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척 / 노병철

잘 차려입은 중년의 남녀가 서원 입구에서 두리번거리고 있자 해설사분께서 다가가 안내를 한다. 이것저것 설명을 하는데 중간에 너무 자주 해설사 말을 쓸데없이 끊는다. 해설사가 배롱나무를 설명하자 배롱나무를 처음 보는 듯 신기하게 보면서 이름을 재차 묻는다. 얼굴 때깔을 보아하니 나보다 학교 끈이 길면 길었지 짧지는 않은 듯한데 어째 배롱나무를 모를까 신기하였다. 나도 소나무 버드나무 정도만 아는 식물의 문외한이지만 그래도 배롱나무 정도는 아는데 이해가 안 되었다. 마치 우리 집 딸들이 염소똥을 보고 이게 뭐냐고 묻기에 애들이 한 번도 염소 똥을 본 적이 없어 이런 말이 나온다는 생각은 했었지만, 나이 지긋한 중년들이 배롱나무를 몰라 묻는 게 신기하기만 했다.

 

“껍질이 없는 나무라 속과 겉이 같다고 해서

선비정신이 깃든 나무라 서원에 많이 심습니다.”

 

해설사 아줌마가 말은 참 그럴싸하게 한다. 하지만 배롱나무조차 모르는 사람들에게 흥이 빠졌는지 그 정도에서 말을 거둬버린다. 속된 말로 찐 맛 없는 게다. 8월에 오면 꽃이 만개하는데 오랫동안 꽃을 피워 그 꽃의 이름을 백일홍이라 부른다고까지는 해줘야 제멋인데 말이다. 조금 덧붙이면 일명 간지럼 나무라고 해서 가지를 손으로 긁으면 잎이 바르르 떨며 간지럼을 탄다고까지 해야 배롱나무의 진수를 알게 하는데 조금 아쉬웠다.

 

배롱나무가 엄청 많은 담양 명옥헌에서 들은 이야기엔 마치 여인의 벗은 속살처럼 배배 꼬아 어여쁜 자태로 선비를 녹인다고 했다. 능글맞게 손을 살짝 대면 바르르 떨며 색기를 부리기도 하면서 말이다. 역시 해설사의 세 치의 혀에서 그곳의 운치를 더한다. 그리곤 손으로 나무를 꼬집으며 한마디 덧붙인다. “에라이 나쁜 년.” 듣는 이들은 한참이나 웃게 된다. 벌써 십 년이나 지난 일인데도 내 머리엔 그때 그 이야기가 단단히 자리 잡고 있다.

 

여행 가서 해설사 설명을 듣지 않고 사진만 찍어대는 사람들을 보면 나는 ‘등신’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해외 여행지에서 하나라도 더 듣고 싶은데 주절거리거나 사진 찍는다고 분답게 하면 짜증이 난다. 나 스스로 해설사가 되어 열심히 공부하고 달달 외워 써먹으려는데 듣는 이의 태도가 산만하거나 별로 들을 마음이 없다 싶을 땐 기운이 빠지고 그다음부터 대충 건성으로 지나가게 된다. 누구 한 사람이라도 바짝 붙어 듣거나 나도 모르는 질문을 쏟아낼 땐 긴장은 되지만 기분이 상당히 업된다. 그래서 해설을 듣는 피교육자가 될 땐 가능하면 많은 것을 얻어내려 질문을 쏟아낸다. 아마 내가 가고 난 뒤에 소금을 뿌리든지 침을 뱉겠지만 공부는 분명할 것이라 여겨진다.

 

병산서원의 기둥이 둥글다. 도산서원의 기둥은 네모나다. 왜 그럴까? 임금이 머무는 궁궐이나 부처님께서 자리 잡은 법당이 아니면 둥근 기둥을 사용하지 못한다고 분명 배우고 들었건만 사실과 맞지 않는 현장을 볼 때마다 당황하게 된다. 해설사에게 묻는다. 어떤 분은 모른다고 바로 말을 하는 분도 있지만, 또 어떤 분은 이상한 이야기로써 지지 않으려는 의도를 보이며 눈알에 핏발을 세우는 분도 있다.

 

율곡 이이 선생은 신사임당이 있는 외갓집에서 컸다. 퇴계 이황 선생도 춘천 박 씨 어머니의 친정인 춘천에서 컸다. 지금 춘천 퇴계동 부근이고 '퇴계(退溪)'라는 동네 이름도 이때 생겼다고 한다. 퇴계 선생이 즐겼다는 ‘공지’라는 생선과 공지가 살았다는 공지천(孔之川) 이야기를 본 나로선 춘천이 외갓집이라 찰떡같이 믿고 있었다. 그런데 예천 지보면 대죽리에 있는 퇴계 선생의 외갓집은 또 뭐란 말인가. 그 동네를 찾아가 성균관 전의(典儀), 향교전교(典校)를 하신 전 이장에게 물었다. 그 동네 뒷산에 묻힌 퇴계의 외할아버지 박치의 묘를 분명히 보았으며 묘비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과연 퇴계 선생의 외갓집은 어디란 말인가? 나는 궁금한 것이 많은데 어디에도 답을 명확하게 주는 이가 없다.

 

심지어 퇴계 선생 외할아버지 이름까지 알 수가 없다. 박치의 치자가 검은비단치(緇), 다스릴치(治)혹은 취(就)라고도 이야기한다. 물론 이걸 알고 모르고가 내가 먹고사는 일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그저 잘난 체하고 싶은 헛된 과시욕일 뿐이리라. 난 이딴 생각에 사로잡혀 해설사에게 뭔가 하나 얻으려고 했건만 배롱나무 설명에 그냥 픽 웃음만 나왔다.

 

“하나는 원샷으로 주시고요. 또 하나는 투샷으로 주세요.”

 

커피점에서 주문하는데 나는 그냥 아메리카노나 라떼는 알아도 술 마실 때 사용하는 원샷이 어떻게 커피점에서도 통용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 옛날 물레 다방 김 마담이 요구르트 하나 얻어먹으려고 콧소리 섞어 “설탕 둘 프림 셋?”이라고 묻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나중에 커피를 ‘연하게 진하게’ 주문하는 것이라는 걸 알고 나의 우둔한 머리를 한번 친다. 내 외갓집 족보도 제대로 모르면서 남의 외갓집 족보 때문에 골머리 싸매는 것 자체가 우스웠다. 그리고 그까짓 배롱나무 안다고 우쭐거리는 나 자신이 부끄러워 진다.

 

 

profile