생겼다.

아들마저 공부를 하기 위해 제 누나가 있는 도시로 떠나자 쏙쏙 들어오던 시사나 문학은 예전의 것이 아니었다모임을 만들어 나가보았지만 몸만 앉아 있었다자유로워지면 하고 싶었던 그 많은 일들이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하루는 베란다에서 빨래를 널다가 아파트 아래를 멍하니 내려다보고 있었다평소에는 아찔하던 17층 높이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종이비행기처럼 마당으로 날아가 앉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시야가 아득해지는데도 엄마라는 의식은 놓을 수 없었는지 아이들 얼굴이 차례로 떠올랐다허둥지둥 주방으로 달려가 커피포트 스위치부터 눌렀다후들거리는 손으로 커피잔에 설탕을 얼마나 넣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속이 한참 동안 달달했다그날 나는 자신도 모르게 각인된 할머니의 행동을 따라하고 있었다.

쓴맛을 즐길 줄 알아야 양반이라던 할머니가 설탕물 같은 커피에 빠져든 것은 그해 늦여름이었다팔월 끝자락에 있는 할머니의 생신이 가까워지자 온 집안이 들뜨기 시작했다멀리 사는 자식들을 손꼽아 기다리던 할머니는 맏며느리를 은근히 재촉하며 열무김치부터 담았다할머니와 어머니가 소매를 걷어붙이고 수돗가에 앉아서 싱싱한 열무를 씻을 때 푸릇한 물방울이 빛을 반짝이며 사방으로 튀었다붉은 날고추와 보리밥을 듬뿍 갈아 넣고 담은 열무김치는 생신날에 맞추어 알알하게 익었다.

할머니는 생신 전날 아침에 대문을 활짝 열어놓았다새벽부터 일어난 어머니는 자청 파를 새파랗게 데쳐 강회를 만들었다갖은 색 고명을 넣은 잡채가 양푼에 가득 차고 조기 자반이 노릇노릇 구워질 때 쯤어머니는 아껴 둔 그릇을 식기장에서 꺼냈다장미였던가붉은 꽃이 앙증맞게 찍힌 하얀 접시를 켜켜이 재면서 마른행주로 닦는 며느리를 할머니는 흐뭇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오후가 되면 삼촌과 고모가 대문으로 들어섰다할머니는 물색 고운 옷으로 갈아입고 마루에 우뚝 서서 자식들을 맞이했다삼촌과 고모는 할머니를 두 팔로 푹 싸안으며 첫인사를 한 다음 정식으로 절을 올렸다품을 넓히고 절을 받는 할머니 치마폭에 용돈과 선물 꾸러미가 수북하게 쌓였다덩달아 신이 난 아버지는 서둘러 동생들 앞에 화투판부터 깔았다쏟아지는 웃음소리와 탄식이 저녁을 넘기고 새벽까지 이어졌다할머니는 자식들 곁에 꼬박 앉아계셨다시큼한 술 냄새와 잠을 잊은 노인의 훈수가 쩌렁쩌렁 담을 넘었다할머니 얼굴은 삶의 충만감에 물들어 불그레했다.

질펀한 밤과 이어진 이른 아침에 할머니는 생신상을 받았다국에 밥을 말아 한술 뜨시면서 밥상에 앉은 자손을 죽 둘러보는 할머니는 여왕벌 같았다생신의 절정은 아침상을 물린 후 남은 음식을 바리바리 싸 들고 유원지로 놀러갈 때였다할머니는 소풍 가는 날 숨겨두었던 패션 감각을 드러냈다풀 먹여 아른아른 다림질한 하얀 모시 치마 적삼을 벙싯 떨쳐입고 자식들한테 에워싸여 대문을 나서던 할머니 모습이 영상처럼 남아있다.

그렇게 풍요롭던 할머니의 날도 고모와 사촌들이 집으로 돌아갈 때가 되자 철 지난 바닷가처럼 스산해졌다마지막까지 노모 곁에 남아있던 막냇삼촌이 대문을 나서자 할머니는 돌아서서 오래 앓았다자리를 겨우 털고 일어난 당신은 자식들이 올 날을 다시 기다렸다자식과 보낸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갔지만기다리는 날들은 엿가락보다 길게 늘어졌다우렁우렁하던 할머니의 목소리가 흐느적거렸고 당당했던 풍채도 나지막해졌다.

텔레비전 앞에 종일 앉아 있던 할머니가 갑자기 생각난 듯 며느리가 즐겨 마시는 달콤한 커피를 찾았다커피 한 스푼에 크림 두 스푼 그리고 네 스푼의 설탕할머니의 주문에는 달달함이 강조되었다뜨거운 김을 후후 불어가며 커피를 마실 때 할머니 눈빛에서는 많은 것들이 아스라하게 멀어졌다일제 침략기와 전쟁 통에서 칠 남매를 낳아 키워낸 여장부의 강단이다섯 며느리를 절절매게 했던 기세가 잿불 같이 잦아들었다오롯이 자식 기다리는 낙으로 견뎌야 하는 시간을 달콤한 커피로 달래면서 그저 보드라운 노인으로 늙어갔다고 그 시절 할머니 모습을 설명할 수 있을까.

쓴맛에 단맛과 고소한 맛이 고루 섞인 커피는 인생의 맛을 닮았다그래서인지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에 나온 커피믹스는 대중의 고적한 시간을 평정한 듯하다동네 슈퍼마켓에 가보면 유독 할머니들이 커피믹스를 많이 산다그분들은 커다란 커피 상자를 버겁게 들고 가면서 이거 마시지 않으면 일이 안 돼라고 한다살아본 만큼 살아본 사람들에게 그 일이란 내 할머니의 경우와 같이 시간을 견디는 일일 텐데쓸쓸한 삶을 달콤한 커피로 위무한 다음에야 또 하루를 살아갈 수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커피믹스가 그렇듯이 우리는 허전한 시간을 달래주는 맛에 인이 박인다인 박인 맛은 몸 깊숙이 스미어 있다가 마음이 무너지려고 할 때 의식 위로 또렷이 떠오른다그 특별한 맛을 온몸으로 음미하고 있으면 텅 빈 것 같은 마음이 어느새 그득해진다근거 없이 일어난 불안도막연하게 드리운 그리움도 남의 것인 양 멀리 보인다막막한 내일이 문을 열어 보이면서 그래도 살만한 날이 아니냐고 묻는 것 같기도 하다문득 어떤 음식이 간절하게 당긴다면 이는 그것을 먹고 씩씩하게 삶을 이어가라는내 안의 생명력이 보내는 신호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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